제232화. Xmas Movie (10)
아이들이 스쿨버스에서 우르르 내렸다. 카메라가 스쿨버스의 문을 줌 인했다. 가로줄 무늬가 그어진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먼저 보이고, 짤랑이는 은색 체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뻔쩍거렸다.
타악.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가볍게 뛰어내린 캐시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검은색 사이에 섞여 허공에서 춤을 췄다.
캐시가 숨을 들이마시며 미소 띤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이 마지막 등교일이라고 생각하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경쾌한 발걸음이 교실로 향했다.
드르륵!
문이 경쾌하게 열림과 동시에, 캐시는 맨 뒷자리, 연한 금발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얼룩덜룩 추상화를 그려 넣은 마테오의 취향도 이해해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캐시가 상큼하게 웃자, 마테오의 얼굴이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꾸깃꾸깃해졌다.
물론, 캐시는 산뜻하게 무시했다.
조례가 끝난 후.
페니의 부름에 캐시는 나비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행복한 캐시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잠깐 화면이 왼쪽에서부터 어두워졌다가, 오른쪽에서부터 밝아졌다.
복도를 배경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캐시는, 조금 전의 행복한 미소는 어디로 가고 푸른 눈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변화는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일단 의심부터 해라. 세상이 네게 엿 먹일 준비를 하는 거니까.
내가 만든 격언이다.
“그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단다. 왜 말 안 했니? 선생님이 알아보니 마테오도 잘못했더구나. 마테오한테 그 부분은 따끔하게 혼을 냈어.”
와그작!
거기서 더 구겨질 수 있구나, 싶을 만큼 캐시의 얼굴이 구깃구깃해졌다. 평소라면 버릇없는 행동을 지적했을 페니는 그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캐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어렵니?”
“걔네가 절 따돌리는 게 아니라, 제가 걔넬 따돌리는 거예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어, 음. 그렇구나.”
이걸 자존감이 높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답이 없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페니가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지우곤 다시금 말했다.
“그래도 캐시,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학교생활이 더 즐겁지 않겠니?”
“아니요.”
“…….”
몇 번을 어르고 달래봐도 캐시는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태도만 불량해졌다. 페니는 결국 한숨을 삼키곤 가장 중요한 본론을 꺼냈다.
“마테오 측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도, 선생님은 네게 벌을 내려야겠다.”
“…….”
“벌로, 다음 주 내로 동아리에 들도록 하렴. 이게 내가 너한테 내리는 벌이야.”
벌이라는 말에 밝아졌던 얼굴이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 허옇게 질렸다.
봐, 격언이 딱 들어맞지?
아무튼 결론은.
“싫으면요?”
“그러면 매일 화단 청소를 시킬 거야. 네가 다음 학년이 될 때까지.”
망할.
* * *
장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반에 돌아온 캐시는 이 비틀린 폭풍의 원인이 엘비라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고 산타 모니카 초등학교에는 쓰레기 같은 클럽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그 이후 새로운 클럽을 만들기로 마음먹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콰앙!
캐시가 분한 얼굴로 책상을 내리쳤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냐고!”
“나, 나 있잖아….”
엘비가 소심하게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야심차게 록 밴드부를 만들었지만, 신청자가 0명인 상황에 캐시는 분노했다.
“너 한 명 가지고 어디다 써! 세 명은 더 있어야 한단 말이야!”
“대, 대부분 이미 동아리가 있으니까….”
“하아….”
캐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야.”
“응?”
“동아리 안 든 애 누군지 알아?”
“어….”
엘비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일단, 우리 반에는 제이가 동아리에 안 들었을 거야.”
“제이? 그게 누군데?”
대화가 끝나자, 엘비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했다.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년이 화면에 잡혔다. 캐시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동시에,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딱 봐도 순진해 보이는 게, 구슬리면 금방 넘어올 거 같았다.
다시 현재 시점이었다.
* * *
인정한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미안. 나는 관심 없어.”
“뭐? 왜?!”
콱!
제이가 멱살이 잡혀 흔들렸다. 그 상태에서도 제이는 꿋꿋하게 말했다.
“록이라면 나도 알아. 엔트로피의 소용돌이처럼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음악이잖아!”
캐시와 제이가 물러섬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건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한쪽에서 엘비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얼굴로 관전하고 있었다.
밀어붙이는 캐시에 제이가 완고한 투로 외쳤다.
“알려준다고 해도 싫어! 난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 4를 플레이해야 해서 그런 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단 말이야!”
“배틀로얄 스플래쉬… 뭐?”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 4.”
게임기를 꼭 안은 제이가 새침한 어조로 톡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미안한데, 내가 어제 새로 구한 거라서 클리어를 해야 하거든. 이만 가줄래?”
그리고 승리한 건, 방패였다.
스코어 0대1.
제이 로빈은… 강적이었다.
* * *
화면이 바뀌었다.
수업 시간인지, 페니가 칠판에 무언가를 필기하고 있었지만, 캐시의 시선은 그쪽이 아니라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캐시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한 곳에는, 제이 로빈이 앉아 있었다.
다시 시점이 바뀌었는지, 카메라는 캐시보다 제이를 위주로 비추었다. 그렇기에 제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캐시의 시선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캐시는 말 그대로 제이를 관찰했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제이의 등에는 캐시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지독한 집념이었다.
문제는, 그 시선을 상대방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들어오자 일시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시선에 제이가 안도의 숨을 터트렸다가, 이내 서글픈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이 너무 근심 가득해 보여서 짠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제이의 심경에 동화된 지윤정이 잠시 동정하는 눈으로 제이를 보았다.
“오늘은 조별 수업을 할 거니까, 자리 붙여서 앉자. 선생님이 네 명씩 한 조로 지정해줄 거야.”
제이와 같은 조가 된 건 반 아이 두 명과 더불어 마테오 휴스였다. 어느새 볼이 다 나았는지, 마테오는 멀끔해진 얼굴로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조장 할게. 이의 있는 사람 있어?”
아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이미 마테오의 만행을 한차례 보았던 관객들은 일어날 일을 직감했다.
그리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둘 다 피피티를 하고 자료 조사는 쟤가 하는 거야.”
“오! 그러면 되겠다!”
마테오의 비열한 행동이 이어졌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전개였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저, 마테오. 혹시 네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일까 봐 말하자면, 자료 조사는 한 명이 하기엔 너무 할 게 많아. 두 명이 맡아서 분담해야 적당….”
제이의 의외의 반항이었다.
“조장인 내가 그렇게 정했는데 조원이 반대하겠다고?”
기분 상한 티가 역력한 마테오에도 제이는 사자의 머리 위에서 날갯짓하는 참새처럼 조잘조잘했다.
“조장은 조를 대표하고 책임을 지는 자리지, 조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당히 반감을 살 수 있는 행위,”
나름대로 침착하게 말했지만, 어딘가 붕 뜬 목소리와 어색하게 턱을 치켜든 행위 때문에 똑똑하다기보다는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테오는 이런 항변을 들어줄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펜을 들더니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제이 로빈, 협력성 C-”
“끄압! 자, 잠깐, 잠깐잠깐! 뭐 하는 거야?”
제이가 기겁하며 마테오를 말렸다. 마테오가 느른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이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들 찬성했는데, 너만 반대해서 진도가 안 나가잖아. 그러니까 협력성이 부족한 거 아니겠어?”
관객들은 어느새 영화에 완전히 푹 빠져서 보았다. 제이가 불쌍한데… 분명 불쌍하긴 한데 갓 태어난 비둘기처럼 파들거리는 게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지윤정은 이제 오혜은이 포스터를 보고 사랑스럽다며 생난리를 쳤던 걸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캐시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쭈글거리던 마테오가 의기양양하게 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이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곳에 누가 있는지 알기 때문에, 마테오의 행위가 거슬린다기보단 그 후에 나올 장면이 기대되었다. 호랑이 없다고 맹수 행세하는 고양이가 귀엽게 보이는 이치였다.
파들파들 떨던 제이가 세상 억울한 낯으로 항변했다.
“이건 권력 남용이야! 넌 정당한 시민의 의견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어!”
“그럼 네가 조장 하지 그랬어.”
제이가 마치 지구가 네모라고 주장하는 인류를 목격한 사람처럼 마테오를 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걸 처음부터 지켜본 자가 있었으니.
나는 제이 로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의 시작이 시점의 전환을 알렸다.
* * *
그동안의 장면이 빠른 재생을 누른 것처럼 휙휙 지나갔다. 그 위에 캐시의 독백이 얹어졌기에, 관객들은 모두 캐시의 시점이라는 걸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은밀하게 쳐다보았기 때문에 그 애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지켜봤다.
어디가 은밀했다는…?
이미 제이의 시점을 본 관객들은 캐시의 독백에 속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독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기다렸다.
적당한 기회가 나타날 때까지.
장면이 빠르게 지나가, 이내 마테오와 실랑이하는 제이의 모습이 나왔다.
캐시가 씨익, 웃었다.
그래, 이런 순간을 말이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캐시를 발견한 제이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내 그는 마테오와 실랑이하다 말고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저, 저기.”
“더 말하면 정말 협력성 C-를,”
“아니! 그게 아니라… 하,”
콰앙!
“…이에나를 조심하라고.”
뒤늦게 따라붙은 말은 주인에게 닿지 못하고 아련하게 흩어졌다.
제 의자를 찬 범인을 본 마테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왜! 아, 아무것도 안 했잖아!”
큰 소리를 내었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탓에 위협적이라기보단 불쌍해 보였다.
캐시가 은근슬쩍 발을 빼려는 제이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이 훌륭한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내 밴드부원한테 일 떠넘겼잖아.”
환한 캐시의 미소와 달리 뻣뻣하게 굳은 제이의 뺨이 파들거렸다.
이내, 캐시가 못 박듯이 말했다.
“얘. 내 밴드부원이거든.”
‘언제부터?’라는 생각이 드러나는 얼굴로 캐시를 보던 제이가 격하게 고개를 저어댔다.
결국엔 과제 분배도 공평하게 이루어졌으니, 제이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딸꾹!”
제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했다. 누가 봐도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면 말고.
* * *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걸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맹목적인 열정은 곧.
“말했듯이, 난 배틀로얄,”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4’를 해야 한다고? …나도 그거 해봤는데, 별로 재미없던데?”
“뭐? 너,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 시리즈가 얼마나 역작인데! 비행기가 비행하는 각도와 미사일 발사 거리까지 모두 현실적으로 구현한….”
“아, 그래, 됐고. 너 그 게임만 좋아해?”
“아니, ‘위더 팡팡’이랑 ‘네오 스페이스’랑, ‘월드네이션 제트’랑!”
“리듬 게임은?”
“물론 리듬 게임도 좋아해! 정확한 박자에 맞추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을 넘어서 타이밍을 계산하기 위한 고도의 수학식이 필요,”
그 사람의 가장 취약하고 어리석은 부분.
약점이었다.
“그럼 나랑 같이 리듬 게임 안 할래?”
“저기, 있잖아. 올바른 사회화를 위해서 대화 상대가 말할 때 중간에 끊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게임 이름이 뭔데?”
“드럼 비트 시즌1”
제이와 나의 차이는 이거였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고.
“처음 들어봐. 어디 회사 건데?”
독백과 더불어 캐시와 제이의 대화가 절묘하게 진행되었다. 거의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진행에 지윤정은 제이처럼 넋을 놓은 채로 캐시의 말을 들었다.
“새로 나온 거야. 신생 회사고. 나한테 있는데, 어때?”
말을 꺼낸 순간부터 솔깃한 기색을 풍기던 제이가 결국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조, 좋아.”
그는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후.
희희낙락하게 캐시를 따라간 제이가 잡동사니가 즐비한 교실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게임기는 어디 있어?”
“저기 있잖아.”
“어디?”
“저어-기.”
제이의 고개가 한쪽을 향했다.
“저기엔 드럼밖에 안 보….”
멈칫.
무언가 말하던 제이가 그대로 굳었다. 제이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드럼?”
설마.
설마, 설마!
“드럼 비트… 시즌, 1?”
그러니 애초에 제이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환영해. 밴드부원이 된 걸!”
스코어 1대1.
무승부였지만, 세상에는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가 있는 법이었다.
내 승리였다.
* * *
북적북적한 복도.
캐시가 포스터를 들고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엘비를 통해 동아리에 들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복도에 서서 아무나 붙잡고 권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다 퍼드득 놀라거나, 뻣뻣하게 굳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왜 저러지?
캐시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눈빛을 했고, 엘비가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아무런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동아리실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자, 한쪽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게임을 하던 제이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돌아다니다간 끝이 없겠어.”
캐시의 말에 제이가 눈치를 보며 가까이 와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캐시가 자세를 잡고 앉았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영입 리스트’에 적힌 이들을 스토킹, 아니 설득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였다.
“꼭 동아리에 안 든 애여야 해?”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아니, 나처럼 동아리 그만두고 나올 수도 있으니까….”
캐시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 하이에나!”
일순 번뜩이는 푸른 눈에 트라우마가 돋은 제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사사삭 물러났다. 그러든 말든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은 캐시가 힘차게 외쳤다.
“다른 동아리에서 빼 오면 되는걸!”
신나게 외친 캐시가 곧장 동아리실을 박차고 나갔다.
둘만 남은 동아리실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제이가 손에 들린 게임기를 한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게임 같이 할래?”
“그, 그래!”
이내 뿅뿅거리는 게임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한편.
캐시는 학교 안을 활보하며 적당한 동아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찾았다!”
‘성가대 클럽’이라고 쓰인 문 앞에서 캐시가 눈을 빛냈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에게 일어날 처참한 일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선.
벌컥!
캐시가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잠시 후.
끼익….
문이 힘없이 열렸다. 거기서 젖은 빨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캐시였다.
“또 놀러 와!”
“과자 많이 준비해둘게!”
“다음번에는 성경 422p를 같이 읽어보자! 기대하고 있을게!”
캐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절대 안 가!
성가대는 정말 강했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캐시가 동아리실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친해진 제이와 엘비가 미친 듯이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엉덩이라도 걷어찼을 캐시는 바짝 굳은 그들을 무시한 채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나왔다.
지윤정이 입술을 꾹 누르며 웃음소리를 죽였다. 지금껏 내내 강한 모습만 봐서 그런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린 캐시의 모습이 재밌었다. 옆에서 오혜은도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키티, 이거 뭐니?”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
캐시의 엄마, 멜라니가 공책 사이에 숨겨두었던 붉은색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언뜻, ‘Rock’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캐시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푸른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