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Xmas Movie (12)
세상에, 저, 저! 오혜은이 옆에서 분통을 감추지 못했다. 화면 속에서 마테오가 처음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던 멀끔하고 도련님 같은 낯으로 교감을 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교감은 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 클럽은 학교 측에서 인정해줄 수 없어요. 이만, 해산하도록 하세요.”
밴드부는 난데없는 해체 권고를 받았다. 교감이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보고 있던 캐시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스러운 사람이 떠올랐다.
사실상 의심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캐시한테 이 정도로 엿을 먹이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사람은, 산타 모니카 학교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
캐시는 침묵하고, 페니 선생님조차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리고 있을 때, 의외의 인물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니사였다.
아니사는 교감 선생님의 눈초리에 기죽지도 않고,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지도 않은, 평온한 상태로 말했다.
“저희가 학교 축제에서 일등을 하면요?”
캐시와 대화한 날 이후.
아니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끝내 인정했다. 캐시도 자신과 같은 동급생일 뿐이며, 결국 밴드부에 들기로 한 건 오롯이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내가 달라져야 해.’
캐시의 뒤에서 숨어만 있는다면, 오케스트라부나 밴드부나 다를 게 없었다.
아니사는 버릇처럼 손을 들어 땋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려다가, 땋지 않았음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대신, 아니사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아니사를 쳐다봤다. 캐시가 주도한 것도 아니고, 아니사가 먼저 나서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교감 선생님의 말씀은, 록 밴드부가 학교의 격을 낮출까 봐 걱정이라는 소리시잖아요. 그러니까 저희가 동아리의 격을 증명해 볼게요.”
그 미소는 어딘가 사고 치기 전 캐시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도발은 성공했고, 밴드부는 새로운 분기점에 들어섰다.
아니사가 휙, 아이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캐시를 따라 해봤는데, 어땠어?”
“넌 정말, 최고야.”
캐시가 아니사를 따라 웃었다.
캐시의 시선이 밴드부원을 쭉 훑었다. 뿌듯한 얼굴의 아니사를 지나, 시선이 닿자 움츠러드는 엘비, 어느새 게임기를 뿅뿅거리고 있는 제이, 발로 공을 튀기며 놀고 있는 조지, 어색하게 웃는 페니까지.
화면이 캐시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겠다.
이때 난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생각도 없었다.
축제 날까지 유예 기간이 생겼으니, 그 전에 마녀의 약점을 잡아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거든.
그럴 생각이었는데….
화면이 전환되었다.
사각사각.
창문으로 밤하늘이 펼쳐진 시각.
고요한 가운데 종이와 펜이 맞닿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책상 앞에 앉은 캐시는 악보에 무언가를 그려 넣고 있었다. 음표 몇 개를 그린 캐시가 기타를 들고 멜로디를 연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금 그린 음표에 직직, 줄을 긋고,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이내 펜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열심히 하게 됐지?
푸른 눈동자가 과거를 회상하듯이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책상 앞 벽에 붙여놓은 붉은색 포스터에 닿았다.
그리고.
휘리리릭!
화면이 과거의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붉은색이 화면에 가득 찼을 때.
되감기가 멈췄다.
* * *
조금 전.
캐시가 보던 포스터와 똑같은 포스터가 화면 가득 들어왔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키티, 이거 뭐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때는, 그래.
“왜?”
동요하던 눈동자를 감춘 캐시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으로 멜라니를 노려봤다.
“뭐 문제 있어?”
“너는…, 네가 어떻게….”
상처받은 얼굴이 기꺼웠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나쁜 사이 유지하기’, ‘선생님께 대들기’, ‘퇴학당하기’와 같은 것들로도 성공하지 못했던 흠집을 내고야 만 것이다.
타악!
캐시가 멜라니의 손에 들린 포스터를 빼앗았다.
“난 이거 그만둘 생각 없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캐시 와일드!”
그 부름에 캐시는 흠칫했다. 멜라니가 캐시를 ‘키티’가 아닌 풀 네임으로 부르는 건 극도로 화가 났을 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너까지 엄마를 속상하게 할 거니? 그런 건 그만둬. 좋은 학교에 보내줬잖아. 키티, 엄마를 봐. 다른 아이들처럼 얌전히 학교에 다니면 안 되겠니?”
“싫어. 이건 내 자유야.”
“오, 캐시! 제발 네 아빠처럼 굴지 마! 나는 네가 그 사람처럼 살길 바라지 않아!”
“싫어! 나한테 간섭하지 마!”
캐시가 멜라니에게 맞서 소리 질렀다. 카메라가 독기 어린 캐시의 얼굴을 가까이 확대했다.
이때는 밴드부를 꼭 만들겠다고 다짐하긴 했지만… 그냥 반항하고 싶었던 거뿐이었다.
성격 나쁘다고?
알아.
하지만 엄마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넘어가겠다.
언성을 높이는 두 모녀의 모습이 점차 어두워졌다.
아무튼, 이때는 원인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 * *
그다음 날.
나는 새로운 밴드부원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방금 찼어.”
음… 이때도 아니었다.
뭐, 아니사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 * *
“…어서 사인해!”
“저, 정말 이래야 해?”
“여기서 살아 나가길 바란다면.”
냉혹한 대답에 조지가 눈물을 머금고 이름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도 아니야.
참고로 조지는 멍청하다.
* * *
아니고, 패스, 패스, 패스.
* * *
스탑.
“당장 그 끔찍한 보라색을 까맣게 물들이지 않으면 저기 있는 잡초처럼 몽땅 뽑아 버리겠다!”
아, 실수. 조금 더 전으로.
빠르게 지나가던 장면이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가, 아주 조금 되감아졌다.
하교 시간인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건물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가방을 달랑거리며 나오던 캐시는 무언갈 발견하고 멈춰 섰다.
“…키티, 안녕.”
“…아빠.”
캐시의 아빠, 벤튼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차에 타 있었다.
“어떻게 지냈니?”
“…….”
“아빠는 잘 지냈어. 일자리도 새로 얻었고…. 오늘은 휴가를 내서 나온 거야.”
묵묵부답인 캐시에 벤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키티. 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말렴.”
캐시가 눈을 조금 크게 뜬 채로 벤튼을 보았다. 벤튼은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떴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나는 네가 엄마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가족이잖아.”
“아빠는?”
“물론 아빠도 키티 가족이지.”
벤튼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풀린 분위기에, 벤튼이 다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마음에 안 드는 애 얼굴에 주먹을 날렸어.”
“…오.”
“교감 선생님 등에 포스트잇을 붙였다가 혼났어.”
“…뭐라고 썼니?”
“정말 알고 싶어?”
“몰라도 될 것 같구나. 그리고?”
“그리고….”
캐시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밴드부를 만들었어.”
“오….”
아까와 같지만 다른 감탄사였다.
잠깐 말을 잃고 눈만 깜빡이던 벤튼이, 이내 씩 웃었다.
“그건 정말 멋진데.”
“엄마는 당장 그만두라던데.”
“…….”
벤튼이 시선을 피했다.
캐시의 집요한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캐시를 마주 봤다.
“멜라니는 나 때문에 그래.”
“나도 알아.”
“…그래, 그렇구나.”
머쓱한 듯 민망한 듯 목덜미를 쓸던 벤튼이 손을 뻗어 캐시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래도 키티, 내 보물. 그건 나와 멜라니 사이의 문제야. 네가 나와 멜라니를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란단다. 네가 즐거운 일 말이야. 언제나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아빠는 한결같다.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이라니.
바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캐시를 보며 미소 짓던 벤튼의 얼굴이 아니사로 바뀌었다.
“그럼 너는 아빠의 말 때문에 밴드부를 하는 거야?”
“아니, 내가 좋아해서 하는 거야. 어차피 아무것도 모를 거라면,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나을 거 같았거든.”
말을 한 캐시의 얼굴이 굳었다.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푸른 눈이 요동치며 이글거렸다. 눈썹까지 오므리는 게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덧붙이자면, 화난 게 아니고 ‘왜 이렇게 대답했지?’란 표정이다.
타이밍 좋게 나온 독백에 지윤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사의 눈에는 한없이 평온해 보였던 캐시의 속내나 진실은 꽤 의외였다.
다시 화면이 교감이 밴드부에 멋대로 들어와 일방적인 선전 포고를 했던 때로 돌아갔다. 아까는 아니사 시점이었던 게, 이번에는 캐시를 중점으로 비추고 있었다.
“록 밴드라니… 전 그렇게 품위 없고 저급한 클럽을 선생님이 승인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군요.”
나는 교무실에 몰래 잠입해 약점을 잡을 계획을 짜고 있었다.
추가로, 저 흰머리를 꼭 은보라색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저희가 학교 축제에서 일등을 하면요?”
아니사의 참전은 솔직히 의외였다.
아니사와 교감 선생님의 대화가 배경 음악처럼 깔리고, 캐시의 독백이 이어졌다.
결국, 교감 선생님이 콧김을 내뿜으며 부실을 나갔다.
의외긴 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아니, 잘된 일이지. 시간을 벌었으니까.
분명 그런 생각이나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피융! 뿅뿅!
발랄한 게임기 소리에 캐시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 시작은 제이 로빈이었다.
“……! 뭐야! 내 게임기 돌려줘!”
내가 심각하게 궁리 중인데 게임이나 하다니.
“난 물질이 열역학적 변화를 일으킬 때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유용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엔트로피 같은 포지션이잖아?”
“엔트로피는 관심 없고, 아직도 모르겠어?”
가만둘 수야 없지 않은가?
“넌 이미 한배를 탔어.”
제이가 입을 뻐끔거렸다.
캐시가 짓궂은 얼굴로 말을 술술 이어갔다. 제이는 여전히 덜 데었는지, 밴드부도 그렇게 속아 가입했으면서 또 홀랑 낚였다.
반쯤은 장난이었다.
제이 로빈이 연주하는 걸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화면이 바뀌었다.
“리듬 게임이라고 생각해.”
캐시가 제이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제이가 입을 삐쭉대면서 설명을 들었다.
캐시가 시범을 보였다. 간단한 연주였지만 스틱을 내리치는 폼이나 경쾌한 리듬이 예사롭지 않았다. 드럼 의자에서 일어난 캐시가 제이의 손에 스틱을 넘겨주었다.
지윤정은 왜인지 두근거리는 심정이 되었다. 캐시의 독백도 그렇고,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딴 따다 따!
“다, 다시 해봐.”
딴 따다 따!
캐시의 푸른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거는? 이것도 할 수 있어?”
캐시가 들이민 동영상을 본 제이가 스틱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베이스 드럼을 내리쳤다.
점점 난도가 올라갔다.
한 번, 박자에서 어긋나서 캐시가 지적하려던 순간 제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지나간 구간을 다시 한번, 이번에는 오차 없이 정확히 연주했다. 캐시는 완전히 입을 떡 벌리고 제이를 보았다.
캐시는 오기가 생긴 듯 온갖 연주를 보여줬지만, 제이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손쉽게 해내었다. 지윤정은 목 뒤부터 등허리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미친….”
캐시가 중얼거렸다.
드럼을 잘 모르는 관객들도, 제이의 연주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캐시와 비슷한 심정이 되었다.
제이 로빈은 천재였다.
* * *
“…그거 언제까지 해?”
처음에는 놀라워하며 구경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캐시한테 혹사당한 제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 나 좀 쉬면,”
“아냐, 아직 뭔가 부족하다고!”
캐시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말을 꺼내려다 본전도 못 찾은 제이가 얌전히 스틱을 들었다.
그러길 한참.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캐시가 중얼거렸다.
“좋아. 다 좋은데….”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라는 표정으로 경계심을 가득 담아 쳐다보는데, 아, 하는 깨달음의 감탄사와 함께 캐시가 손뼉을 쳤다.
“알겠다! 다 좋은데, 너무 딱딱하잖아. 네 연주에는 록 스피릿이 부족해.”
“…….”
“좀 더 반항적으로. 이 세상이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는 듯이, 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다 찢고 태우고 부수고 싶다는 것처럼, 알겠어?”
“그건 범죄 아니야?”
조지의 말을 무시한 캐시가 제이의 이곳저곳을 손보기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나름 단정했던 행색이 점점 불량해졌다.
“머리도 좀 풀어 헤치고, 넥타이도 좀 풀고. 음, 좋았어.”
제이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다시 연주해 보라는 말에 제이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캐시를 보았다. 그러나 캐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제 자유로운 기분 그대로 연주해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머뭇거리던 제이가 스틱으로 베이스 드럼을 툭, 쳤다. 소심하게 몇 번 툭, 툭 치던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정한 리듬을 가지기 시작했다.
힘을 뺐던 팔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드럼 소리가 점점 강하고 선명해졌다. 고개를 까딱이며 보던 캐시가 즐거운 얼굴을 했다.
“좋아, 계속 그대로.”
그리고.
치잉!
자신의 일렉 기타를 가져온 캐시가 그대로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길게 피크를 내질렀다.
놀란 듯, 잠깐 멈칫했던 제이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새로운 소리가 그 위에 얹어졌다.
엘비였다.
엘비가 상기된 얼굴로 연주하는 걸 보던 조지도 기타를 들었다. 조지의 엉성하고 엉망인 소리가 추가되었다.
‘네 차례야’라는 듯이 캐시가 푸른 눈으로 아니사를 응시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엉망진창인 멜로디를 듣던 아니사가 기꺼이 그 연주에 합류했다.
하나씩 악기가 추가될수록 풍부해지는 멜로디가 쿵, 쿵 관객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어느새 관객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제이가 스틱을 내리칠 때마다 까만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캐시가 헝클어트린 탓에 지저분했지만, 얼굴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져갔다.
그리고 이내.
휘익-!
스틱이 공중을 날았다.
카메라가 아이들의 시선처럼, 아래에서 스틱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돈 스틱이 아래로 떨어질 때는 그 반대로, 위쪽에서 천장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마치 포스터에 나온 구도 같았다.
타악.
따다 딴!
추락하던 스틱을 낚아챈 손이, 강하게 드럼을 내리쳤다. 캐시가 조금 얼빠진 얼굴로 제이를 보고 있었다.
내가 제이가 천재라고 했던가?
취소한다.
그는 최고였다!
웃음을 터트린 캐시가 팔을 휙, 강하게 내리그었다. 그러자 다른 악기들이 따라붙었다
아니, 그냥 다 미쳤어!
그냥 다 미쳤어!
초반의 시니컬하던 아이라곤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환히 웃은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마녀의 약점, 엄마를 향한 반항, 아빠의 조언, 블라블라블라…
난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교실.
아이들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엉망진창으로 어긋나고 삐끗대는 악기 소리가 모여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연주가 이어지며 아이들의 옷이 하복에서 동복으로 바뀌었다. 창밖도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엉망진창이고 삑사리 났던 연주들이 점점 정상 궤도를 찾기 시작했다.
창밖이 어두워지자 장면이 바뀌며 책상 앞에서 고민하는 캐시가 나왔다. 기타 줄을 몇 번 튕기던 캐시가 악보 위에 음표를 그려 넣었다.
화면이 바뀌며 아니사의 방이 나왔다. 널찍한 공간을 차지한 그랜드 피아노에 앉은 아니사는 웃는 얼굴로 건반을 눌렀다.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엘비였다. 엘비는 방구석에 몸을 쪼그리고 기타를 치고 있었다. 벌컥, 방문이 열리고 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엘비를 방해하며 기타를 탐내기 시작했다. 엘비가 필사적으로 기타를 사수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실수로 방 한구석에 있는 공을 걷어찼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을 누군가가 들어 올렸다. 카메라가 뒤로 멀어지며, 침대에 누워서 양손으로 공을 들고 있는 조지가 나타났다. 공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품에 안은 조지가, 마치 기타 코드를 짚는 것처럼 공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타다닥, 키보드를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게임 클리어!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우스 화살표가 움직이고, ‘Next level Start!’라고 쓰인 버튼 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화살표는 그 버튼을 누르지 않고 빨간 ‘X’로 향했다.
게임 창을 끈 손이 키보드 옆에 놓인 막대기를 잡아챘다. 익숙하게 옆에 놓인 휴지 박스를 책상 위에 두고선,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며 제이의 하관이 화면에 나왔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다시 화면이 손을 클로즈업하고, 막대기를 크게 내리치는 순간, 투박한 나무 막대가 잘 다듬어진 스틱으로 변했다.
그리고.
치잉!
드럼의 심벌이 경쾌하게 울렸다.
관객들은 물 흐르듯 휙휙 진행되는 장면을 넋을 놓고 보다가, 시원하게 심벌을 내리친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시, 밴드부실이었다.
그때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졌던 연주 소리가 이내 천천히 잦아들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교복만 입고 다니던 계절을 지나, 겉옷을 걸친 상태였다.
“좋았어!”
캐시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냥 즐거워졌다.
* * *
그 후로 일사천리였다.
밴드부는 축제 날 공연 장소도 지정받았고, 제이의 희생을 통해 홍보 문제도 처리했다.
“공연할 장소도 구했고, 홍보 계획도 세웠어.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둥글게 모여 앉은 아이들의 한가운데 선 캐시가 물었다. 아이들이 제각각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때.
조지가 깨달은 얼굴로 외쳤다.
“밴드 이름!”
“맞아!”
아이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이름이라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흥분해서 이것저것 의견을 쏟아내었다.
“이건 어때? 배틀로얄스타!”
“게임 이름 줄이면 될 줄 아냐?”
“칫.”
“그럼 이건? 멋진 너드들!”
캐시가 먹고 바닥에 던져놓았던 바나나 껍질을 조지에게 던졌다.
“난 아니거든?”
온갖 헛소리들이 총출동했다.
“저, 저기….”
“내가 말한 게 더 낫거든?”
“뭔 헛소리야! 개가 지어도 너보단 낫겠다.”
“저기…!”
“왜!”
으르렁거리던 캐시와 조지가 동시에 엘비를 쳐다보았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엘비를 향했다. 주목의 대상이 된 엘비가 뺨을 붉혔다.
“요, 요즘 다른 애들이 우리 부를 부르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질끈 눈을 감고 외친 엘비에 아니사가 태연스레 물었다.
“뭔데? 문제아? 전학생과 졸개들? 아니면….”
조지도 무언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니사와 조지의 목소리가 겹쳤다.
“괴짜들?”
엘비가 정답이라는 듯,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난… 괴짜라고 불리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어. 소, 소심하거나 뚱뚱한 게 아니라 좀 별난 거잖아. 뚜, 뚱뚱보나 울보 엘비보다는 괴짜 엘비가 훨씬 멋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이들은 모두 엘비의 말에 집중했다. 엘비는 이번만큼은 말을 더듬지도, 소심하게 웅얼거리지도 않고 물었다.
“Freak 어때?”
캐시가 씨익 웃었다.
“Cool.”
산타 모니카 초등학교 밴드부.
Freak의 결성이었다.
* * *
탁.
초조한 얼굴로 주방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캐시를 보다 못한 멜라니가 찻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캐시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할 말 있니?”
“…응.”
쭈뼛쭈뼛.
캐시가 어색하게 멜라니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은 멜라니가 캐시의 포스터를 본 후부터 쭉 냉전 상태여서, 제대로 된 대화는 오랜만이었다.
“학교에서… 축제가 있어.”
“등 뒤에 그거 줘봐.”
숨기고 있었는데!
그런 표정이 드러난 캐시가 멜라니를 보며 갈등하는 눈빛을 했다. 멜라니가 ‘얼른’이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종이를 내밀었다.
“…내 밴드부 공연이야.”
멜라니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멜라니의 안색을 확인하던 캐시가 불안함을 감추려 괜히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냥 그렇다고. 난 방에 올라간다!”
쿵, 쿵!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컸다.
홀로 남은 멜라니가 포스터에 적힌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멜라니는 며칠 전, 음성 기록을 떠올렸다. 멜라니가 수신을 거부하자 기어코 음성 메시지를 남긴 벤튼이었다. 보고도 무시했던 멜라니는 충동적으로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
- 멜라니. 잘 지내고 있어? 내가 정말 미안해. 당신에겐 항상 고마워. 나는 요즘 새 일자리를 구했어. 성실하게 근무하는 중이야. 가구점인데, 나름 적성에 맞는 거 같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심심하지 않거든. 아, 얼마 전에는 캐시를 봤어. 혹시 캐시에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캐시는 학교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아. 아, 캐시가 나를 많이 닮았더라. 당신에겐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 아이는 나와 당신이 아니니까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미안해, 멜라니. 그리고….
“지 아빨 똑 닮았어, 정말….”
작게 중얼거린 멜라니가 포스터를 곱게 접어,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닫힌 책 위로 삐쭉, 튀어나온 포스터의 모서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어두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