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Xmas Movie (16)
막 아침 식사를 끝낸 도현이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통유리를 통해 낮의 활기참이 전해졌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집에서는 이 층 방에서 내려다봐도 잘 조성된 정원이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거리가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 지금은 번잡한 도로와 그 너머의 푸른 강,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까지 한눈에 보였다.
한국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도현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었다. 푸릇푸릇한 생명이 활짝 피어나던 시기.
그때 찬란하게 빛났던 초록은 자취를 감추고, 바짝 마른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보였다. 그렇게 많은 게 변했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나 차로 가득 찬 도로는 여전했다.
그 덕에 계절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그 여름날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아.’
스스로의 변화였다. 정확히는 ‘아직까진’ 아무렇지 않은 거겠지만, 일단 지금 상태로 봐선 꽤 괜찮았다. 이 주 정도는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정도일까. 왜 덩어리 님이 한국에 가도 될 것 같다며 고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만, 불쑥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 그의 영혼을 붙들고 흔들지는 못해도 일반적인 슬픔과 그리움, 온갖 버겁고 안타까운 감정을 불러왔다. 도현은 감상에 젖지 않기 위해 떠오르는 것들을 한쪽으로 치워냈다.
고작 이 주였다. 도현과 서혜나가 왔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릴 기세로 기뻐하던 이장혁을 생각하면, 그 시간 동안 멍하니 기억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겨울이네.”
“겨울이야.”
도현과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던 두 사람이 말했다. 그들의 말처럼 창밖에는 흰 눈이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샌디에이고에는 눈이 안 와서 말이지…. 사실 한국 오자마자 너무 추워서 놀랐어. 미국에 얼마나 있었다고, 그새 따뜻한 날씨가 익숙해졌나 봐.”
서혜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듣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기에 혼잣말은 아니었다.
도현은 속으로 공감했다. 샌디에이고는 계절이 아예 나뉘지 않는 건 아니어도 사실상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온도 변화가 극히 미미했다. 겨울이라고 해도 그리 춥지 않았다.
“따뜻하게 코코아나 한잔 타 먹고 산책하러 갈까?”
서혜나의 제안에 이장혁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이대로 집 안에 콕 박혀 있고 싶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고 오랜만에 온 한국이니 뭔가 움직여야 할 거 같았다.
어차피 이번 겨울은 저번 여름처럼 이곳저곳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집에서 쉬기로 했으니… 지금 잠깐 산책하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도현은 주방에서 나기 시작하는 달달한 초콜릿 냄새를 맡으며 소파에 폭 몸을 파묻었다.
“푸… 흐윽.”
도현은 그렇게 흐느낄 바에야 그냥 웃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도현은 중무장한 상태였다.
눈이 얇게 쌓여 하얀 거리 위에 서 있는 도현은 사람이 아니라 둥근 무언가로 보였다. 저들의 작품에 서혜나와 이장혁이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찰칵! 찰칵!
빠질 수 없는 카메라 소리가 울려도 도현은 담담했다. 다만 옷이 너무 두꺼워 팔의 움직임이 불편해서,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길 반복했다.
“아, 진짜.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엽지?”
애정이 넘쳐나는 목소리였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말투와 눈빛에, 도현은 자신의 부모님이 이렇게 툭 치면 굴러갈 것 같은 곡선에서 매력을 느끼는 건지 잠깐 고민했다.
자박자박.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때마다 덜 녹은 눈이 밟히며 특유의 소리를 내었다. 머리 위로 내리는 눈이 신기해서 모자를 뒤로 내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도현의 양쪽 옆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다시 씌울 게 분명했기 때문에 바람은 바람으로 남겨두었다.
“공원 오랜만이지?”
“그러게요.”
서혜나가 묻는 말에 도현이 수긍했다. 그 여름에 자주 왔던 공원이었다. 그때는 사람이 많았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다지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사람이 거의 안 보였다.
도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이장혁이 말했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요즘 공원이 한산하더라.”
다들 집에서 이불을 꽁꽁 싸매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거 같았다. 퍽 끌리는 선택지라 도현도 집에 돌아가면 이불 속에 파묻혀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세 사람은 가볍게 공원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도현의 눈에 하얀 눈덩이… 아니, 하얀 눈덩이처럼 보이는 작은 아이가 들어왔다. 도현은 어쩐지 동병상련의 심정이 되어 지긋한 눈으로 그 조그만 눈덩, 아니, 아이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쩐지 눈덩이가 점점 커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커지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저러다 넘어질 거 같은데….
“얘! 은혜야! 뛰면 안 돼! 그러다 넘어져!”
다행히 보호자가 있는 거 같았다. 헐레벌떡 뛰어온 여성이 바둥거리는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쑥 들어 올렸다. 모자에 달린 긴 토끼 귀 탓인가, 진짜 커다란 토끼가 포획된 느낌이어서 도현이 입을 가렸다.
잠깐, 그런데 토끼?
익숙한 느낌에 도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토끼, 그리고….
“은혜?”
“도현이?”
도현과 윤경희가 서로를 보며 동시에 말했다. 윤경희의 눈도 커진 채였다.
“세상에!”
그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혜나도 금방 그녀를 알아봤는지, 놀람과 반가움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경희 씨!”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세상에, 난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잖아요.”
두 사람은 해후를 나눴다. 이장혁은 공원에서 몇 번 마주쳤던 일이 있었는지, 꽤 친근하게 안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어떠한 커넥트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도현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자를 잡아당겨 코 아래까지 전부 가리고 똘망한 눈만 드러낸 은혜를 살펴보았다.
바로 못 알아봤던 게 이해될 정도로 은혜는 짧은 사이에 많이 자라 있었다. 물론 그것도 도토리가 밤톨이 된 수준의 변화였지만, 아무튼 자랐다는 게 중요했다.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라서, 은혜는 상당히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토끼 왕자님이 맞는 거 같은데, 다른 것도 같았다. 근데 맞는 거 같은데… 아닌가? 은혜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이었다.
“토끼 모자 잘 어울린다, 은혜야.”
토끼 왕자님이 맞았다!
화악-
은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주 어린 아이가 자신을 보고 행복해하며 반겨주는 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라, 도현은 잠시 뻣뻣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바둥바둥!
“어머, 얘가 왜 이래.”
“내리고 싶은가 본데요? 도현이랑 대화하고 싶나 봐요.”
“혹시나 했는데… 은혜야, 너 토끼 왕자님 기억하는 거야?”
토끼 왕자님… 도현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도현의 부끄러움과는 별개로, 은혜는 바둥거리는 것을 멈추더니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서혜나가 탄성을 뱉었다.
“본 지 꽤 오래됐는데 아직도 기억하네요. 은혜는 똑똑하기도 하지!”
과장된 칭찬이 아니었다. 이맘때쯤 아이들은 궁금한 것도 많고 신기한 것도 많아서, 금방 잊어버리는 것도 많았다.
윤경희가 은혜를 내려주니 은혜가 도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현은 내심 다리에 힘을 주며 다가올 충격을 기다렸으나, 몸통 박치기를 할 기세였던 은혜는 의외로 쭈뼛대더니 다시 몸을 물려 엄마의 다리를 붙잡았다.
“은혜가 부끄러운가 보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윤경희의 말에 잠시 당황하고 있던 도현이 엷게 웃었다. 도현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은혜야.”
오래전, 공원에서 봤던 익숙한 미소에 은혜의 댕그란 눈이 커지다가 이내 크게 대답했다.
“…웅!”
도도도 달려온 은혜가 도현의 손을 콱 붙잡았다. 역시, 토끼 왕자님이 맞았다. 은혜가 꺄르르, 밝게 웃었다.
산책로를 걷는 인원은 어느새 세 명에서 다섯 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 어른이 대화를 나누는 걸 한 귀로 흘려들으며, 도현은 은혜가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은혜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은혜는 자꾸만 손을 잡은 팔을 당겨댔다. 딱히 어딜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어리광을 부리는 거 같았다. 은혜의 엄마라면 꽉 잡고 장난스럽게 얼렀겠지만… 슬프게도 도현은 그럴 힘이 되지 않았다. 도현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흔들렸다.
“도현이가 나온 시트콤이랑 영화 다 챙겨봤어요. 토크쇼까지 다 찾아봤다니까요.”
제 이름이 들리자 도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윤경희와 눈이 마주쳤다.
윤경희가 넉살 좋게 말했다.
“이모가 네 팬이야, 도현아. 네가 나온 영상은 다 찾아봤거든!”
“…감사합니다.”
태연하게 답했지만, 실은 꽤 놀란 상태였다. 도현은 아직까지 자신의 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팬이란 게 대체 뭘까, 생각하면서도 도현은 착실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혜나 씨는 도현이가 한국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지 모르죠?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괴짜들 안 본 사람이 더 드물걸요?”
그 말에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갔음을 알면서도 도현은 괜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내 영화를 봤을까.
“요즘 은혜가 그 영화 보고 나서 노래 부를 거라고 난리도 아니에요, 어휴.”
한숨을 쉬긴 했지만 숨기지 않은 애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은혜도 영화 봤구나.
“영화 어땠어? 내 연기 괜찮았어?”
“……?”
은혜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그러자 위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도현아. 네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우리 은혜가 너를 못 알아보더라.”
“오….”
그 정도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니 기쁘긴 한데, 그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낯의 은혜가 너무 웃겨서 도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원하게 웃는 도현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던 서혜나와 이장혁이 곧 행복함을 담아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혜나 씨,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우리 은혜가 학원 갈 시간이라….”
“학원이요? 무슨 학원?”
“발레 학원 보내고 있거든요. 사실 학원 가는 길이 이쪽이라서요.”
“네? 내가 붙잡아서 늦은 거 아니에요?”
서혜나가 당황해서 묻는 것에 윤경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원래 좀 일찍 나오거든요. 은혜가 얌전히 가지 않고 자꾸 이곳저곳으로 새서… 원래 가기 전에 잠깐 이렇게 공원을 돌아다니다가 가요.”
윤경희의 말에 서혜나는 안심한 기색이었다. 도현은 그들의 대화 중에서 유독 귀에 밟히는 단어를 곱씹었다.
발레.
한창 을 촬영할 때, 도현은 운동을 하나 배우기로 결심했다. 촬영이 끝나고 메리와의 상담이나 엄마와의 대화로 인해 여러 번 정신력이 닳아 한동안 좀 잊고 있었다가 최근에 다시 떠올라 찾아보는 중이었다.
‘마음에 차는 게 없어서 문제지.’
도현은 스스로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장점이라고 할 만한 건 뭐든 ‘열심히’ 한다는 부분이지만, 단점은 ‘뭐든’ 열심히 한다는 거였다.
도현은 자신이 무언갈 시작하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걸 알았다. 그러니 선택은 신중히 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현은 몸을 감싸오는 온기에 정신을 차렸다.
“…저, 은혜야?”
도현이 굉장히 애매한 얼굴로 은혜를 불렀다. 어느새 양팔도 모자라 한 다리까지 들어 도현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낑낑대는 게 가능만 했다면 반대쪽 다리도 감아 나무늘보처럼 달라붙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몇 번 은혜를 떼어내기 위해 시도해보던 도현은 이내 제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찰칵!
“…….”
도현의 차게 식은 시선에 서혜나가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은근슬쩍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지만, 이미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짧게 한숨을 쉰 도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혜를 달랬다.
“은혜야, 발레 학원 가야지.”
왜 더 찰싹 달라붙는 걸까.
도현이 곤란한 눈치로 한숨만 푹푹 쉬자, 어른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하지만 말고 좀 해결을 해줬으면 좋겠다….
“은혜가 도현이를 너무 좋아하네.”
윤경희가 흐뭇함 반, 곤란함 반이 섞인 심정으로 말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지각인데… 근데 저렇게 좋아하니 하루 정도는 빠져야 하나? 그래도 학원에는 제대로 나가야….
그녀가 고민하던 때였다.
“도현아, 너 운동 하나 배우고 싶다고 했지?”
“? 네.”
난데없는 질문에 도현이 일단 긍정했다. 그러자 이장혁이 씩, 웃었다.
“그러면 우리 견학하는 거 어때?”
이장혁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이장혁이 산뜻하게 덧붙였다.
“물론, 학원 측에서 괜찮다고 하면 말이야.”
솔로몬의 등장이었다.
* * *
“자, 집중하고. 이번엔 나비 자세 해볼까요? 좋아요, 그대로 다운-”
서울의 한 발레 학원.
최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발레를 배우게 하는 게 유행이었다. 호황을 맞이한 발레 학원은 활기찬 풍경을 자랑했다.
은은한 클래식 반주, 발레 강사의 친절한 목소리, 짧은 팔다리로 어떻게든 따라 하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이 수업하는 걸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휴식실에서 유리창을 통해 아이들을 구경하는 엄마들…이어야 했는데.
그 엄마들의 시선은 지금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와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부부가 같이 아이를 기다리는 경우도 종종 있고,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아이를 데려다주고 기다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으니까.
남자아이가 있다는 게 좀 특이하긴 했어도 이 학원에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몇몇 소년들이 다니고 있기에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도현인가? 진짜?’
거기서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는 아이가 아무리 봐도 며칠 전에 상영관에서 봤던 얼굴과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