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Xmas Movie (17)
한편.
도현은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게 자신에게로 집중된 시선을 무시한 채, 한창 수업 중인 발레 교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앞으로, 하나, 둘, 셋, 플리에~ 아치 무너지지 말고! 옆으로 가요, 이번엔. 하나, 둘, 셋, 플리에. 허리 펴고, 어깨 말리지 않게~ 좋아요, 그 상태로 다시 뒤, 조금 더 뻗어야지. 그렇지~ 하나….”
발레 수업은 사운드가 빌 때가 없었다. 강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교정했고, 아이들은 그때마다 무너진 자세를 다잡았다.
상당히 섬세했다. 단순히 다리 하나를 드는 동작을 해도, 머리부터 어깨, 허리, 골반, 무릎까지 모두 컨트롤을 해내야 정확하고 아름다운 자세가 나왔다. 별것 없어 보이는 간단한 동작들인데도 그랬다.
‘신체의 모든 부위를 의식하고 마음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도현이 진지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바를 잡은 상태로 계속 고개를 빼꼼거리던 은혜가 시선을 마주치더니 어깨를 들썩거렸다.
도현의 의아한 시선이 향하자 아까까지만 해도 하는 둥 마는 둥 주위만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적극적으로 수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윤경희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문득 한 가지 걱정이 생겨났다.
‘우리 딸, 눈이 너무 높아지면 어떡하지.’
윤경희가 동그랗고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위에서 보니 긴 속눈썹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아니, 무슨 남자애가 속눈썹이 저렇게 길어?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 외에도 하얀 뺨이나 동양인에게서 보기 드문 선명한 얼굴 골격이나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잘 배운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이는 단정함이나….
은혜가 좋아하는 게 이해는 되지만, 이러다가 은혜의 눈이 높아지다 못해 대기권을 뚫어버릴까 걱정이었다.
이내 윤경희가 픽, 웃었다.
겨우 여섯 살배기 애를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오늘따라 파닥파닥 열심히도 하는 딸을 보았다.
귀여웠다.
* * *
짝짝!
“자, 다들 수고했어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게요!”
“엄마아!”
수업 종료를 알리는 강사의 말에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와 떠들거나 보호자에게 달려왔다. 그중 유난히 잽싸게 뛰어가는 아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은혜였다.
도도도, 가볍게 걷는 아이들 사이에서 다다다! 달려간 은혜는 윤경희에게 한번 폭 안기더니 슬쩍 도현의 팔에 매달렸다. 초롱거리는 눈동자에 눈치껏 상황을 파악한 도현이 은혜가 만족할 때까지 온갖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
발레 강사이자 학원의 원장인 김재연은 신기함과 놀라움이 깃든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은혜가 저 애랑 무슨 사이인 거지? 아니, 그보다 학원 수강생이 사실은 할리우드 배우랑 친한 사이였다니…. 아, 이게 아니라 할리우드 배우가 내 학원에 견학 온 거에 놀라야 하나? 그녀는 대체 어느 부분부터 짚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수업 시작 십여 분 전.
원장실에 있는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김재연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새로 등록하려는 사람이나, 아이들을 보내고 있는 학부모들의 문의 전화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은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온 전화는 등록 문의가 아니라 재원 중인 학생의 학부모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더니 은혜랑 친한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견학을 해도 되겠냐는 말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예비 학생을 데려와 준 것에 고마워하면 모를까.
어쨌든 인원을 물은 그녀는 가볍게 승낙했다.
새로운 아이가 올 수도 있으니 오늘 수업은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문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내더니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은혜와 은혜의 보호자였다.
그리고 그 뒤로 남녀 한 쌍이 들어왔다. 어린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 특성상, 젊은 부모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어려 보이는 외양에 놀라진 않았다. 다만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외모가 너무 독보적이라는 거였다.
발레를 전공으로 한 김재연은 예체능계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발레를 전공하는 이들 중에서도 고운 생김새는 많았다.
그런 김재연의 눈에도 젊은 부부는 예쁘고 잘생겨 보였다. 외모도 그런데 옷 태나 분위기에서 나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다.
“도현아, 여기 슬리퍼.”
“네, 잠시만요.”
저 부부 사이에서 난 자식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호기심에 고개를 돌린 김재연은 발레 학원 강사 6년, 원장 5년 만에 처음으로 얼이 나갔다.
‘사람 맞나?’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김재연은 살면서 그렇게 생긴 아이는 처음 봤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숨을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려 보였는데 이목구비는 이미 뚜렷한 주장을 하고 있어서 나이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키만 보면 초등학교 5, 6학년쯤 될 거 같은데….
잠깐.
“도현…?”
김재연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부부와 소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김재연은 몇 번 더 중얼거리다가, 이내 한 글자를 더 추가했다.
“이도현…?”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홀로 새하얗게 빛나던 소년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절 아시나 보네요. 오늘 견학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도현이에요.”
“헉…!”
그녀는 몇 년간 서울의 부유한 학부모들을 상대하며 몸에 익힌 처세술 덕에 간신히 비속어를 포함한 격한 감탄사를 뱉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며칠 전 뉴스에 나온 소식을 보며 ‘세상에 저런 애도 다 있네- 신기해라. 저렇게 살면 무슨 기분일까?’라며 귤을 까먹었는데,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고 해보아라.
김재연은 간신히 미소를 장착하고선 그들을 반겨줄 수 있었다. 자신처럼 이도현을 발견한 몇몇 학부모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김재연도 마음 같아서는 거기 껴서 ‘그 이도현이 맞는가’, ‘그러면 그 이도현이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학원의 원장이었다. 그 위치는 그녀가 품위를 유지하도록 요구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라서.
“한국에는 어떻게 온 거니?”
“아, 학교가 방학을 맞아서요. 잠깐 놀러 왔어요.”
슬쩍 물어보자 쉽게 대답이 돌아왔다.
학교가 방학했구나.
굉장히 비범한 행보를 보이는 비현실적인 소년이었는데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방학에는 놀러 다닌다니 괜히 신기했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이도현이 견학을 한다니까 어린아이일 뿐인데도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왠지 아이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아서 김재연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지금.
김재연은 은혜와 대화를 나누는 도현을 보다가 표정을 관리하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저… 도현아?”
“아, 원장 선생님.”
도현이 은혜를 상대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형광등을 달았나.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인 김재연이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학부모 상담용 미소를 장착했다.
“오늘 견학은 어땠어?”
“유익했어요.”
어린 나이부터 유명해진 아이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단어 선택부터가 남달랐다.
김재연은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상담실로 들어갈까? 도현이 어머님, 아버님. 괜찮으실까요?”
그녀는 연예인이 아니었고, 이렇게 찌르듯이 강렬한 시선 속에서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낯이 두껍지 않았다.
김재연의 말에 세 사람이 선뜻 동의했다.
* * *
“은혜야, 가만히 있어야지.”
윤경희가 다리 위에 은혜를 올리고선 바둥거리지 못하게 품에 꼭 안았다.
상담실 풍경은 이랬다. 테이블에는 서혜나와 이장혁, 도현이 김재연과 마주 보는 위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윤경희는 은혜를 안은 채로 오른쪽 벽면에 마련된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실 로비에서 기다려도 될 일이었지만… 질문을 쏟아내려고 눈을 번뜩이는 이들을 보니 차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윤경희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원장 선생님이 먼저 상담실에 같이 들어와 있으라고 권유해 주었다.
그래서 현재.
“이렇게 상담해 주셔도 괜찮은 건가요? 다음 수업이….”
“괜찮아요. 다음 수업은 한 시간 뒤에 있어서 상담할 시간은 넉넉하게 있어요.”
서혜나의 우려 섞인 말에 김재연이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갑작스럽게 연락드렸는데, 이렇게 견학도 허락해 주시고 상담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일 아닌데요. 오히려 발레에 관심 가지는 친구들이 많아지면 기쁜 일이죠. 그래, 도현아. 발레를 해본 적 있니? 다른 운동은?”
“둘 다 없어요.”
도현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김재연이 말했다.
“어떻게 발레에 관심이 생긴 거야?”
도현이 대답을 생각하느라 잠시 침묵하자, 김재연이 덧붙였다.
“발레가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예술이긴 하지만, 네 또래 남자아이들은 잘 관심을 보이지 않거든. 발레처럼 신체를 고르고 균형 있게 발달시킬 수 있는 운동도 없는데… 아쉬운 일이지.”
이어진 말에 도현이 눈을 반짝 빛냈다.
“발레는 은혜 덕분에 흥미가 생겼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발레를 본 것도 발레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김재연이 별다른 실망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어린 남자아이가 발레 학원을 방문했을 경우,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정말 발레가 너무 좋아서 시작한 아이, 그리고 흥미 없는데 부모가 끌고 온 아이.
도현은 이미 유명한 배우였다. 그런 아이가 발레가 너무 좋아서 발레리노가 되고자 찾아오진 않았을 테니, 후자의 경우라고 예상했다.
“발레를 직접 해보고 싶은 생각 있니?”
별다른 기대 없이 물은 말이었다.
그러나.
“네, 해보고 싶어요.”
의외로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도현아, 너 발레 학원 다니고 싶어?”
아빠로 추정되는 이가 김재연보다 더욱 놀라서 물었다. 도현이 무덤덤하게까지 느껴지는 태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제가 이야기한 적 있었잖아요. 운동 하나 정도 배워야 할 것 같다고요. 발레가 좋을 거 같아요.”
“어… 도현이가 하고 싶다면야 아빠는 뭐든 좋은데… 그런데 왜 발레인지 말해줄 수 있니?”
김재연도 주의를 집중했다.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도현이 대답했다.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번엔 상상치도 못한 답이었다.
“연기…?”
김재연이 중얼거리자, 도현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검은 눈동자에 소년이 품고 있는 총명함과 빛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까 수업하는 걸 보면서 느꼈어요. 단순히 다리를 들어 올리는 한 동작을 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통제하에 놓이지 않으면 완벽한 동작이 만들어지지 않더라고요. 발레는 아주 섬세한 움직임을 요구하고, 그건 연기할 때 필요한 것이기도 해요.”
술술 나오는 말에 김재연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대 위에서 모든 행동은 목적을 가져야 해요. 걷는 동작에서도 발의 보폭과 팔의 흔들림, 어깨의 위치나 고개의 방향까지. 모두 의도를 담아서 움직여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신체를 통제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손끝, 발끝까지 모두 통제 아래에 두는 발레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도현은 근육 이완 훈련이라든지, 호흡 훈련에도 발레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거기까지 말하면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말을 멈췄다.
원래의 목적대로 체력을 기를 수 있을뿐더러 연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도현은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런데 도현아.”
“네?”
“발레를 배우는 건 엄마도 찬성이지만… 이 주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아.”
도현의 움직임이 일시 정지했다.
귀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발레를 보고 너무 신나서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주요? 왜 그렇게 짧게….”
“미국 초등학교는 겨울 방학이 짧거든요.”
원장 선생님과 엄마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도현은 달아오른 뺨을 애써 식혔다.
김재연이 흘긋, 도현을 쳐다보았다. 유명인이라는 점과 무척 사랑스러운 외양이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고 말은 못 하지만… 그녀는 발레를 사랑해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쳐온 사람이었다.
“그럼 체험해보는 식으로 한국에 있는 동안 배워보겠니? 실제로 해보는 건 눈으로 봤을 때랑은 다를 테니까 말이야.”
발레에 관심을 가진 아이를 위해 이 정도의 편의는 봐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 * *
그 후로는 속전속결이었다.
이 주간, 주 3회.
결제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시간이 남자 김재연은 도현을 이끌고 레슨실로 향했다. 그 뒤로 네 사람이 졸졸 따라붙었다.
“클래스를 정해야 하니까 일단 유연성 테스트부터 할 거야. 괜찮지?”
“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저를 보는 흥미로운 눈빛들을 본 도현이 얌전히 포기했다.
“몸이 놀라면 안 되니까 가볍게 스트레칭부터 해보자. 자, 선생님을 따라 해봐. 팔 길게 뻗고, 그대로 유지.”
“…….”
“반대쪽도. 조금 더 기울여 볼까? 좋아, 거기서 버티기 이십 초.”
…가벼운 스트레칭 아니었나요?
도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숨 들이마시고, 내쉬고’라고 말하는 선생님에 숨만 열심히 쉬었다.
“다리 살짝 굽히고 가슴부터 허벅지에 대볼까? 그렇지! 자 그대로 고개도 숙이고, 다리를 펼 수 있는 데까지 펴보는 거야. 가슴은 허벅지에서 떨어지면 안 돼.”
도현이 점점 하얗게 질리는 반면, 김재연의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남자아이들은 보통 여자아이보다 뻣뻣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도현은 꽤 유연했다.
그리고.
“조금 더 펴보자.”
안 되는 듯하면서도 말하면 더 내려갔다!
이 주… 이 주라고 했지.
이 주 동안 김재연이 무엇을 할 계획인지 상상도 하지 못한 도현은 그저 속으로 안도했다.
‘…병원 시절부터 꾸준히 아침 스트레칭을 해서 다행이다.’
진심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