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40)화 (241/582)

제240화. Xmas Movie (18)

“허억… 여, 여보, 내 심장….”

“나는 이미 멈췄어….”

“…….”

차디찬 시선에 두 사람은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다가, 머쓱하게 일어났다.

서혜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옷은 어때. 불편하진 않고?”

“편해요.”

도현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엄마가 발레복이라고 쇼핑백을 주었을 땐 내심 긴장했는데, 실제로 입어보니 평상복과 그다지 다른 부분이 없었다.

평범한 9부 바지에 탄성이 추가된 정도의 느낌일까.

위에 입은 하얀 긴팔 티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레오타드처럼 몸에 딱 붙지도 않아서 소재만 빼면 평범했다.

양말은 발레용 타이즈 대신에 일반 양말을 신었다. 학원에 가서 갈아 신을 예정이었다.

도현은 점퍼와 패딩을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학원은 그리 멀지 않아서 세 사람은 차를 타는 대신 걸어가기로 했다.

잠깐잠깐 시선이 모였지만, 그들은 확신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래서 도현은 더욱 당당히 걸었다.

학원에 도착하자 원장 선생님이 반겨주었다. 도현을 탈의실로 데려다주며 여기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서, 도현은 간단히 손발을 씻고 양말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발레 슈즈.

천으로 된 검은색 슈즈였는데 신발의 용도를 벗어난 얇은 밑창이 어색했다.

탈의실을 나와 부모님께 향하려던 도현은 여러 사람 사이에 파묻힌 두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스트레칭을 미리 해두어야 좋겠지.

도현은 자연스럽게 발의 방향을 바꿔 레슨실로 향했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레슨실에 도착하자 몇몇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다 낯선 얼굴들이라, 도현은 가벼운 웃음으로 인사를 대체한 후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았다.

매트 한 개를 펴 놓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반사적으로 은혜가 생각난 도현은 입술을 지그시 사리물었다. 아니면 웃을 것 같아서였다.

도현이 발레 학원에 다닌다는 소리에 세상 행복해하며 방방 뛰어다니던 은혜는 다른 수업을 듣게 될 거란 소리에 완전히 삐져버렸다.

‘은혜는 어떻게 달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쭉쭉 펴고 있는데, 위로 그림자가 졌다.

“벌써 스트레칭하고 있었구나.”

흐뭇하게 웃는 김재연이었다.

“그 동작 할 때는 척추를 좀 더 펴야 해. 옳지, 그렇게. 좋아. 그대로 십 초만 유지하고 정리하자. 아홉, 여덞….”

도현이 생각하기에 김재연은 정말 뼛속부터 선생님이었다. 도현은 얼결에 자세를 유지하다가 위로 느껴지는 무게에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오 초만 더. 하나아, 두우울….”

“…….”

“오케이. 매트 정리하고 이쪽으로 오렴. 이제 수업 시작할 거니까.”

“네….”

도현은 하나부터 다섯까지 센다고 해서 오 초가 되는 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매트를 곱게 접어 서랍에 잘 넣어둔 도현이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서 섰다.

첫 발레 수업 시작이었다.

* * *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김재연이 상당히 복잡미묘한 낯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최종적으로 받아낸 클래스는 기초 1반이었다. 유연성이 너무 부족한 아이들은 그 아래에 있는 기본기 반에 들어갔으니, 나름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녀는 내심 도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유연성은 이미 어느 정도 받쳐주는 데다가 그녀도 들어본 영화에 나온 배우였다.

어렸을 때부터 세계에 이름을 날린 천재는 발레를 해도 뭔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를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였다.

실제로 수업 전 워밍업 단계에서는 수월하게 따라 했다. 몸의 근력도 나쁘지 않은지 처음 하는 복근 운동이나 등 운동, 허리 운동도 가볍게 해냈다.

바워크도 초반에는 쉬이 했다.

그런데….

“뒤, 옆, 플렉스, 다운, 업, 그랑플리에, 팔, 팔도 옆으로 가야지.”

동작이 여러 개 추가된 순간, 김재연을 깨달았다.

‘몸치구나!’

기억력은 좋아서 머리는 기억하는 거 같은데 몸이 그걸 따라가지를 못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잘하네.’

김재연이 거울에 비친 도현을 보았다. 길게 뻗은 팔, 부드럽게 굽혔다 펴는 다리, 길게 뻗은 목까지. 여유롭고, 우아했다. 처음 하는 아이의 어색함과 어설픔이 없었다.

이처럼 속도와 동작 가지 수를 줄이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동작을 재현했다.

그녀는 움직이기 전에 머리로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서 그런 거 같다고 생각했다.

“사이드- 손 멀리. 어깨 올라가지 않게.”

김재연이 도현의 뒤에 서서 팔을 잡아주었다.

몸치인 것은 의외이긴 했으나 김재연은 11년 동안 수많은 몸치를 봐왔다. 어차피 발레리노가 될 게 아니라면 그 정도야 문제 될 게 없었다.

게다가 짧은 시간 관찰한 결과 머리로 충분히 생각할 시간만 있으면 동작을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따라 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정확한 동작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익히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타고났어.’

발레는 수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예술이지만, 동시에 그 어떤 예술보다도 타고난 자질이 중요한 분야기도 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발레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예술이었으니.

목이 얼마나 아름답게 뻗었고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날개 뼈에서 등허리로 이어지는 선은 얼마나 유려한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타고난 골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도현은 신체적으로 타고났다.

폴 드 브라(팔의 움직임)에서 안 아방, 알라스콩에서 알롱제로 이어지는 동작(두 손으로 가슴 앞에서 원을 그렸다가 옆으로 뻗고 내리는 동작)을 해도, 무대 위의 아름다운 발레리노처럼 태가 났다.

“그 상태로 다리도 같이.”

허둥지둥.

물론, 몸치긴 하지만….

* * *

“미나야, 우리 떡볶이 먹고 가자!”

“떡볶이 먹고 노래방 고?”

“고! 유미나, 너도 가지?”

시시덕대는 친구들을 보던 미나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못 가.”

“왜?”

“엄마가 동생 데리고 오래.”

“뭐? 또?”

“헐, 윰. 맨날 고생한다.”

친구들이 미나를 달랬다.

미나는 그들의 위로와 도닥거림을 받으며 짜증을 속으로 삭혔다. 그녀도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같이 떡볶이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매번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데리러 가야 하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이럴 때마다 정말 싫어졌다.

“윰윰. 우리가 먹고 와서 후기 알려줄게. 맛있으면 다음에 같이 가자!”

“그래, 그러자.”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친구에 미나는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쓰린 속을 달래며 친구들에게 인사한 후, 미나는 발레 학원으로 향했다.

동생 데리고 집에 가면 먹을 게 있으려나. 가는 길에 나도 떡볶이나 사 갈까. 아, 동생은 매운 거 못 먹지. 씻어서 주면 먹지 않을까.

머릿속에 떡볶이가 가득한 채로 걷다 보니 어느새 발레 학원에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막 수업이 끝났는지, 레슨실에서 나오는 애들이 보였다. 미나가 익숙하게 아이들 사이에서 동생을 찾을 때였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

“힘들긴 했지만 재밌었어요.”

남자애?

동생이 듣는 수업에 남자애도 들어왔나. 발레를 배우는 남자애는 흔치 않아서 미나는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래? 다행이다. 그럼 네가 생각한 것처럼 연기에도 도움이 될 거 같니?”

“네. 몸을 쓰는 법을 익힐 수 있을 거 같아요.”

몇 살이지.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차분해서 그런가, 나이가 좀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연기?

대화 내용에 미나가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레슨실 밖으로 나오는 소년 한 명이 보였다. 그 뒤로 얼핏 동생이 보인 것도 같았지만, 미나는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엄마, 아빠.”

소년이 밝게 웃는 낯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울의 한 발레 학원 안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소년이 발을 뻗을 때마다 뭉쳐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미나는 그제야 사람들이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도현… 실제로 보니 더….”

그리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저 소년의 이름도 알 수 있었다.

이도현. 연기.

미나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벽 쪽으로 숨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 어플을 켰다.

찰칵.

조용한 촬영음이 사람들의 말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미나는 갤러리를 확인했다. 웃고 있는 이도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미나는 빠르게 메시지를 열었다.

* * *

띠링-

“어? 문자 왔다. 잠시만.”

“누구야?”

“…미나인데?”

“미나? 뭐래?”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메시지함에 들어갔다.

그리고.

[얘들아.]

[나 이도현 본 거 같아.]

[(사진)]

“푸읍!”

“아, 미친! 개 더러워!”

먹던 어묵을 뱉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사과하며 음식의 잔해를 치웠다. 진심으로 기겁하며 그녀를 타박하던 친구는, 이내 그녀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자 조용해졌다.

“…실화야?”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놀라운 소식을 혼자만 알 수는 없었다.

[친구가 발레 학원에서 이도현 목격함 (사진 있음)]

한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글이 베스트 게시글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모 발레 학원에서 목격된 이도현… 한국으로 귀환하나]

[미국의 초등학교는 지금 방학 중… 방학을 맞이해 한국에 놀러 온 이도현?]

[배우 이도현의 새로운 취미는 발레?]

[의 제이 로빈, 지금 한국에 있다!]

관련 기사가 속속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한 방송국 라디오 작가에게도 전해졌다.

* * *

NMC 방송국.

‘김윤성의 휴식 시간’ 회의실.

쿠당탕!

“김 작가. 왜 이렇게 급하게 들어….”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네?”

“당장 섭외를… 아니 일단 연락을….”

“잠깐 진정하고… 무슨 일이에요?”

“한국, 한국에 왔대요!”

“네? 누가….”

“이도현이요! 배우 이도현!”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들에 김 작가가 속이 탄다는 듯이 가슴을 내리치고는 말했다.

“방랑자! 괴짜들! 작은 아씨들!”

“배우 이도현이요?!”

그리고 회의실이 뒤집어졌다.

세 명의 작가와 라디오의 진행자이자 주축인 김윤성이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연락을… 누구 이도현 연락처 아는 사람 없어?!”

“걘 한국에 소속사도 없대?”

그때, 한 작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박민호 피디님이요!”

“박민호 피디…? 아! 불량경찰!”

박민호 피디는 몇 년 전, <불량경찰>이라는 드라마로 도현과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그들을 가호하는지, 박민호 피디는 그들과 같은 NMC 방송국 소속이었다!

“누구든 빨리 연락해!”

“제가 하고 있어요!”

그들은 눈을 번뜩 빛냈다.

이 기회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 * *

그리고 그건.

“소속사가 어디야? CLA? 그쪽으로라도 빨리 연락해! 다른 곳에서 채가지 않게!”

라디오뿐만 아니라 기업의 마케팅 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도현의 첫 CF.

그것도 한창 영화가 흥행하고, 영화의 공연 장면이 이슈가 되어 온갖 방송에서 오마주를 하는 시기에 CF라니.

절대로 놓칠 수 없고 놓쳐서도 안 되는 기회였다.

이도현을 모델로 세웠을 때 그 광고 효과는 얼마나 놀라울 것인가! 그 미래가 창창해 보이는 배우의 첫 번째 CF라는 타이틀은 또 어떻고!

브랜드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기회란 것은 분명했다. 지금도 그랬고, 미래에 이도현이 유명해질수록 더욱!

‘상여금! 보너스!’

눈이 마주친 이들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 것처럼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팅 부서가 불타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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