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Xmas Movie (19)
“네?”
“저번에 드라마 촬영했던 NMC 방송국 있지? 거기에서 보이는 라디오 출연할 생각 없냐고 연락이 왔어. 보이는 라디오가 싫으면 <생생한 토요일>이나 <도전, 35시간>도 괜찮고….”
‘아무거나 제발 출연해 달라던데.’
이장혁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그때.
지이잉-
도현의 핸드폰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도현은 발신자를 확인하곤 이장혁과 눈을 맞췄다. 이장혁도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았는지, 무언의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일주일 만인가요? 매독스.”
- 그 정도 되었겠네요. 한국 생활은 즐겁게 보내고 있어요?
“네. 아주 좋아요. 한가롭고요.”
- 제가 여유로운 방학을 방해하는 게 아니면 좋겠습니다만,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 한국에서 네 개의 방송 프로그램 출연 제안과 세 개의 CF 제안이 왔습니다.
“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 물론이죠. 통화를 걸기 전에 메일을 보내 드렸으니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놀라지 않네요?
“이미 한차례 놀란 후라서요. 부모님한테도 연락이 왔거든요.”
- 리스트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같은 곳인지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어서요.
“잠시만요. 그러니까 NMC….”
도현의 말을 들은 매독스는 한 곳이 겹치긴 한다며, 해당 방송국에 확인해본 후 메일은 다시 정리해서 보내도록 할 테니 그걸 확인해 달라고 말했다.
- 아시겠지만, 계약할 때 제게 먼저 상의를 하셔야 합니다. 미스터 리는 아직 한국에 소속사가 없으니까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 CLA와 계약을 체결할 때, 도현은 미리 해당 사항에 대해 논의를 끝낸 상태였다. 도현이 후에 한국에서 살 경우를 대비해서 추가된 조항이 있었다.
한국에 소속사가 없을 경우 CLA를 통해 계약하지만, 소속사가 생기면 한국에서의 활동은 한국 소속사를 통해서 하기로. 물론 여기서도 소속사 관련해서 계약 시 조건이나 조항이 복잡하게 붙긴 했다.
- 오스카를 그쪽으로 보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매독스는 꽤 골치 아픈 기색이었다. 케어해야 할 아티스트가 먼 타국에 있다는 게 답답한 거 같았다.
“오스카는 제 전담 매니저가 아닌걸요.”
-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조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매독스와 도현은 몇 가지 주제와 관련해 더 대화를 나누었다. 매독스는 방송 출연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한국에서 도현은 굉장히 이미지가 좋고, 영화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시기에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면 인지도를 올리기에 좋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CF 관련해서는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긴 했으나, 은근히 CF 촬영을 하길 바라는 게 느껴졌다.
“그럼 메일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음, 저녁 시간이 되기 전까지요.”
- 시간이 더 필요하면 더 천천히 고민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이만 끊을….”
- 아, 그리고 샌디에이고에 있는 훌륭한 발레 아카데미를 알아보았습니다. 돌아오면 그곳에 다니는 것도 좋을 거 같군요. 그럼 좋은 오후 되세요.
“…네. 매독스도요.”
도현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잠시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걸까…. 거기서도 이쪽 일들을 다 꿰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도 잠시.
“도현아! 복사해 왔어!”
이장혁이 내미는 종이를 보았다. 종이를 건네받은 도현이 차분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장혁이 물었다.
“출연하고 싶어?”
“CF는 흥미 있어요.”
“CF? 예능이 아니라?”
“네. 예능은….”
도현이 말을 흐렸다.
저번에 <투나잇 쇼>에 출연할 때도 그랬지만, 예능은 정말이지 도현에게 있어서 미지의 영역이었다.
루카는 영화 촬영이 끝난 후 이런저런 예능에 얼굴을 자주 비추던데, 숫기 없는 도현은 최대한 무난하고 얌전한 프로만 나갔다. 본인조차 잘 웃지 않는데 누구를 재밌게 만들라는 건지…. 너무 어려운 요구였다.
눈을 흐리던 도현은 눈에 띄는 항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요. 이거로 할래요.”
“어? 이렇게 바로 정해도 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연락 온 곳이네.”
도현이 고른 건 NMC 방송국의 ‘김윤성의 휴식 시간’.
“정말 이게 좋아?”
“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할래요.”
단호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이왕 나갈 거면 한번 겪어본 게 낫지.’
‘보이는 라디오’라는 컨셉은 <투나잇 쇼>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투나잇 쇼>는 한번 나가본 적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이장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첫 예능이니까… 그런 것도 좋겠다. 아니, 그게 가장 적당한 것 같네.”
보이는 라디오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한 예능도 있었지만, 내내 한국에서 산 이장혁은 한국의 여론을 잘 알았다.
사람들은 도현을 궁금해했다.
평소에 뭘 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다음 출연작은 무엇인지 하는 것까지. 라디오라면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적절할 것이다. 지금껏 한국에서 한 인터뷰라곤 베니스 인터뷰가 전부인 도현이니 더욱 그랬다.
수긍한 이장혁이 비장한 낯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중요한 건 라디오가 아니었다.
“저… 도현아.”
“네”
“혹시 CF 뭐 할지 안 정했으면… 이건 어때?”
이장혁의 손가락이 한 곳을 짚었다. 성인 남자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뼈 튼튼 칼슘 가득 우유 / 하루 유업]
“…….”
선명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 * *
“한대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한 대리가 부들부들 떨었다. 갑작스럽게 외친 것에 동료 직원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한 대리 요즘 일이 너무 많았나?’
‘어제도 야근하긴 했던데….’
그들이 대충 그런 이야기를 눈으로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이도현이 CF 출연하겠대요!”
“…뭐?”
“그거 진짜야?”
“콘티! 광고 콘티부터!”
“광고 대행사에 연락해!”
쾅!
이 팀장이 거칠게 일어나자 시끄럽던 사무실 안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계약부터.”
근엄한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대리가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근데 이도현은 출연료를 어떻게 잡아야 하죠…?”
“그….”
이 팀장이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시 다물었다.
굉장히 애매했다.
인지도는 높지만, 정작 한국에서 출연한 건 드라마 단역뿐이었다. 베니스 최연소 신인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빛나기는 하지만 정작 영화는 약간 마이너에 속했고… 이번에 나온 영화에서도 조연이었다.
그렇다고 낮추기에는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배우였다. 다름 아닌 할리우드였다.
한참 끙끙거리던 이 팀장은 회의실로 들어가 몇 시간의 논의 끝에 결정했다.
아역 배우 기준 최고 출연료.
그들의 최종 결정이었다.
* * *
도현이 결정을 내린 후.
도현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윤성의 휴식 시간>은 해당 주에 예정되어 있던 탤런트에게 양해를 구해 한 주를 미뤄 도현의 일정에 맞춰주었고, 광고 촬영은 몇 번의 논의 끝에 2주 뒤 월요일로 정해졌다.
도현의 출국 날짜에 맞추면 준비 기간이 너무 촉박해지는 탓에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미국으로 가는 날짜를 미루게 되었다.
- 넌 무슨 개학 날에 제대로 온 적이 없냐.
“한 번은 제대로 갔어.”
- 그래, 참 대단하다.
니콜라스의 목소리에 한심함이 묻어 있었다. 도현은 뭔가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기분에 눈만 깜빡였다.
- 너 가서 쉰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 그러게는 무슨.
“의도한 일은 아니야.”
가볍게 대꾸한 도현이 물었다.
“그, 진은?”
- 걘 여전하지.
그 짧은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도현은 진에게 연락하는 시기를 좀 더 미루기로 했다. 자칫 연락했다가 전화로 밴드부의 근황을 듣고,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애틋한 말을 들을지도 몰랐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 근데 너도 참 너다. 여기서도 예능 싫다면서 토크쇼 같은 거 말고는 출연 안 했으면서, 거기서 하게 되네.
“여기서 하는 것도 토크쇼랑 비슷해.”
- 그래? 그건 너답네. 그런데 어쩌다가 출연하게 된 거야?
“아, 내가 발레 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 뭐? 발레?
니콜라스가 기함했다.
- 너 미쳤어? 그렇게 여자애나 하는 걸 하겠다고? 튜튜 입고선?
“남자는 튜튜 안 입어.”
일단 도현은 틀린 사실부터 정정해 주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스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 그거 다른 애들이 알면 너보고 여자애 같다고 할걸. 특히 다비드 같은 애들이.
다비드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비드는 활기찬 그 나이대 남자애 같지만… 가끔 보면 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었다.
“별로 신경 안 써. 그리고 내가 다니는 학원에도 남자애들이 몇 명 있어. 여자애들만 배우는 건 아니야.”
- 너야 그렇겠지만…. 그 찔찔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걸. 걔네는 자기 기준에 안 맞으면 다 이상하다고 여긴다고.
니콜라스가 어떤 부분에서 걱정하는지는 알았다. 도현은 딱히 안다는 티를 내진 않았지만, 자신을 깎아내리길 원하는 몇몇 아이들이 뒤에서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파악은 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동양인인 걸 문제 삼더니, 나중에는 하얀 피부나 얌전한 태도를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도현은 그들을 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싫어할 애들은 싫어해. 작년에는 내가 동양인이란 사실만으로도 싫어하는 애들이 많았잖아.”
결국 니콜라스는 도현을 말리는 데 실패했다. 그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 그런 재미없는 걸 할 바에야 나랑 수영이나 하지.
“발레도 재밌어. 나중에 같이 해볼래?”
- 절대 싫어!
기겁하는 니콜라스에 도현이 키득대며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본래 주제에서 벗어났음을 뒤늦게 알아챈 도현으로 인해서 원 주제로 되돌아왔다.
“아무튼, 발레 학원에서 누가 날 찍어서 올렸나 봐. 그게 이슈가 돼서 기사로 퍼지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에서도 연락 오고 그런 거야.”
- 오오… 역시 도리토스!
도리토스라는 데에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도현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기로 했다.
“넌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 나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 * *
NMC 방송국.
‘김윤성의 휴식 시간’ 스튜디오실.
“언제 온대요?”
“거의 다 왔다는데….”
한 명의 프로듀서와 스태프, 세 명의 작가, 그리고 라디오 진행자가 있는 스튜디오 내부는 묘한 흥분감이 감돌고 있었다. 웬만한 유명 연예인들이 모두 거쳐 간 곳이란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도현 진짜 인기 많더라. 게스트 공지 올리자마자 난리 났잖아.”
“그러니까요.”
변 프로듀서의 말에 김 작가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작가는 두근두근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문을 빤히 응시했다.
‘이도현을 실제로 본다니!’
워낙 등장부터 화려했던 연예인이고, 그 생김새나 행보도 비현실적이라서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잘 느껴지지 않았다. 원체 알려진 게 없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첫 방송 출연이지 않은가! 그녀가 흥분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끼익-
문이 열리며, 편안한 옷차림을 한 작은 소년이 들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