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43)화 (244/582)

제243화. Xmas Movie (21)

‘하루 1 Freak! 공연 영상’을 실천한 지 어언 삼 주.

처음에는 쏟아지는 떡밥에 기뻤으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것도 삼 주가 지나자 슬쩍 욕심이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디 더 나온 영상 없나?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녀도 발견한 영상은 겨우 두어 개 정도.

오혜은은 슬픈 마음을 달래며 이도현 팬 카페에서 저와 같은 처지인 잼잼이들과 동병상련을 나눴다.

그때였다.

도현이 한국에 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

그것도 목격 장소가 마트도 아니고 공원도 아니고 청와대도 아니고 무려 발레 학원이었다. 발레 학원!

잼잼이들은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우리 갓기가 발레라니. 어떻게 그렇게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것만 쏙쏙 골라 할 수 있냐는 둥, 도현이가 정말 천사가 되어서 하늘로 날아가면 어떡하냐는 둥, 온갖 주접이 흘러넘쳤다.

한바탕 소란이 가신 후에 대두된 주제는 그거였다.

‘도현이가 한국에서 얼굴을 비칠 것이냐.’

여론은 두 가지였다.

‘한국에 왔으니 얼굴을 한번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라는 강경파와 ‘그래도 쉬러 온 애한테 일하라고 하는 건 너무하니까 나와 줬으면 좋겠다’라는 온건파인 척하는 강경파였다.

그리고 이런 애타는 잼잼이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며칠 후에 기사가 올라왔다.

[배우 이도현! ‘김윤성의 휴식 시간’ 출연 확정!]

[이도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이도현 팬 카페 분위기는 거의 축제 날이었다. 오혜은도 기쁜 마음으로 거기에 동참했다. 물론 <도전, 35시간> 같은 프로가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잼잼이가 되어서 얻은 게 있다면 작은 행복에도 크게 기뻐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라디오 방송 날.

“미친…!”

화면에 나온 해사한 얼굴에 오혜은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우리 애기가 저기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간신히 진정한 오혜은은 컴퓨터 화면을 집중해서 보았다. 보이는 라디오는 따로 조명이 있지 않거나, 많지 않은지 보정이 들어가지 않은 수수한 화면 그대로였다. 그래서 도현의 모습이 더욱 사실적으로 와닿았다.

-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뭐예요?

- 최근에는 영화의 영향으로 록이나 브릿팝 같은 장르도 좋아졌고… 평소에는 클래식 많이 들어요.

- 클래식이요? 예를 들어 어떤?

- 관현악 쪽을 좋아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곡은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예요. 제가 좋아하는 지인이 연주해준 적이 있었거든요.

- 지인분이 바이올린을 잘 켜시나 봐요.

- 네. 덕분에 제가 옆에서 듣다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역시, 생긴 대로 논다고, 자기가 부잣집 도련님처럼 생긴 걸 아는지 즐겨 듣는 음악도 고풍스러웠다.

다른 아역 배우가 나와서 클래식이라고 했으면 ‘컨셉인가?’ 했을 텐데 도현의 태도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분위기 탓인가?’

방랑자에서 도현이는 위태로워 보였고, 괴짜들에서는 어딘가 어리숙하면서 핀트가 나간 천재 같았다. 그러나 화면에 나온 도현은 두 영화에서의 모습과 달랐다.

얼굴은 알던 만큼 앳되었는데 분위기 탓인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생각했던 거보다 더 차분했고, 성숙했으며, 무엇보다 묘한 냉기가 흘렀다.

그건 특히 은은하게 떠오른 미소가 사라질 때마다 도드라졌는데, 주로 라디오 진행자의 질문에 집중할 때 그랬다.

둥근 곡선이 사라질 때 드러나는 날카로운 눈매와 갈색이 거의 섞이지 않은 검은 눈동자는 얇게 언 호수나 차갑고 깊은 수심 따위를 연상시켰다. 오혜은은 새삼 도현이 베니스 영화제 이후 많이 자랐음을 느꼈다.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오혜은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걸을 때마다 뾱뾱 소리가 나는 뽀짝이였는데, 이러니까….

“더 좋아, 미친!”

아무튼 도현이는 모자란 게 뭔지, 귀엽기만 하면 됐지 멋있기까지 하고 난리였다. 지금도 이런데 나이를 먹으면 얼마나 더 멋있어질지 생각하니까 덕심이 요동쳤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게 그녀 하나뿐은 아닌지, 시청자 게시판은 이미 난리였다.

- 도현아 ㅠㅠㅠ 여기 좀 봐줘

- 완전 도련님이네

- 클래식 나오자마자 얼굴 보고 납득했다

- 도현이가 좋아하는 지인은 누굴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봄

때마침 댓글을 보고 있던 김윤성이 웃으며 댓글을 읽었다.

- 도현아네가복지다 님이 ‘도현이가 좋아하는 지인은 누굴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라고 하시네요. 도현 씨, 이 의견에 동의하세요?

주접이 나올 때마다 흠칫대는 도현에 재미가 들렸는지 김윤성은 도현이 방심할 때면 틈을 타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물론 잼잼이인 오혜은에게는 매우 오예인 일이었다.

도현이의 귀가 붉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오혜은은 곧 입을 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입매가 느슨해지며 곱게 웃어도 가시지 않던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수많은 영상을 돌려 봤음에도. 그토록 순한 인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유진 역할을 맡았을 때의 어딘가 성숙한 미소와도,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 보인 환희에 찬 미소와도 달랐다.

그저 웃는 얼굴을 봤을 뿐인데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겹겹이 가려져 있던 내밀한 무언가를 엿본 거처럼….

- 그렇게 치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건 저일 거예요.

오혜은은 깨달았다.

이번 생에 탈덕은 글렀다는 것을.

* * *

“배우 활동을 하면서 배우분들을 만나 봤잖아요. 만나본 배우분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배우는 누구예요?”

김윤성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어린 배우가 나올 때면 던지는 단골 질문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에드워드 녹스요.”

“에, 에드워드 녹스요?”

김윤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면 이도현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배우였다. 한국 배우가 아니라 할리우드 스타 이름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네. 에드워드는 첫인상부터 아주 강렬했어요. 베니스 영화제에 갔을 때, 그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걷는 게 첫 만남이었거든요.”

“그건 진짜 인상적이었겠네요.”

“정말요.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 후에… 그가 먼저 제게 말을 걸었어요. 그가 저를 편하게 대해준 덕분에, 우리는 연기라는 주제를 가지고 금방 친해졌죠. 지금 소속되어 있는 소속사를 소개해준 사람도 에드워드예요.”

김윤성은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건 대박 날 기삿감이었다! 물론 이도현이 나왔다는 것만 해도 화제성이 있지만, 거기에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까지 얹어지면….

‘역시 복덩이잖아.’

김윤성이 따스한 눈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도현은 그런 그의 심정을 모른 채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에드워드는 제가 힘들 때마다 도와줬어요. 제가 캐스팅이 취소되었을 때도 조언을 해줬고, 이번 영화를 찍을 때도 저를 도와주었죠. 제게는 멘토 같은 분이에요.”

‘할리우드 스타랑 멘토 멘티 관계라니.’

도현이 에드워드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친분이 있다’와 실제로 도움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다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라디오가 끝나면 기사란을 장식하고 있을 헤드라인이 눈에 그려져 김윤성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라디오는 순항이었다.

제일 자신 있는 연기는 좌절하는 연기라고 말한 도현은 짧은 연기만으로 라디오를 뒤집어 버리고, 제일 자신 없는 연기는 부끄러운 얼굴로 사랑 연기라고 말하며 시청자들의 귀여움을 샀다.

- 사랑 연기 해줘, 도현아!!

- 유진은 잘하던데 ㄷㄷ 그 달달한 눈빛이 자신 없는 연기였다니

- 고백 연기 가자!

- 솔직히 이거 연기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보여주면 나 앞으로 잠 못 자, 도현아

“아, 진짜 자신 없어요….”

도현의 대답을 들은 시청자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도현을 실컷 놀려대자 도현이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부끄러워 죽으려는 도현을 김윤성이 구해주고 나서야 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라디오가 끝자락을 향해 달려갔다.

“도현 씨, 방학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죠?”

“네. 학교에 가야 하니까요.”

“그럼 개학하고 촬영 일정이 있어요?”

“아, 아니요. 아직 예정된 건 없어요.”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놀겠네요. 시청자들이 도현 씨가 앞으로 뭐 할지 굉장히 궁금해하시는데,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음… 배우 활동 관련해서는, 말한 것처럼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심지어 오디션 계획도 없거든요. 그래서 작품 활동이 언제 들어갈지는 모르겠어요.”

“일상에서는요?”

“일상에서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평범하게 보낼 거 같은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랑 놀고, 클럽 활동을 하고, 그렇게요.”

“클럽이요? 어떤 클럽이요?”

“도서부에 들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도서부 말고도 하나 하는 게 있어요.”

말할 게 생각났는지 도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배우 중에서 유독 눈빛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은데, 눈앞에 있는 소년도 그랬다.

“제가 임시지만 수학 올림피아드 반 소속이거든요. 2월에 AMC 10을 응시할 거 같아요.”

“AMC…?”

잠깐 당황하던 김윤성은 유리창 너머로 사인을 보내는 김 작가에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MAA에서 주관하는 권위 있는 미국 수학 경시 대회라고 하네요. AMC 8, 10, 12가 있는데 10은 미국 고등학교 9, 10학년이 배우는 내용을 다룬다고… 도현 씨, 4학년 아니에요?”

“네. 이제 4학년 2학기 들어가죠.”

- AMC? 내가 아는 그 수학 경시 대회?

- 나도 본 적 있는데!

- 역시 도리는 머리도 똑똑해 ㅠㅠㅠㅠ

- 도현아 못하는 게 뭐야

- 초등학교 4학년이면 AMC 8 응시해야 하는 거 아니야?

- 너무 어려운 시험 보면 괜히 흥미 떨어질 텐데…

시청자 댓글에 하나둘씩 올라오던 걱정 글은 곧 대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비아냥거렸다.

- 괜히 천재 컨셉 가져가려고 언급한 거 아님? ㅋㅋㅋ

- 응시하는 게 뭐 별거라고. 나도 응시는 할 수 있음

- 노리고 한 말인가

김윤성이 다급히 도현을 보았다. 저 댓글을 보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에서였다. 아무리 연예인이라고 한들, 방학이 끝나면 초등학교로 돌아가는 어린아이였다.

“시청자분들이 걱정이 많네요. 몰랐는데 AMC 10이 되게 어려운 시험인가 봐요. 연기도 잘하는데 공부까지 잘하면 이거 너무 사기 아니에요?”

부드럽게 화제를 넘기려는 의도였다.

“AMC 10이 9, 10학년을 대상으로 하긴 하지만 그 아래로는 연령 제한이 없어서요. 원한다면 초등학생도 자유롭게 응시 가능… 아, 마침 관련해서 언급하신 분이 있네요.”

아니, 왜 거기로 빠지는데?

당황한 김윤성의 심정도 모른 채 도현은 태연하게 댓글을 읽었다.

“라라리 님. 초등학교 4학년이면 AMC 8 응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수학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네, 맞아요. 보통 그러죠. 저도 몇 달 전에 AMC 8 응시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AMC 10 보려는 거예요.”

어… 진행은 내가 해야 하는 건데.

- AMC 몇 점 받았어?

- 점수는? 점수가 중요하지ㅋ

- 점수 공개해줘!!

댓글 창에는 비슷한 질문이 가득 차올랐다. 그에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댓글을 따라 읽었다.

“도리토스존맛 님. AMC 몇 점 받았어? 음… 이런 거 여기서 말해도 되는 건가요?”

잠깐 머뭇거리더니, 화면에 뜬 ‘OK’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말했다.

“저 Certificate of Distinction 받았어요.”

말을 마친 도현이 김윤성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러운 배턴 터치였다.

김윤성은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유리창 너머로 팔을 흔드는 변준호 프로듀서에 마무리 멘트를 입에 담았다.

“세상에, 도현 씨 수학까지 잘하면 어떡해요. 오늘 도현 씨의 다재다능한 모습을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여러분, 아쉽지만 이만 끝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도현 씨, 다시 한번 라디오에 출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출연해서 좋았어요. 시청자분들과 소통하는 것도 재밌었고요.”

“그럼 다음에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김윤성이 은근히 말을 던졌다. 그러자 도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다음에도 불러 주신다면요.”

“변 피디님. 이거 영상 지우지 마세요. 증거 영상으로 남겨두셔야 해요, 알겠죠? 네, 알겠다고 하시네요.”

도현은 장난인 줄 알고 웃었지만, 김윤성은 진심이었다. 저기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있을 변준호 프로듀서도 진심일 게 분명했다.

“그럼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김윤성의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김윤성의 말이 끝나자 도현이 미리 약속되었던 멘트를 내뱉었다.

“그럼 모두 행복한 휴식 시간 되세요.”

도현의 말이 맺음과 동시에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디오의 끝이었다.

그리고 시청자 게시판은.

- 이도현이 말한 상 만점자한테 주는 상임. AMC 8이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긴 하지만 중학생도 만점 받기는 힘든 시험

- 만점? 만점이라고?

- ㅁㅊ 진짜야?

- 이거 ㄹㅇ임? 구라 아니고?

도현이 마지막에 떨어트리고 수습하지 않은 폭탄 탓에 난리가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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