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44)화 (245/582)

제244화. Xmas Movie (22)

“오늘 정말 여러모로 빵빵 터지겠네….”

앞으로 터질 일을 예감한 김윤성이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겠어요? 아, 일단 정말 미안해요. 그런 댓글들 못 보게 해야 했는데.”

착잡하게 손바닥으로 뺨을 비빈 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도현이 뒤늦게 탄식을 뱉었다.

“아.”

‘아?’

단조롭기 짝이 없는 반응에 김윤성이 뜻을 해석해보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혹시 그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경시 대회 이야기 꺼내고 나서 의심하시던 분들이요.”

“그래, 그거요.”

도현이 잠깐 웃었다.

“걱정해주신 건 고마워요. 그런데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괜찮거든요.”

한 점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욕을 퍼부은 것도 아니고, 마냥 비난한 것도 아닌 말들은 별로 간지럽지도 않았다.

김윤성의 눈이 촉촉해졌다.

‘나를 위해 그렇게 말해주다니…!’

감동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 늦어진 대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도현이 부연했다.

“진짜예요. 말씀하시기 전까진 잊고 있었어요.”

“내가 부른 게 배우가 아니라 천사였나 봐.”

“…….”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현은 떫은 감을 먹은 사람처럼 껄쩍지근한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왔다. 한 책상 앞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로 와봐요! 지금 엄청 난리도 아니에요.”

도현이 다가가자 그들이 옆으로 몸을 물려 비켜주었다. 도현은 그들이 보고 있던 화면을 보았다.

“시청자 게시판이 거의 폭주 상태예요.”

“여기, 여기도. 네이버도 새로고침 할 때마다 새로운 기사 올라오는 거 보여요?”

그 말대로였다.

신기했다. 낯설기도 하고. 검은 눈동자가 감정을 담자 사람들이 더욱 신나 하며 이것저것을 보여주었다. 겨우 오 분 전에 라디오가 끝났을 뿐인데 기사가 한가득했다.

도현의 눈이 기사를 훑어 내렸다. 그 옆모습을 흘깃흘깃 보고 있던 김 작가가 그를 불렀다.

“저, 이도현 배우님.”

퍽 조심스러운 투였다. 그쪽으로 시선을 주자 김 작가가 시청자 게시판을 한번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도현도 그걸 볼 수 있었다.

“시청자들이 배우님이 마지막에 한 말에 관심이 많아서요.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말해보는 건데….”

서론이 이리저리 길어졌다. 도현은 쭉쭉 올라가는 댓글에서 이만 눈을 떼곤 그녀를 쳐다보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AMC 성적표를 라디오 게시판에 올리는 거 어때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도현이 멈췄다. 아, 맞다.

“저는 괜찮은데, 그게 아마 미국에 있는 집에 있을 거예요.”

“아, 헉. 어떡하지?”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김 작가가 당황했다. 변준호 프로듀서도 침음성을 흘렸다.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질 때였다.

“큼, 흠.”

이장혁이 헛기침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화면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결과지를 찍어둔 게 있는데, 이거면 될까요?”

그가 내민 화면에는 도현의 이름과 학년, 시험을 본 날짜와 시험 종류, 그리고 가장 중요한 Honor 칸에 Certificate of Distinction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걸 언제 찍었지.

의아함을 느끼는 도현과 별개로 사람들은 다들 잘됐다며 좋아했다. 운이 좋게도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게스트 사진 찍어서 올리는 코너에 같이 올리면 되겠네.”

변준호 프로듀서의 말에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도현은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김윤성과 어깨동무를 한 채 사진 한 장을 찍고는 사진과 결과지가 업로드되는 것을 보았다. 일사천리였다.

* * *

라디오 방송 이후.

“자, 호흡 끊기지 않아요. 그대로 쭉 내려가고. 유지 삼십 초.”

김재연의 말을 따라 허리를 숙이면서도 도현은 한층 더 진해진 시선을 느꼈다.

아마… 그들도 그 기사를 본 게 틀림없었다. 도현은 그날 가득했던 기사를 떠올려 보았다.

[배우 이도현, 할리우드 스타 에드워드와의 친밀한 관계 과시!]

[이도현, “에드워드와는 멘토 멘티 관계….” 다이아몬드 인맥]

[과학이 제일 쉬웠어요? 배우 이도현이 최근 읽는 책은 ‘엔트로피’]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기자들은 그 정도의 헤드라인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온갖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연기 천재 이도현, 실은 진짜 천재?]

[전미 8학년 이하 학생 중 단 0.01%! 배우 이도현의 천재성!]

[배우 이도현 AMC 만점, 엄친아를 넘어선 엄친아…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

[할리우드 배우 이도현이 만점을 받은 AMC 8에 대해서 알아보자!]

[연기도 만점 수학도 만점 미모도 만점… 잘나도 너무 잘난 배우, 이도현!]

라디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도현은 부모님과 함께 그 기사들을 모두 읽었다.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0.01%가 근거 있는 수치인지가 제일 궁금했다. 해리 선생님께 상위 1% 평균 22.6점이라는 건 들었어도 만점자 비율은 들은 적이 없었다.

AMC 8 이 그리 쉬운 시험은 아니지만, 그리 어려운 시험도 아니라는 점을 참고해 -AMC는 10부터 난도가 껑충 뛰었으니 이건 진실이었다- 도현은 과장이 들어간 수치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기사에 허위 정보를 올려도 되나.

그런 의문도 잠시.

도현은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 이제 사람들은 제가 세기의 천재인 줄 알겠네요.

어딘가 텁텁한 음성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세기의 천재쯤으로 불리기에 적당한 사람은 형 정도였다.

‘나는 반칙으로 조금 앞서간 거고.’

집을 나왔는데 불을 켰는지 껐는지 헷갈리는 사람처럼 애매하게 떠름한 얼굴에 부모님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위로인가 싶어서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 우리 도현이 천재성의 반의반도 안 드러냈는데 이렇게 반응하네.

- 그러게나 말이야. 겨우 AMC 만점 정도 가지고. 우리 도현이한테는 얼마나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냥 닫았다.

그는 깨달았다. 인터넷에서 호들갑을 떠는 기사보다 부모님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 사실이 알려진 게 퍽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보면….

“도현이를 어떻게 가르치신 거예요? 특별한 비법이 있어요?”

“하하, 저희가 뭐 한 게 있나요….”

“그러지 마시고요. 좀 알려주세요. 부러워서 그래요.”

“정말 아이가 알아서 한 거라….”

…이걸 말한 게 아닌데.

그는 혹여라도 시선이 마주칠까 시선을 거울에 고정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지만, 때때로 이미 날카롭게 깎여 둥글어지지 못한 모난 구석이 툭 튀어나왔다.

이럴 땐 모른 척 지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도현은 그냥 음악 소리에 집중했다.

“다들 매트 정리하고 바로 가서 서자.”

아이들이 익숙하게 제자리를 찾아 섰다. 도현도 그중 하나였다.

며칠 다녔다고, 긴 바나 쭉쭉 늘어나는 발레복, 따갑게 내려앉는 유리창 너머의 시선들이 익숙했다.

왼손을 바 위에 올려놓자 밤나무의 매끄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겨울이라 그런지 차가웠다. 도현은 몸을 바르게 세워 정면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서 유독 까만 색채를 가진 소년이 도현을 보았다.

조금은 느릿한 피아노곡이 울렸다. 도현은 머릿속으로 그 곡의 이름을 떠올리다가, 이내 선생님의 지시에 맞춰 자세를 가다듬었다.

매끄러운 바닥과 신발의 밑창이 마찰하며 끼익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 * *

막 옷을 갈아입은 도현이 탈의실을 나왔다. 이 시간에 수업을 듣는 남자애는 도현밖에 없어서 남자 탈의실은 늘 혼자 썼는데, 오늘은 누군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매트를 고를 때 그 매트보다 여기 있는 게 더 새거라며 가르쳐준 애의 가족이었던가.

몇 걸음만 더 가면 여자 탈의실이니 동생을 기다리는 거겠지. 도현이 간단한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정확히는, 지나치려고 했다.

“저, 저! 잠시만!”

몸을 틀자 고개를 푹 숙인 소녀가 보였다. 중학생 정도 되었을까. 교복을 입은 걸 보니 하교 후 바로 동생을 데리러 온 거 같았다.

“제게 볼일 있으세요?”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흔들리는 동공, 긴장으로 굳은 뺨, 뻣뻣한 어깨. 감정의 형태는 불안함이었다. 불안함? 어째서?

아까까지만 해도 별다른 관심이 없던 검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피어났다.

발레 학원을 다니면서 도현은 가지각색의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인사하는 사람,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 사진을 찍자는 사람, 인터뷰를 요청하는 사람 등등….

최악은 친근하게 구는 사람이었다. 도현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예의 바르게 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낯가림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몇 년은 봐온 사이처럼 말을 걸고 접촉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람 중에서도 불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 10살짜리 남자애를 보고 불안해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그러고 있었다.

궁금하긴 해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난감해하는 걸 보니 굳이 묻고 싶은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잘못 부르신 건가요?”

“아, 아니야! 말할 거 있어.”

“네, 말씀하세요.”

본인이 말하겠다니 말릴 이유가 없어진 도현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는 시선에 왜인지 소녀는 움츠러들었지만.

소녀, 유미나가 숨을 한번 가다듬고는 말문을 뗐다.

“미안해. 네 사진 올라간 거… 그거 나 때문이야.”

“네?”

유미나는 이젠 모르겠단 심정이 되어 말을 쏟아내었다. 상대의 반응을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보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한테 보냈거든. 그랬더니 친구들이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어. 그게 그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 진짜야.”

그녀는 거듭 강조했다. 도현은 그냥 눈만 깜빡이며 유미나가 쏟아내는 말을 들었다.

도현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놀란 게 아니었다. 그걸 이렇게 밝혔다는 사실에 놀란 거였다.

말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사실 도현조차도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던 일이었다.

도현은 조금 신기한 심정으로 그녀의 고백을 들었다.

라디오가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든가, 그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찍어서 올렸을 거란 사실을 제쳐두고서 단순한 사실만을 따지자면,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자신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다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과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 *

널찍한 방 안.

흐트러짐 없이 잘 정돈된 방은 어딘가 결벽적이었다. 생활감이 없을 정도로 단정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건 소년 한 명뿐이었다.

“대단하다….”

소년이 중얼거렸다.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던진 질문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능숙하게 대답한다. 가끔가다 보이는 미숙함은 흠결이 아니라 그저 장인의 신중한 손길 아래 미완성의 작품이 다듬어져 가는 모습을 엿보는 거 같았다.

소년과 같은 나이였으나, 그게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것 외에는 어디에도 닮은 부분이 없어 소년은 실망스러워졌다.

그 소년은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존재 같았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소년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소년은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아나운서의 고운 목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울렸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며 네가 나왔다. 너는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단상 위에 올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소년은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시린 바람에 깎인 시커먼 바위 위 바다처럼 차오르는 서늘함, 그 차갑고 선뜩하던, 충격적인 감각을 소년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측량할 길 없는 감정의 단편을, 깨진 유리 조각을 작은 손으로 끼워 맞추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나마 받아들였다.

그 순간부터 소년은 별을 동경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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