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Xmas Movie (23)
“…….”
도현은 생각했다.
이게 최선이었을까?
다시 한번 고심해 보았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진지한 얼굴에 그를 보고 있던 하루 우유 CF를 맡은 감독, 최진연이 말을 걸었다.
“어때요, 재밌죠?”
“…네, 그렇네요.”
“광고주, 그러니까 하루 우유 쪽에서 이도현 씨에게 맞춤인 콘티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거든요. 우리한테도 재밌는 도전이었고요. 이도현 씨 마음에 든 것 같아 기쁘네요.”
“제… 맞춤이요….”
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당장에라도 묻고 싶은 걸 도현은 꾸역꾸역 참아내고 애써 웃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제외하고서, 최진연 감독의 말대로 CF 콘티가 잘 나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광고는 보시는 것처럼 학교 편이랑 하루 편,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질 예정이고, 송출될 때도 같이 나오지 않고 따로따로 나올 예정입니다.”
티비를 보다가 학교 편을 보게 될 수도 있고, 하루 편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재밌는 방식이었다. 도현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촬영 순서는 하루 편부터 할 겁니다. 일단 거기 있는 장면 중에서 집에 있는 부분- 그러니까 장면 1, 2랑 16, 17이요. 그리고 장면 18, 19는 저기 보이죠? 저곳에서 촬영한 후 나중에 CG를 입힐 예정입니다.”
최진연 감독이 말한 곳은 아무것도 없이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장소를 확인한 도현이 다시 콘티로 눈을 돌렸다. 곧 찍게 될 장면을 정성스럽게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거기까지 촬영을 하고 나면 13번부터 15번까지 장면 촬영할 거고요. 이 장면에서는 보조 출연자들과 함께 찍을 겁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학교 배경을 제외하고는 다 찍는 거죠. 학교 배경은 오전 촬영을 마치고 장소를 이동한 후 찍을 거예요.”
최진연 감독은 몇 가지를 더 말해준 후 자리를 떴다. 도현은 잠시 여기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으나, 그 고민은 금방 쓸데없는 일이었다는 게 판명 났다.
“이쪽으로 오세요. 스타일링을 해야 해서요. 보호자분도 같이 오셔도 돼요.”
도현과 동행한 사람은 이번에도 이장혁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둘 다 따라오고 싶어 했으나 도현이 부담을 느껴서 한 명만 함께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유일하게 떨어져 사는 아빠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걸 입으면 돼요.”
초록색 바탕에 체크무늬가 있는 평범한 잠옷이었다. 가로선 무늬가 회색이라서 차분한 느낌이었다.
입어보니 얇아 보이던 것과는 별개로 안에 기모가 들어 있었다. 덕분에 촬영하는 동안 춥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잠옷은 어때요? 사이즈는 잘 맞아요?”
스타일리스트의 물음에 도현이 긍정했다. 그러자 스타일리스트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그럼 집에 갈 때 가져가요.”
“…네?”
“그거 순면이에요.”
아니, 싫다는 소리가 아니라….
도현의 황당한 눈빛을 못 본 척한 스타일리스트가 옷 이곳저곳을 손보았다. 약간 구겨져 있던 잠옷이 깔끔하게 펴졌다.
그 후 메이크업은 간단하면서 간단하지 않았다. 메이크업을 맡은 사람은 ‘방금 잠에서 깬 것같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이 콘셉트라고 말하며 열과 성을 다했다. 정작 다 끝나고 거울을 본 도현은 뭐가 달라진 건지 느끼지 못했다.
도현이 나오자 이리저리 지시하고 있던 최진연 감독이 그를 불렀다.
“아침에 일어나는 장면부터 찍을 거예요. 자는 연기 해본 적 있어요?”
“아니요.”
“자연스럽게 하면 돼요. 물론 도현 씨는 충분히 잘하겠지만요. 매일 아침에 잠에서 깨잖아요. 그때를 떠올려 봐요.”
과장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감독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앉은 채로 기지개한 다음에 탁자에 있는 우유를 마시면 돼요. 유당불내증은 없다고 했죠?”
“네, 괜찮아요.”
“평소에 우유 많이 마셔요?”
최진연 감독의 질문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우유를 좀 많이 마시게 될지도 몰라요. 혹시 마시다가 힘들면 말해요.”
왠지 불길한 기분에 도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첫 번째 촬영을 진행할 장소는 스튜디오 내에 마련된 세트장이었다. 가정집을 구현한 거 같은 세트장은 우유 광고 아니랄까 봐, 가구가 온통 하얬다.
표백제를 들이부은 듯한 매트리스와 이불, 베개에 도현은 약간 걱정됐다. 얼굴에 이것저것을 바른 거 같았는데 하얀 면에 묻어나진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첫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도현 씨, 침대에 들어가서 편하게 누워보세요. 이불은 스태프가 정리해줄 겁니다.”
도현이 침대 위에 조심스레 몸을 뉘었다. 집에 있는 매트리스보다 좀 더 푹신했다.
‘뭐지, 이 편안함은…?’
스태프가 와서 이불을 곱게 덮어주자, 완벽하게 안락했다. 침구는 깨끗하지, 매트리스는 푹신하지, 이불은 따뜻하지. 자는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눈이 감겼다.
“네, 좋아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역시 자는 연기도 잘하네요.”
최진연 감독이 감탄했다. 잠깐 눈이 풀렸던 도현은 머쓱한 기분에 눈을 뜰 뻔했다.
‘…하마터면 진짜 졸 뻔했어.’
평소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케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발레 학원 선생님이었다.
어제는 도현이 발레 학원에 나오는 마지막 날이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을 하던 선생님은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며, 도현을 굴렸다. 말 그대로 굴렸다. 도현은 그날 발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운동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탓인지 도현은 아침부터 근육통에 시달렸다. 간신히 깨어나 아침을 먹고 쉴 시간도 없이 출근 도장을 찍은 게, 광고 촬영 세트장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도현은 매독스를 통해 이 광고에 출연한 대가로 받는 돈의 액수를 들었다. 물론 금전적인 보상이 없었더라도 출연을 결정한 이상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 무게감이나 부담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도현이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첫 CF 촬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세트장에 있는 모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흰 우유처럼 깨끗한 방 안.
푹신한 이불에 폭 감싸인 작은 소년이 꿀 같은 잠에 빠져 있었다. 소년의 뺨 위로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산란했다.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던 최진연 감독이 속으로 감탄했다. 왜 하루 우유에서 이도현을 광고 모델로 세우고 싶어 했는지, 왜 콘셉트를 그에게 맞춤형으로 제작하라고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소년은 깨끗한 하얀색과 무척 잘 어울렸다.
깨끗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우유 회사 입장에서는 탐이 나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가 아이는 차분하기까지 해서, 놀랍게도 신뢰를 주는 이미지기도 했다! 고작 10살인데도!
띠리리리!
머리맡에 놓인 알람시계가 몸을 떨며 진동했다. 파르르 떨리던 눈매가 천천히 떠지고, 잠이 덜 깬 듯 비몽사몽한 표정의 소년이 손을 더듬어 알람을 껐다.
여전히 꿈나라에 반쯤 걸쳐 있는 소년이 하품하며 양팔을 위로 쭉 뻗었다.
발레를 한다고 했던가.
유연해서 그런지 기지개를 켜는 자세가 날렵했다. 밤새 웅크려 잔 고양잇과의 맹수가 몸을 푸는 거 같았다.
침대맡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구겨 넣고 좀비처럼 터벅터벅 걷는 소년의 얼굴에는 나른함이 가득했다. 소년의 발길이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익숙한 손길로 냉장고를 연 소년이 긴 우유 팩을 꺼내 투명한 유리잔에 따랐다.
이윽고.
꿀꺽, 꿀꺽, 꿀꺽!
되게 시원하게 마시네.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진연 감독도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쩐지 갈증이 이는 기분이었다.
탁!
시원하게 우유를 원샷한 소년이 경쾌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입매는 어느새 산뜻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몽롱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OK였다.
* * *
도현은 한 가지 슬픈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으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줄 알았다. 초보 CF 모델의 오판이었다.
도현은 오케이를 받고도 몇 번을 다시 찍어야 했다. 처음처럼 원 테이크가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잘게 쪼개서 촬영하기도 했고, 때로는 카메라를 코앞에 들이밀고 촬영하기도 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촬영은 영화를 찍으면서 꽤 많이 겪어본 일이었다.
문제는….
“한 번만 더 마실 수 있겠어요?”
…또?
“네.”
도현이 삼킨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최진연 감독이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조금만 더 힘내요. 이 장면은 유리잔이라 다 마셔야 하는데, 다른 장면 때는 우유 팩으로 마셔서 세 모금 정도만 마셔도 돼요. 저녁 장면도 불투명한 머그컵이라 마찬가지고요.”
“…네, 감사합니다.”
도현이 우유가 담겨 있었던 유리잔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입이 짧았다. 신 음식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잘 먹었지만, 편식을 안 할 뿐 한 가지 종류를 많이 먹지는 못했다.
“많이는 말고, 한 두세 번만 더 마셔봅시다. 이게 첫 장면이라 중요해서요.”
도현은 오늘이 아주 길고, 힘겨운 날이 되리란 걸 직감했다.
* * *
“도현아, 괜찮아?”
“괜찮아요.”
“속 안 좋으면 물 좀 마실래?”
“아니요.”
칼같이 나온 대답에 이장혁이 어색하게 손을 물렸다. 도현은 액체류만 봐도 속이 뒤집힐 거 같아 그런 그를 외면했다.
“이제 열여덟 번째 장면 촬영할 거니까, 우유는 안 마셔도 돼요. 그 장면도 촬영하고 나면 점심시간이니까 잠깐 쉴 시간도 있고요.”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스태프가 해준 말에 도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에겐 잠깐 우유와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자, 끝났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도현이 거울을 확인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장면과 밤에 잠이 드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꾸몄던 거와 다르게, 이번에는 머리카락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옷도 잠옷에서 벗어났다.
“잠옷도 귀여웠는데, 사복 입으니까 정말 훤칠하네요. 정말 빛이 난다, 빛이 나.”
“잘 꾸며주셔서 그렇죠. 감사합니다.”
“어머, 말하는 것도 어쩜 그렇게 예쁘지. 잠깐 일어나 봐요. 옷은 잘 맞아요?”
“네, 편해요.”
“그것도 챙겨둘게요. 갈 때 가져가요.”
“…네?”
대체 뭘까.
도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자 스태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옷, 도현 씨 사이즈에 맞춰서 제작한 거예요. 주인이 가져가야지, 아니면 누가 가져가겠어요.”
그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어린아이용 정장이야 그렇다고 쳐도 잠옷은 어느 모로 보나 기성복이었던 탓이었다.
도현은 의문점을 제기하는 대신 수긍하기로 했다.
도현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근데 흰색 정장을 언제 입지.’
가져가도 입을 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도현은 머리를 비웠다. 그냥 전시회에 가면 주는 기념품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 * *
세 번째 촬영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이게 나중에 CG를 입히고 나면 초록색 잔디가 깔린 넓은 초원에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이 될 거라는 게 신기했다.
“푸른 초원을 걷는다고 생각해요. 고개를 들면 지평선이 보이고, 초록빛의 잔디가 시야가 닿는 곳까지 펼쳐져 있어요. 하늘에는 구름 몇 점이 떠다니고, 땅에는 구름처럼 자유로운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거예요.”
최진연 감독은 퍽 감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도현에게 지시를 내릴 때, 단순한 행동을 말하기보다는 머릿속으로 심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표현을 썼다.
도현은 그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바람에는 풀잎 냄새가 묻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곳에서 아무런 제약도, 구속도 없이 평화롭게 거닐어요. 마치 바람에 섞여든 풀 내음처럼요.”
도현은 눈을 감고 그가 말한 것들을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 상상 속에만 있는 것들을 진짜처럼 느끼는 건 도현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머릿속이 비워지고, 세트장처럼 텅 빈 공간이 생겨났다. 위도, 아래도, 옆도, 정면도, 현실이었다면 볼 수 없을 뒤쪽도 전부 하얬다.
제일 먼저, 초록색.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온통 하얗던 세상이 순식간에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수채화 물감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막 움튼 새싹들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푸른색.
하늘에 푸른 물감이 떨어졌다. 흰색과 섞여든 푸른색은 곧 세상을 가득 채웠다. 아래에 있는 초록빛과 위에 있는 하늘빛이 서로 섞여들었다.
그 색의 경계를 연결하는 건 흰 구름과 구름처럼 자유로운 소들.
그렇게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도현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나.
마인드 컨트롤이 끝난 도현이 눈을 떴다. 최진연 감독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현이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다시, 촬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