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Xmas Movie (24)
“괜찮으면 여기 와서 먹어요.”
저를 부르는 최진연 감독에 도현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장혁도 당연히 옆에 함께했다.
“맛있게 드세요.”
“두 분도 맛있게 드세요.”
도현이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한 말에 최진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입은 편안한 체크 남방에 갈색 안경이 그 부드러운 웃음과 잘 어울렸다.
도현은 젓가락을 쥐긴 했지만, 선뜻 음식에 손을 뻗진 못했다. 도현이 음식을 가지고 고사를 지내는 걸 본 최진연이 물었다.
“밥 안 먹어요?”
이걸 말할까, 말까.
짧은 고민 후 도현이 말했다.
“사실 아직 배가 불러서 입맛이 없어요.”
“이런.”
그는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우유로 배 채울 수는 없으니까… 정말 못 먹겠으면 과일만이라도 조금 먹는 게 어때요?”
“과일 정도면 괜찮겠네요.”
“있어봐. 아빠가 가져올게.”
“네? 제가 갈게요.”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
졸지에 아들은 굶는데 홀로 든든하게 갈비 조림을 먹게 된 이장혁이 빠르게 일어나 과일을 쓸어 담았다.
필요 없어진 젓가락을 고이 내려놓은 도현이 팔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반듯이 앉은 소년을 최진연이 부담스럽지 않게 응시했다.
이도현. 이 소년의 CF를 맡게 된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단순히 이도현이라는 화제성 있는 배우를 모델로 세운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도현은 특별했다. 그가 특출 나게 아름다워서도, 연기에 천재적인 두각을 드러내서도 아니었다. 그의 배경이 세계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소년을 주목하는 게 동양의 작은 나라뿐만 아니라 더 넓은 세계였다. 다른 한국인들이 밟아본 적 없는 길을 당연하다는 듯이 거침없이 가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 소년은 알기나 할까.
그런 인물의 첫 광고의 총연출자가 자신이라는 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도현에게 흥미가 많았다. 아주, 아주 많았다. 어젯밤에는 어떤 인물일지, 성격은 어떨지, 실제로 연기를 보면 뭔가 다를지 궁금해서 생각하느라 느지막이 잠들었다.
“아, 잘 먹을게요.”
도현이 이장혁이 가져온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에는 다양한 과일이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묵직한 무게에 도현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이건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같이 먹으면 되지.”
도현이 접시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며 그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곤 사과 하나를 콕 찍어 오물오물 먹었다.
최진연이 이장혁과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부자는 상당히 닮았는데, 또 아주 다른 것도 같았다. 샅샅이 살펴보면 얼굴에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막상 따로 떼어놓고 보면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감독님도 식사 다 하시면 같이 먹어요.”
“아, 그래요.”
이도현은 대중이 받아들이는 이미지와 아주 흡사했다. 바르고, 단정하고, 성숙하고, 총명하고. 그가 보기엔 온몸으로 ‘나 특별해요’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이 촬영이 끝난 후 그를 다시 카메라를 통해 볼 날이 오긴 할지, 온다면 대체 언제일지 셈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닿으니 그만 애석해지고 말았다.
그는 연차가 쌓인 감독이었고, 광고업계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쌓아온 위치를 불안하게 여긴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독특하고 특별한 소년에 대해서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최진연의 어깨가 미약하게 내려갔다.
애초에 한국에 잘 오지도 않고, 한국에 있는 게 아니면 방송 출연도 다 거절하는 배우였다. 다시 만날 일이나 있으려나.
최진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가 열성적으로 갈비를 씹어 삼켰다.
그러니 결론은 그거였다. 오늘 최대한 열심히 해야겠다는 당연하고도 마땅한 거.
‘어쩔 수 없으니 고생 좀 해라, 이도현.’
그는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수많은 우유를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들었다. 어쩐지 싸한 느낌에 딸기를 찍던 도현이 포크를 삐끗했다.
* * *
점심을 먹고 이동한 곳은 인근의 학교였다. 주말이라 학생들은 없었다. 평소라면 휴일을 맞아 조용했을 학교는 스태프들이 세트장 준비하랴, 보조 출연자들 관리하랴, 상당히 바쁘고 어수선했다.
‘학교에서 촬영을 자주 하네.’
처음 학교에서 찍을 때, 그러니까 를 찍을 당시만 해도 학생인 내가 다른 학교 학생인 척 연기한다는 게 못내 새로웠는데, 지금은 별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감상이라고 한다면 교복을 참 다양하게 입어본다는 거 정도일까. 다만 지금은 체육 시간을 먼저 촬영할 예정이라 하얗고 파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농구 좀 해봤어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도현이 어깨를 움찔했다. 최진연 감독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학교 체육 시간에 해봤어요.”
“그래요? 잘하는 편이에요?”
“…제가 좀, 몸치라서요.”
도현은 스스로가 몸을 쓰는 데 재능이 없음을 인정한 지 오래였다.
“괜찮아요. 골인할 필요 없이, 공을 던지기만 하면 되거든요. 나머지는 편집이 책임져줄 겁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어디론가 향한 최진연 감독은 돌아올 때 손에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그가 공을 내밀자 도현이 받아 들었다.
공을 품에 안고 멀뚱히 서 있자, 최진연 감독이 공을 튀기는 시늉을 했다.
“한번 드리블해 봐요.”
“아, 네.”
도현이 공을 그대로 마루에 떨어트렸다. 바닥에 닿은 공이 탄력을 받아 다시 위로 솟았다. 그걸 한 번, 두 번, 세 번.
데구루루.
세 번 만에 손을 이탈해 도망가는 농구공을 도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음… 세 번, 세 번이네요.”
“…….”
“세 번….”
“…감독님?”
지금 놀리는 건가.
도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최진연이 하하, 사람 좋게 웃었다.
“세 번이면 촬영하기엔 충분합니다. 짧게 들어갈 장면이기도 하고, 끊어서 촬영하면 되니까요.”
“…잠깐, 연습하고 있을게요.”
“세 번도 괜찮다니까요.”
놀리는 게 확실했다.
이런 사람이었나. 초반에 너무 의례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촬영 들어가느라 몰랐는데,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은근히 얄미웠다. 도현은 그에 대한 첫인상을 전면 수정했다.
도현은 세트장 준비가 다 끝날 때까지 구석진 곳에 가서 공을 튀기고 있기로 했다. 이장혁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어 사이사이 바람이 새어서, 도현은 그가 그냥 구경하고 싶은 게 아닌가 하는 합당한 의심이 들었다.
도현이 점잖게 혼자 해보겠다며 나섰다.
통, 통.
데구루루.
통, 통, 통.
데굴.
통, 토옹… 툭.
솟아오르는 걸 포기한 농구공을 쳐다보는 눈빛이 허망했다. 농구공은 바닥이 편한지 마루에 딱 붙어서 도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장혁은 숨쉬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꺽꺽댔다. 어느새 사람들이 도현의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분명 사람을 피해서 구석진 곳으로 왔는데, 왜지.
“도, 도현아. 아빠 생각엔 세 번이면 충분, 한 거 같, 흡!”
“숨부터 쉬세요.”
“헉, 허억.”
주변을 둘러보던 도현이 생수가 가득 놓인 테이블을 발견했다. 그 주변에 서 있던 스태프에게 허락을 구한 후 생수를 하나 들고 와 이장혁에게 내밀었다. 다 죽어가던 그가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저게 뭐가 어려워서 못 하는 거야?”
보조 출연자로 온 아이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닌 거 같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 같았다. 그래서 더 슬퍼졌다.
투욱.
이장혁이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부드러운 낯으로 말했다.
“괜찮아, 도현아. 농구 좀 못할 수도 있지. 대신 넌 다른 걸 잘하잖아.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아빠랑 같이 연습하자.”
퍽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아까 웃느라 고인 수분 탓에 촉촉한 눈빛은 도현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멋대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다들 귀엽게 보니 이대로 웃고 흘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게 있었다.
다른 누군가 괜찮다고 한다고 적당히 타협할 성격이었으면 이렇게 안 살았다. 애초에 라디오나 CF에 출연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도현이 농구공을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맹렬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걸’ 해볼까.
* * *
“거기, 카메라가 돌아가면 저 애가 길을 막을 거예요. 공을 튀기다가 길이 막히면 왼쪽으로 피해요.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그 상태로 골대 앞까지 가서 공을 던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장면은 한 번에 찍지 않고, 공을 튀기는 장면, 길을 막는 장면, 피하는 장면, 골대로 뛰어가서 공을 던지는 장면 나눠서 촬영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확실히 그렇게 쪼개서 촬영하면 아무리 농구에 재능이 없는 도현이더라도 촬영하기 어려울 거 같진 않았다.
그제야 도현은 왜 미리 농구 연습을 해 오라는 고지가 없었는지 깨달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 이건 그냥 내 욕심인가.
마음이 잠깐 흔들렸지만, 금방 그런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욕심 부리면 어때? 더 잘하려는 거잖아.
그는 항상 더 잘하고 싶었다.
항상 그랬다.
* * *
“지시 기억하죠? 그럼 공을 튀기는 장면부터 갑니다. 앞에 학생들은 막는 척만 하면 돼요. 거기, 맨 왼쪽. 그래, 학생이요. 주의 흩트리지 말고 집중해요. 상대가 공을 들고 있는데 한눈팔 정신이 어디 있어요?”
지적받은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최진연이 아이들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시작 사인을 보내자, 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먹잇감을 찾아 활강하는 매처럼 매섭게 빛났다.
도현의 시선을 받은 아이들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몸을 낮췄다. 촬영이란 걸 알고 있는데, 진짜 시합하는 거 같은 긴장감이 체육관 안을 감돌았다.
통, 통, 통.
도현의 손바닥 아래에서 농구공이 튀었다.
‘생각보다 안정적인데?’
아까 연습하는 걸 보니 몇 번은 재촬영해야겠다 싶었는데 지금 드리블하는 모습은 꽤 괜찮았다. 아니, 그림이 나왔다.
‘무대 체질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무대 아래에서는 온갖 실수를 하다가도 무대만 올라가면 눈빛부터 돌아버리는 사람들.
괜찮게 나온 그림에 최진연이 만족하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려던 때였다.
타악.
“!”
도현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도현을 마킹하고 있던 아이가 앞으로 움직이며 팔을 뻗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최진연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저대로 가면 충돌한다. 운이 좋으면 엉덩방아를 찧는 정도겠지만, 최악은 팔다리가 쓸리거나 어디 하나 다치는 경우였다.
그가 좀 더 주의를 주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타닥, 탁.
도현이 유려하게 몸을 틀어 블로킹을 피했다. 어찌나 움직임이 부드러운지, 이게 돌발적인 상황이 아니라 짜인 극본처럼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도현을 막아섰던 아이가 얼이 빠진 눈으로 옆을 지나쳐 가는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조차도 하나의 연출 같았다.
그런 거짓 같은 상황 속에서, 도현이 달렸다.
퉁, 퉁!
손 아래에서 공이 안정적으로 튀었다. 최진연의 턱은 더 내려갈 곳도 없이 내려간 후였다.
‘무대 체질로 설명될 일인가, 이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카메라를 잡았다. 다년간의 반복과 감독으로서의 경험은 그의 손을 착실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농구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도현이 3포인트 라인에 도착해 다리를 굽혔다.
체육관 안의 모두가 도현의 손을 쳐다보았다. 공이 도현의 손을 떠나 둥근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통, 토동.
데구루루.
‘쟤… 대체 뭐야?’
삼 점 슛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