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47)화 (248/582)

제247화. Xmas Movie (25)

촬영장은 침묵, 그 자체였다.

“…이게 되네.”

아니, 네가 왜 놀라?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심정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짧게 감탄하고는 발 앞으로 굴러온 농구공을 들어 품에 안았다. 그 감탄이 너무 단조로워서 사람들은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최진연 감독은 침착하게 영상을 돌렸다. 다행히 손이 일해줘서 모든 과정이 흔들림 없이 찍혔다. 몇 번 영상을 확인해본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차분하게.

“컷…인데.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한 거냐.

“아니, 왜 갑자기….”

왜 갑자기 돌발 행동을 했냐.

“아까는 분명….”

아까는 분명 못하지 않았냐.

…분명 차분하게 입을 뗐는데 생각할수록 황당해서 문장을 제대로 끝마칠 수가 없었다. 뒤에 사라진 문장들을 다 이해했는지, 도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운이 좋았어요.”

“아… 운이 좋아, 아니, 운이 좋은 걸로 그게 될 리가 있나!?”

최진연 감독이 황당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운이 좋아서 공을 세 번 넘게 튀기고, 운이 좋아서 블로킹도 유려하게 피하고, 운이 좋아서 달리면서 드리블을 해내고, 운이 좋아서 3점 슛을 성공시켰다고?

그럼 농구는 죄다 운 좋은 사람들만 모아놓은 팀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이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그걸 대답이라고 한 건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도현이 일부러 촬영 전에 못하는 척을 했다는 가설이었다. 그러나 곧장 반박이 떠올랐다.

그래서 얻는 게 뭔데?

그는 이미 앞날이 유망한 배우였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끌어모을 이유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짧은 시간 동안 봐온 걸로도 그가 그런 성격이 아님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지금 도현의 보호자, 그러니까 이장혁이 잔뜩 놀란 얼굴로 도현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도현아, 너 언제부터 농구를 이렇게 잘했어?!”

그는 진심으로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분명 학교에서도 유일하게 체육 실기 점수가…!”

“…그건 혼자만 알아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제 체육 성적은 어떻게 아세요? 그거 말한 적 없는데….”

도현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이장혁을 쳐다보았다. 이장혁이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최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본인이 운이 좋았다는데 뭐라고 하겠나. 덕분에 좋은 영상을 얻었으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는 소년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꾹꾹 내리눌렀다.

“도현 씨.”

“네, 감독님.”

“장면은 멋있게 나왔는데… 그래도 앞으로는 미리 말해주세요. 하마터면 다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제 심장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아… 죄송해요.”

도현이 순순히 사과해왔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 더 물고 늘어지기도 뭐해서 최진연 감독은 한숨만 삼켰다.

그러다가도 영상이 다시 떠오르자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영상 참 잘 나왔지. 그의 얼굴엔 어느새 흐뭇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평범하진 않았다.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체육관 장면을 모두 찍고 촬영 장소를 옮기는 중이라 도현에게만 휴식 시간이기는 했다.

이리저리 지시하던 최진연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번 눈을 깜빡이며 웃어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도현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 하… 아니, 대체….

최진연 감독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외계 생물이라도 목도한 사람처럼 도현을 보았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삼십 분 정도밖에 필요치 않았다.

처음, 도현이 해낸 기행에 놀란 듯해 보였던 그는 이내 열의에 불타올랐다.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도현에게 아까처럼 해보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통, 토옥.

- 악!

- 아, 미안해요. 괜찮아요?

터엉!

- 공 이 층에 올라갔어! 누가 가서 가져와!

토오… 톡.

- 감독님. 저 공… 혹시 바람이 빠진 건 아닐까요?

총체적 난국이 펼쳐졌다.

감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해줄 말이 없어서 눈만 굴리다가, 딱 한 마디만 했다.

- …그러니까, 아까는 운이 좋았어요.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다만 도현은… 억울했다.

정말 거짓 없이 사실만 말한 거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게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기이하게 보이리란 걸 알아 억울함을 피력하진 않았다.

처음의 시도는 정말 ‘운이 좋았다’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도현은 지구에서, 어쩌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를 느끼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신체적 능력을 향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니콜라스에게 수영을 배울 때 도현은 이 능력으로 수영 실력을 단번에 늘린 전적이 있었다.

본래라면 알지 못할 세상의 순리를 알고, 다루지 못할 기의 흐름을 다룬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시도 외에는 모조리 실패한 이유는….

‘그동안 잊고 살았지.’

누군가는 행운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도현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세계 정복이 탐나는 것도 아니고, 불법적인 일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런 비현실적인 능력이 필요할 리가.

도현은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었다. 이 능력은 불완전한 영혼에서 비롯되었으니, 불완전한 영혼을 타고나 약해졌던 그릇, 육체의 능력을 보완하는 데에만 사용하겠다고.

그 후로 몇 달간은 꾸준히 연습했다. 몸에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촬영을 하고 이런저런 일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소홀해졌고,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즐거운 일들이 많아서 그랬다.

그래서 오랜만에 흐름에 집중하면서도 가능할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그런 마음으로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다.

…딱 한 번만.

그때 감을 잡은 건 정말 운이 좋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봤자 사람들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어디 아프냐고 하면 몰라도.

‘앞으로 다시 꾸준히 해봐야겠네.’

별다른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유용했다. 앞으로 도현이 액션 연기에 도전하게 된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도현 씨! 다음 촬영 들어갑시다!”

“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하루 우유 CF 중 ‘하루 편’ 광고 촬영이 모두 끝났다. ‘학교 편’은 복도를 배경으로 촬영을 해야 했는데, 시간이 늦어져 노을이 비치는 바깥 풍경에 다음 날로 촬영이 미뤄졌다.

도현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학교 편’을 찍으려면 오전 내내 마셨던 우유를 또 마셔야 하는 탓이었다.

“도현아, 저녁은 어떡할래?”

“아무거나… 아니, 담백한 거나 매콤한 거로요.”

속이 느끼했다.

결국 도현의 가족은 촬영의 여파로 느글거리는 음식만 봐도 입을 막는 도현을 위해 해장국집에 가 일인 일 뚝배기를 해치웠다.

조금 기운을 차린 도현은 집으로 돌아가 다음 날 있을 촬영을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시원하게 마셔야 한다며, 다섯 잔째 물을 마시는 도현을 부모님이 말리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 * *

다음 날이 밝았다.

오늘은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도현은 어제 한번 입어서 익숙한 교복을 입고, 스타일링을 마쳤다.

“저, 저기…. 안녕…?”

도현과 엇비슷한 키의 소녀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 보였다. 생머리를 뒤로 넘겨 드러난 흰 얼굴이 어린데도 청순했다. ‘순정만화 여주인공’이라는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외견이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내가 오늘 네 상대역이야!”

“아… 그.”

도현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나도 잘 부탁해!”

소녀, 안영아는 용기 내어 말을 걸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연기 학원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는 하던 소년은 굉장히 친절했으니까!

‘좀 더 무서울 줄 알았는데.’

안영아가 다니는 연기 학원에서 이도현은 거의 다른 종족 취급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이도현의 연기 장면을 보여주며 설명을 위시한 찬탄을 했고, 최근 몇 년 사이, 연기 학원에 들어오는 아이 중 3분의 1은 이도현처럼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 광고 모델 오디션도 아주 치열한 경쟁 끝에 뽑힌 거였다.

안영아는 좀 더 도현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대화 주제를 찾아내려고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아내곤 안색을 밝혔다.

“있잖아, 너 아람이랑 친해?”

“은아람이요?”

“응, 걔!”

아람이는 짧은 촬영을 함께 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뿐이라고 말하기에는 퍽 인상 깊었던 기억이기도 했다.

“촬영 때 많이 친해졌죠.”

“내가 걔랑 같은 학원 출신이거든. 같은 수업 들을 때도 많아!”

“아하…. 우연이네요.”

“그렇지? 신기하다, 그치?”

안영아는 도현의 가벼운 대답에도 박수치며 크게 반응했다. 두 눈에 가득 어린 호감에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아람이에 대해서 떠올린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드라마 촬영 이후 두 사람은 아무런 접점도 없었으니까.

도현은 문득 깨달았다.

‘문제가 잘 해결되었나 보네.’

도현과 만났을 때 아람은 연기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원을 다니는 걸로 보아, 엄마와 문제가 잘 풀린 거 같았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얼굴 위로 올라왔다.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아람이라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나아가고 있을 거 같았다. 마지막에 봤던 결심에 가득 찬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

도현이 안영아를 보았다.

“혹시 괜찮으면, 저랑 리허설 해볼래요?”

“리허설? 좋아!”

안영아가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안영아는 리허설을 하든, 밖에서 뛰어놀든 상관없었다. 그냥 도현과 최대한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지금도 같은 학원에서 온 아이들이 이쪽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안영아는 자신이 비중 있는 역할이고, 도현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녀는 부러 아이들을 의식하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대본 봤어? 나 그거 보고 엄청 웃었잖아. 되게 재밌지 않아?”

“아… 네.”

“근데 네가 하면 잘 어울릴 거 같아!”

칭찬일 텐데 썩 기쁘지 않았다.

도현은 어젯밤에 닳도록 보았던 콘티를 다시 살펴보았다. 몇 번이고 이게 나를 위해 맞춘 거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민에 빠트렸던 콘티였다.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일단 촬영이 우선이었다.

“여기부터 시작해요.”

“좋아!”

이장혁은 처음 보는 아이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이내 같이 연습하기 시작하는 도현을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 *

“먼저 리허설 하고 있었네요. 그럼 따로 리허설 안 하고 바로 촬영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괜찮아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안영아도 씩식하게 대답했다.

“저도요!”

“좋네요. 그럼 촬영은 순서대로 갈 거고, 저쪽에서 도현 씨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찍을 거예요. 도현 씨 모델 런웨이 본 적 있어요?”

“네, 영상으로 본 적 있어요.”

“거기서 모델들이 걷는 것처럼, 당당하게 걸어주면 돼요. 어깨나 허리는 반듯이 펴고요. 나 외의 사람들은 수준 낮아서 상대하지 않는 차가운 도련님 느낌으로….”

말을 하던 최진연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도현을 한번 쓱 눈에 담았다.

“그냥 평소처럼 걸으면 되겠네요.”

“…….”

어제부터 이 사람은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헷갈리게 했다. 도현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가 의아한 낯을 했다.

…차라리 놀리는 거면 좋았을 텐데. 순수한 진심이라는 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내가 그렇게 보이나…?’

도현은 은은한 충격에 빠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