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48)화 (249/582)

제248화. Xmas Movie (26)

복도 끝에서 조명이 쏟아졌다.

복도에 부산스럽게 서 있던 아이들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놀란 얼굴을 했고,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았으며,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옆으로 물러났다는 거였다.

그리고 천천히.

코너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그의 등 뒤로 비치는 조명이 마치 후광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역광에 가려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났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복숭아뼈까지 떨어지는 바지, 먼지 한 톨 없이 각 잡힌 남색의 교복 블레이저, 그리고 조금은 턱을 위로 치켜든 소년.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귀티 나는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마를 덮은 결 좋은 생머리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뚜벅, 뚜벅.

그가 걸어갈 때마다 아이들이 비켜섰다. 눈길을 줄 법한데도 소년은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들이 그렇게 비키는 게 당연하다는 양.

그들을 지나치던 소년이 잠깐 눈을 좌우로 훑고는,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린 후 픽, 가볍게 웃었다.

호수에 비친 자신에게 반했다던 나르시스트의 미소가 그랬을까. 퍽 오만하다 못해 재수 없는 미소였지만, 소년에게 꼭 어울렸다.

“컷! 오케이!”

최진연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푸욱!

도현이 손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괜찮아요?”

“…아뇨,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우울하게 중얼거린 도현이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건 연기다. 정말 이건 연기일 뿐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좀 가시는 기분이었다.

“한번 모니터링해 볼래요?”

“아, 네.”

그리고 화면 속의 자신을 본 도현은 다시 손바닥에 얼굴을 박을 수밖에 없었다. …저 스스로에게 도취한 자기애 과잉이 나라고?

“되게 잘 나왔죠? 저거 눈썹 까딱인 거 생각 못 했는데 되게 괜찮게 나왔어요. 미리 생각해 온 거예요?”

“네… 어젯밤에 조금.”

결국 현실 회피에 실패한 도현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한국 광고라 다행이었다. 친구들이 봤다면 일 년은 두고두고 놀릴 게 분명했다.

‘그래, 친구들이 모르는 게 어디야.’

도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찍어봅시다.”

“후우….”

수치스러운 건 별개의 일이었다.

* * *

최진연 감독은 흥미로운 눈으로 카메라 너머의 피사체를 보았다.

카메라만 꺼지면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면서, 촬영에 들어가면 다 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연예인의 덕목 중 하나인 철면피를 훌륭히 가지고 있었다.

또 웃긴 점이 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거 같지만, 카메라가 꺼졌을 때도 도현이 지나가면 보조 출연자들이 홍해처럼 갈라섰다. 그를 보고 수군수군 떠들어 대기도 했다.

최진연이 보기에 촬영 때는 조명이 좀 들어갔을 뿐, 현실과 그다지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막상 본인은 평소에 누가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자신을 주제로 떠들든 말든, 그가 가는 길에 부자연스럽게 비켜서든 말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연기로 시키니 부끄러워하는 게 웃겼다.

재밌는 건 재밌는 거고, 그걸 티 내면 저 대놓고 눈치 빠른 어린 배우가 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테니 최진연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기술 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바람이 불었다.

학교 복도.

홍해처럼 갈라진 학생들 사이에 서 있는 소년과 소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도현이 우유를 능숙한 손으로 열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삼각형의 입구를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꿀꺽, 꿀꺽.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도현이 팔을 점점 위로 올리며, 남아 있는 한 방울까지 모조리 마셨다. 어제에 이어서 깔끔한 원샷이었다.

‘그걸 또 다 마시네.’

최진연이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외쳤다.

“컷! 오케이!”

그가 도현을 부른 후 물었다.

“도현 씨, 괜찮아요?”

“네?”

“어제 많이 힘들었다면서요. 적당히 세 모금만 마셔도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현의 시선이 이장혁에게 향했다. 그가 말한 적 없으니, 범인은 한 명뿐이었다. 이장혁이 하하, 웃었다. 연기에는 재능이 없는지 상당히 어색했다.

도현이 다시 최진연 감독을 보고는 말했다.

“저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우유가 몸에 좋다고들 하지만, 뭐든 과유불급이었다. 어제도 그렇게 마셨는데 오늘도 과하게 마시다가 탈이라도 날까 걱정됐다.

“진짜 괜찮아요.”

은근히 고집 있다니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흐뭇한 눈빛을 한 최진연이었다.

도현은 그사이 스태프에게 새로운 우유를 건네받고 있었다. 어린데도 벌써부터 완벽주의자의 끼가 보였다.

‘저러니까 성공하는 건가.’

역시 잘난 놈은 새싹부터 다르다며, 최진연 감독이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길고 험난했던 촬영이 끝났다.

우유 네 팩으로 끝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행복했던 부분이었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네, 학교 가야죠.”

“아쉽다….”

그사이 정이 들었는지, 안영아가 아쉬움의 탄식을 뱉었다. 도현이 살짝 웃었다.

“그럼 번호 알려줄 수 있어? 연락하고 지내자! 한국에 오면 같이 놀기도 하고 말이야.”

“제가 핸드폰을 잘 안 봐서요.”

도현이 완곡하게 거절했다. 안영아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리허설을 하며 말했던, 오디션을 보고 당당히 합격했다던 말대로 연기를 잘했다. 타인의 외양에 관심이 없는 도현이 보기에도 연예인에 적합해 보이는 마스크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연기를 좋아하니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었지만….

“어? 왜? 자주 연락 안 해도 돼!”

도현에게 말하면서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다. 안영아는 도현과 친해지기보다는, 도현과 친한 자신을 향한 시선에 관심이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연락하면서까지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도현이 다시금 거절하자 안영아가 실망했다.

도현을 불편한 상황에서 구해준 건 이장혁이었다.

“도현아 감독님이랑 다른 분들한테 인사 다 했어?”

“네, 다 했어요.”

“그럼 이만 가자. 내일 비행기 타려면 푹 쉬어야 하니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광고 촬영을 하기 위해서 출국일을 미뤘다. 그 탓에 개학 주를 통째로 빠지게 되었다. 내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면 화요일이나 수요일에는 학교에 갈 수 있을 터였다.

도현은 미련을 놓지 못하는 안영아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이틀간 신세를 졌던 학교를 나섰다.

짧지만 바빴던 겨울 방학의 끝이 보였다.

* * *

“이거 봐. 기사 올라왔다.”

도현은 서혜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광고 촬영 종료! 이도현 출국일은?]

[배우 이도현, 다시 미국으로?]

“진짜네요….”

광고 촬영이 끝난 건 또 어떻게 안 건지. 이러다가 출국 날짜까지 알아내게 생겼다.

“이러다가 출국할 때 공항에 기자들 와 있는 거 아니야?”

“설마요.”

도현이 가볍게 웃었다.

그가 한국에서 나름 유명하다고는 하나, 기자들이 졸졸 따라붙을 정도는 아니었….

도현의 머리에 발레 학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요.”

도현은 한 번 더 부정했지만, 목소리에는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 * *

“그 설마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서혜나가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출국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와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도현이 나타날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는 거 아닌가.

혹시나 해서 얼굴을 가리고 온 게 다행이었다. 캡모자 같은 걸 쓰면 너무 티가 날까 봐, 키치한 버킷햇을 눌러쓴 채였다. 그 덕에 부모님과 여행을 가는, 신이 난 어린애 정도로 보였다.

서혜나는 얼굴의 반절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이장혁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도 인터넷에 알음알음 사진이 퍼져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인파에 파묻혀 공항 수속을 마쳤다. 검사를 하던 공항 직원이 도현을 발견하고는 놀랐으나, 곧 웃으며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듯이 눈을 찡긋했다.

마지막에는 응원한다며,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 달라는 말까지 했다. 도현은 태연한 척 고맙다고 말했다. 뺨이 붉어진 걸 본 이장혁과 서혜나가 파르르 떨었다.

필요한 수속을 모두 마친 도현과 서혜나가 이장혁을 쳐다보았다. 이장혁이 아쉬움을 삼키며 말했다.

“다음엔 좀 더 길게 보자.”

“당신이 미국으로 와.”

“아무래도 그러려고. 도현이 여름 방학 맞기 전에 한번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장혁의 말에 서혜나가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시원하게 웃었다.

“그 말 지켜야 해?”

“당연하지.”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다음은 도현이었다. 이장혁이 도현의 팔 아래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그대로 도현을 들어 올렸다.

“?!”

도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내려주세요!”

“가벼운 거 봐. 도현아, 너 밥 좀 많이 먹어야겠다. 이러다가 샌디에이고 바닷바람에 날아갈까 봐 무섭네.”

가벼운 편은 맞아도 바닷바람에 낙엽처럼 쓸려 갈 만큼은 아니었다.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이장혁이 도현을 꼭 품에 안았다. 도현은 얼떨결에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잘 지내야 해. 아프지 말고, 친구랑은 사이좋게 지내고. 그렇다고 친구가 화나게 하면 너무 참지는 말고. 연기나 공부나, 뭐든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부담 갖지는 말고 해. 뭐든 즐길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면 좋겠어.”

“그럴게요.”

줄줄 흘러나온 그의 단골 멘트에 얌전히 대답하자, 이장혁이 씩 웃고는 도현을 내려주었다. 발바닥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바닥과 반가운 재회를 하던 도현의 귀에 한 말소리가 잡혔다.

“저기… 이도현 아니야?”

도현이 서혜나의 옷을 살짝 잡아끌었다.

“엄마, 빨리 가요.”

“응? 그래, 그러자.”

서혜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수긍했다. 도현은 이장혁과 가벼운 손 인사를 나눈 후 도현을 의심한 사람이 확신을 얻기 전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무슨 첩보 작전 하는 기분이네.’

비행기 하나 타는데 이렇게 긴장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도현은 이 느낌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그냥 웃었다.

그러고 보면, 형의 공식 귀국일마다 공항에는 인파가 가득 몰렸었다. 나도 언젠가 여기서 더 유명해지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기 위해 몰려들까?

지금으로선 별로 상상되지 않았다. 사실 공항을 어슬렁거리던 몇몇 기자들도 썩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를 봐서 뭐 하려고….’ 정도의 기분.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이해해도 ‘나’라는 사람까지 좋아하는 건 아직 공감하기 힘든 도현이었다.

“도현아, 가자.”

“아, 네.”

두 사람은 비행기에 올라탔다. 자리를 찾아간 도현이 익숙하게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안대를 꺼냈다. 몇 번 타봤다고 완전히 적응해 버렸다.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 쉴 준비를 하던 서혜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번 방학 어땠어?”

도현이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즐거웠어요.”

멀어지는 한국 땅과 함께, 겨울 방학에 안녕을 고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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