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선택과 집중 (1)
친구들보다 조금 늦은 새 학기를 맞이한 도현은 이제 왜 늦게 온 건지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친구들에 약간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가벼운 서운함은 금방 사라졌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들 덕분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과 나름 친한 친구들은 어째선지 ‘네가 그렇지, 뭐’ 하는 초연함을 보인 반면, 도현이 속한 도서 클럽의 아이들과 도사모 아이들은 그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여기서 ‘도사모’란 ‘도서관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모임’의 줄임말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진이 코를 벌렁거리고 다비드가 혀를 차는 등 이상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니콜라스도 모르는 기색이라 안심했다.
아마 둘이 뭐 통하는 게 있나 보지. 둘 사이의 우정 같으면서도 오묘한 기류는 도현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쟤네 대단하다.”
수요일 오후,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교실에서 책상에 볼을 기댄 채 늘어져 있던 니콜라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도현이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어떻게 매번 네가 있는 곳을 찾아오지?”
음.
도현의 시선이 교실 앞문 쪽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무리에게 향했다.
오늘따라 알 수 없는 심각한 기운을 풍기던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 너나 할 것 없이 무해하고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들만큼 해사한 미소를 돌려줄 수가 없었다.
지금 앞문 쪽에서 클럽 모임을 가지는 척하며 이쪽을 자꾸만 흘끔거리는 밴드부 아이들은 도현이 학교에 오고 난 일주일 동안 꼬박꼬박 출석을 찍는 중이었다. 점심시간마다 와서 흘깃거리는 통에 니콜라스가 출석 도장이라도 찍어주는 게 어떻겠냐며 그를 놀려댈 정도였다.
도현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범인은 한 명뿐이지….”
무리의 중심에 있던 진이 도현을 보며 과장되게 싱긋싱긋 웃었다. 그 미소 뒤에 도사린 게 어마어마한 집념과 집요함이라는 걸 아는 도현은 작게 떨었다.
그런 도현을 한심함 반 의아함 반을 담아 쳐다본 니콜라스가 말했다.
“너는 어째 쟤한테는 꼼짝도 못 하냐. 다비드도 아니고.”
“난 너한테도 이래.”
“뭐어… 하긴.”
그가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다른 친구들이 했으면 징그럽다고 질색을 했을 소리지만, 도현은 안 그렇게 생겨서 말을 직설적이거나 간지럽게 할 때가 많아 이미 면역이 된 상태였다.
사실, 어딜 보나 잘난 애가 이렇게 대놓고 편애한다는 티를 팍팍 내니, 은근히 특권 의식이 채워지는 것도 있었다. 특히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아이들에게 관심 한 톨 안 주다가 그들만 보이면 다 제쳐놓고 반길 때 그는 우쭐함을 느끼곤 했다. 죽어도 친구들 앞에서 말하지는 않을 거지만!
니콜라스가 노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수영 클럽에 소속된 이후로 수요일을 제외한 모든 점심시간에 클럽 활동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게 불만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도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평소에 워낙 활동량이 많다 보니 휴식 날과 다름없는 수요일에는 가만히 늘어져 있는 것을 즐겼다. 오늘은 늘어져서 영양가 없는 대화 나누기 외에도 한 가지 활동이 추가되었는데-
“자.”
“아냐, 좀 더 턱 부분이 날카로워야 해.”
“이렇게?”
“흠… 그 정도로 봐줄게.”
니콜라스가 전날에 꾼 꿈에 나온 외계인의 몽타주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니콜라스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난데없이 외계인이 나타나 그를 데려가려고 했다는 꿈 얘기의 결론은 꿈에서 깨어나 화장실에 갔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이었다.
그들이 그 외계인의 몽타주를 그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할 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며 노닥거릴 때였다.
“도현, 잠깐 얘기 좀 하자.”
“어?”
도리가 아니라 도현이었다. 이렇게 부를 때면 진은 꽤 진지한 이야길 꺼내곤 했다. 불안한 시선이 앞문을 향하자, 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밴드 얘기는 맞지만, 대화는 나하고만 할 거야. 애들은 가라고 했어.”
“잠깐, 도현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도현의 주변에서 기출 문제를 풀던 헤더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두 눈에는 탐탁잖은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냥 대화 좀 하려는 건데?”
“오, 그 대화가 지난 일주일뿐만 아니라 방학 전부터 이어졌던 ‘그 대화’는 아니겠지?”
진이 어깨를 으쓱하자 헤더가 손에 쥔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나는 도현을 존중하니까 뭐라 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기억해. 도서 클럽은 너희들을 주시하고 있어. 언제나 듣는 귀와 눈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어느새 뺨을 책상에서 뗀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는 니콜라스와 의뭉스런 눈빛을 교환하는 진과 헤더에 도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늦은 개학 이래로 도서 클럽과 밴드 클럽은 경쟁 중이었다. 다름 아닌 도현을 주제로!
시작은, 점심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클럽 활동을 하는 도현을 밴드 멤버들이 찾아오면서부터였다. 정확히는 눈앞에서 자신들의 클럽 멤버를 뺏어가려는 파렴치한 행위에 분노한 부원들이 사서 선생님께 ‘저 아이들이 시끄러워서 책을 읽기 힘드니 쫓아내 달라’라고 말한 후부터였다.
귀신같은 눈치의 진은 그 공작의 뒤에 도서 클럽이 있다는 걸 알아챘고 그때부터 전쟁이었다. 도현은 초반에 그들을 말리다가 며칠 안 가 포기했는데, 도서 클럽, 밴드 클럽 할 것 없이 이 상황을 매우 즐기고 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가운데서 말라비틀어지는 건 도현뿐이었다.
그래, 너희들이 즐거우면 됐지.
저 한 명의 해탈로 인해 다수의 인물이 행복해하니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상당한 이득이었다. 도현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서 어디서 이야기할 거야?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까?”
“아니야. 생각해보니 여기서 하는 편이 낫겠어. 사실 니키한테도 하고 싶었던 말이거든.”
“나?”
관전 모드에 빠져 있던 니콜라스가 갑자기 호명된 제 이름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진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더는 궁금한 것 같았으나, 엿들을 생각은 없는지 대충 검지와 중지로 제 눈과 진의 눈을 번갈아 가리키며 경고를 보낸 후 창가에 모여 앉아 떠드는 친구들에게로 갔다.
이 전쟁놀이에 누구보다 심취해 있는 진은 헤더를 향해 가소롭다는 미소를 날려주곤 방금까지 헤더가 앉아 있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니콜라스가 의자를 조금 당겨 앉으며 물었다.
“무슨 얘긴데?”
“일단 미리 말해둘게. 우리 밴드 클럽은 방학 동안 한 가지 규제를 걸어두었어. 개학하면 미국으로 돌아온 너를 섭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일주일이 지나도록 넘어오지 않으면 네 의견을 수용하기로 말이야.”
조금 날렵한 눈매가 둥글게 떠졌다. 잠깐 놀란 듯했던 도현은 이내 이해했다는 듯이 ‘아’ 하는 감탄사를 내었다.
도현이 아는 진은 카리스마 있고 불도저 같은 행동력을 가졌지만, 동시에 나이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타인을 세심하게 신경 썼다. 그게 바로 진의 인기의 비결이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의 행적은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무섭도록 일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평소와 같았으나, 그 과정에서 도현의 입장은 넘어갔다는 부분이었다.
‘나를 밴드부 멤버로 들이겠다는 집념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면 방학에 기습적으로 도망친 걸 눈치챘거나.’
후자는 정말 최악이었다. 진이 도망을 눈치채지 못한 건 정말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진은 도현을 아꼈지만, 그렇다고 하얀 천사 같지는 않았으니까. 한 마리 비글이면 모를까. 도현은 남몰래 숨을 돌리며 탄식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군 거구나.
화장실 앞에서 방긋 웃고 있는 진을 마주했던 순간의 소름은 이제 좀 잊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냐, 그래도 그건 좀 그런 거 같기도….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오늘이 네가 학교에 온 지 정확히 일주일째지.”
진의 말에 왜인지 오늘따라 심각해 보였던 얼굴들을 상기했다. 또 어떤 일을 꾸미는가 싶어서 불안했는데 그런 이유였다니. 조금은 그들이 귀여워져 속으로 웃었다.
듣고 있던 니콜라스가 투덜거렸다.
“그래서 나는 왜 필요한 건데?”
“계속 들어봐, 니키. 나는 지난 방학 동안, 그래, 네가 한국에 있었던 시간 말이야. 그 시간 동안 매일같이 밴드 클럽 활동을 했어. 그리고 내가 이 활동을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너는 악기 연주하는 걸 좋아하니까. 기타도 잘 치고.”
“맞아.”
도현의 말에 긍정한 진이 살짝 웃더니, 아주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난 너희 둘이 너무 부러웠어.”
“뭐? 네가 날?”
니콜라스는 진심으로 놀라 되물었다. 진은 대답 대신 질문을 돌려주었다.
“너는 앞으로도 계속 수영할 거지?”
“당연하지.”
“너는 앞으로도 계속 연기할 거고?”
“응.”
“이게 부러웠어.”
진은 아직 그날을 기억했다.
도현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 도현을 따라 간 촬영장에서 누가 봐도 넋을 놓을 만치 반짝거리던 도현. 그리고 그에 자극받아 뜨겁게 타오르던 니콜라스.
태울 것이 없던 진은 부러움과 초조함을 느꼈다. 친구들은 벌써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데 나는 내 발 앞만 쳐다보는 느낌. 또래보다 늘 앞서 있는 게 익숙했던 소녀에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에 그랬다는 소리였다.
“나는 아직 내일 뭐 할지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너희들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거 같으니까, 뒤처지는 느낌에 조금 우울하기도 했고… 뭐, 수행 평가 이후 달라졌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이제 나도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안다는 게 중요하지. 짐작하는 얼굴이네. 사실 뻔하긴 해. 맞아, 난 밴드를 하고 싶어.”
처음에는 충동이었다. 영화에 나온 캐시 와일드가 너무 멋있어서 동경하는 감정이 제일 컸다. 뭐에 홀린 듯이 사람을 모으고 밴드 클럽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밴드 클럽 활동은 생각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지난 방학 동안 진은 이 즐거움이 영화의 여운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감정일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타오를 불씨일지 고민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다음 날 무슨 곡을 노래할지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결론지었다.
이건 내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다고!
그때의 멋진 기분을 상기하며 말했다.
“그래서 거기에 네가 함께하길 원했어. 네가 수준급의 실력자라는 게 고려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거 말고도 너와 같이하고 싶은 이유는 많거든. 네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라는 것도 그렇고… 너는 연주도 음악도 좋아하잖아.”
좋은 거 더하기 좋은 거는 아주 좋은 거라는 단순한 논리였다.
“하지만 널 곤란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 마지막으로 물을게. 여기에 대답해주면 다시 너를 조르거나 회유할 일은 없을 거야. 이건 부원들이 모두 동의한 내용이야. 우리도 이제 널 따라다니는 걸 그만두고 활동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역시 밴드 클럽 정식 활동은 도리토스 스토킹하기였나.”
니콜라스의 중얼거림을 깔끔히 무시한 진이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
“밴드부에 들어올 생각 있어?”
* * *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돼.”
“무슨 대화를 한 거야?”
방과 후, 올림피아드 교실.
도현을 삼십 초 간격으로 힐긋거리던 헤더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말을 뱉었다.
“대화?”
“아까, 점심시간에 진이랑 한 거.”
“아, 그거.”
말투가 꽤 긍정적이라 헤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도서 클럽을 떠나려는 건….
“밴드 클럽엔 안 들어가.”
“오.”
“진도 더는 권유하지 않겠다고 했어.”
“아?”
도현은 진의 시원섭섭한 표정을 떠올렸다. 서운한 눈치면서, 동시에 반쯤 예상했단 얼굴이었다. 워낙 대쪽같이 거절해왔던 도현이었기에 당연한 걸 수도 있었다.
뒤늦게 이해한 헤더의 안색이 환해졌다.
“진짜!?”
“응.”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헤더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헤더의 얼굴에 승리감이 퍼져 나갔다.
“아주 잘했어!”
헤더가 넉넉한 표정으로 도현의 팔을 두들겼다. 도현은 그렇게 호탕한 헤더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마치 전쟁에서 이긴 장군 같았다.
‘이쪽도 만만치 않게 즐겼나 보네….’
“역시, 나는 너라면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어. 우리 부원들도 다 너를 믿고 있었다고.”
“하하….”
사실 흔들렸다.
도현이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웃었다. 헤더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를 장한 아들 보는 시선으로 보았다.
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도현은 연주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했다. 그리고 진도 좋아했다. 도현이 마음에 걸려 하는 건 바이올린뿐이었으니, 지난 배역의 경험을 한껏 살려 드럼 포지션으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았을 터였다.
아마 도서 클럽에 들지 않았거나, 수학 올림피아드 반에 임시로 소속되지 않았더라면 분명 진의 부탁에 이기지 못해 그렇게 되었겠지. 도현은 자신을 잘 알았다.
그리고 진도 잘 알았다.
마지막이라고 말했을 때.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도현은 한껏 당황한 상태였다. 그녀가 마지막이란 말을 쉬이 꺼내지 않는단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생각으로 범람했다.
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러면? 진이 나에게 실망할까? 혹시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그런 생각에 사정없이 흔들려 버렸다.
그리고 진의 눈을 보았다. 확신을 담아 일렁이는 금갈색 눈동자에, 도현은 힘이 탁 풀렸다.
아니, 진은 그러지 않을 거야.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우정이고 믿음이었다. 도현은 다른 이들이 의아해할 만큼 언제나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 그들이 가장 행복할 선택지를 고르지만-
“밴드부 애들이 잔뜩 약 올랐겠네.”
“서운해 보이긴 하더라. 그래도 이해해주는 거 같았어.”
그건 도현이 그들에게 버려질까 두려워서, 그들이 변할까 무서워서 덜덜 떨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친애하는 이들이 좀 더 즐겁길 바라는 순수한 호의였다. 설사 다른 감정이 채 사라지지 못한 채 끼어 있더라도, 그가 언제까지나 온전한 것들만이 전부로 남도록 만들 것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 도서부 애들이 책으로 레드 카펫을 만들지도 몰라.”
“그건 진짜 실현될까 봐 두렵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해줄 수 있어!”
“정중하게 사양할게.”
도현은 헤더와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문제는 다 풀고 떠드는 거냐는 해리 선생님의 일침에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금방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와서 결과적으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