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50)화 (251/582)

제250화. 선택과 집중 (2)

촤악-

“몇 초 나왔어?!”

물속에서 불쑥 올라온 니콜라스가 물안경을 벗으며 외쳤다. 도현이 손에 들린 타이머를 확인하고는 살짝 뜸을 들였다. 니콜라스가 안달했다.

“아, 빨리 말해줘!”

“안타깝지만, 27.31초야.”

“아아악!”

첨벙! 첨벙!

발광하는 니콜라스의 몸짓에 따라 물이 사정없이 튀었다. 도현은 익숙하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철퍽.

물 밖으로 기어 나온 니콜라스가 바닥에 엎어졌다. 아까부터 미친 사람처럼 수영만 해서 그렇지, 지금이면 지칠 때가 맞았다. 도현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쟨 또 그러냐?”

“네.”

“이번엔 몇 초 나왔길래?”

“27.31초요.”

“전보다 단축됐네? 저번 주만 해도 27.5에서 넘어가질 못했는데….”

델마 아카데미 수영부의 코치, 알랜도 월터가 흥미로운 눈으로 니콜라스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50m 27초면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프로 선수권에서 수상하기엔 한참 부족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니콜라스 가비가 겨우 4학년이라는 사실이었다.

알랜도가 자신을 흥미롭다 못해 갓 잡은 사냥감을 보는 흡족한 시선으로 보든 말든, 니콜라스는 절망적인 낯으로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은색 수영모를 쓰고 바닥에 얼굴만 비벼대는 모습이 어부가 건져 올린 은갈치 같았지만 도현은 현명하게 감상을 숨기고 니콜라스를 위로했다.

“저번 주보다는 잘 나왔잖아. 그리고 니키, 네 주 종목은 애초에 50m가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해.”

니콜라스는 넓은 바다에서 수영을 해왔던 버릇 덕인지 체력 분배나 장거리 수영에 아주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50m 같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서 강세를 보였고, 가장 성적이 좋은 종목은 400m였다. 아직 어리고 신체가 단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중에는 더 긴 거리도 충분히 그의 강점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니콜라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너는 무슨 연기든 잘하잖아.”

“…연기랑 수영은 좀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치면 나도 카메라 연기가 아니라 연극이나 뮤지컬은 잘 못할걸…?”

“아냐…. 넌 잘해.”

“아냐, 나도 못해.”

“넌 잘한다니까?”

“못한다니까?”

“아, 잘한다고!”

도현이 버럭 성을 내는 니콜라스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던 니콜라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갑자기 다시 우울 모드로 돌아간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미안… 내가 괜히 성질냈어. 맞아, 너 못해.”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별로였다.

묘한 낯을 한 도현이 니콜라스를 응시하다가, 알랜도 코치에게 양해를 구해 수첩 하나를 가져왔다. 학생들의 기록을 적어놓은 수첩이었다.

“이거 봐, 니키.”

“왜… 오, 절망적인 숫자를 내 눈앞에 굳이 들이밀지 않아도 내가 한심하다는 건 알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봐봐. 날짜가 지날수록 계속해서 시간이 단축되고 있잖아. 첫날에 비교하면 2초나 줄었고! 이건 정말 엄청난 거야.”

“…정말 그럴까?”

“당연하지!”

머뭇거리는 음색으로 물어오는 니콜라스에 도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긍정했다. 니콜라스의 퀭한 낯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넌 다음 주면 지금보다 더 빨라져 있을 거고, 그다음 주면 또 다른 신기록을 내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어.”

“…그래. 뭐든 단번에 되는 일은 없어!”

“그래, 그거야!”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니콜라스를 도현이 팔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니콜라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이스 테일러 개자식, 그 기록은 내가 금방 넘어버릴 거야! 두고 보라지!”

잘한다, 잘한다 하며 박수 쳐주는 도현에 완전히 의지를 회복한 니콜라스가 연습을 해야겠다며 목덜미에 매달려 있던 물안경을 도로 끼고는 물에 입수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도현은 그대로 물방울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도현은 얼굴에 튄 물기를 닦아내며 수첩을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그를 본 알랜도가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매니저, 고생이 많네.”

“하하… 매니저 아닙니다.”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알랜도는 사람이 웃으며 정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현의 얼굴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진짜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거참, 일 잘하던데.’

아쉬움에 알랜도가 코를 찡긋했다.

도현은 나긋하지만 단호한 낯으로 수첩을 돌려주고선 타이머를 들고 니콜라스에게로 향했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걸 깨닫고 회의감이 들었다. 매니저가 아니라고 부정한 게 무색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이 주 전.

델마 아카데미 수영부가 타 학교와 친선 경기를 펼치면서부터였다. 놀랍게도 상대 학교에는 여름 수영 캠프에서 번번이 마주쳤던 제이스 테일러가 있었고, 니콜라스는 50m 경기에 나가 2등을 차지했다. 1등은 제이스 테일러였다.

그때부터 니콜라스의 분노와 우울이 시작되었다. 니콜라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침울해졌고,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모습에 결국 도현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 소식에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한 편이던 알랜도 코치는 쌍수를 들며 그를 반겼다. 다른 아이들도 봐줘야 하는데, 가려고 할 때마다 니콜라스가 집착 어린 낯으로 ‘코치님, 어디 가세요?’를 시전하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현은 클럽이나 별다른 활동이 없는 요일에는 니콜라스의 기록을 재는 걸 도와주게 되었다.

도현은 해탈한 심정으로 타이머를 다시 0으로 맞췄다. 그렇다고 이렇게 되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지. 어쩌겠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도현이 생각했다. 어차피 이런 시간이 그리 길어지지는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 * *

“또 니키 도와주고 왔어?”

“응.”

“그 물 망아지. 그냥 혼자 하게 냅두지.”

한심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진에 도현은 말없이 웃었다. 저렇게 말하면서도, 니콜라스가 한창 우울에 잠겨 있을 때 어쩔 줄 몰라 걱정했던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 달만 도와줄 거야. 다음 달엔 나도 시험 준비해야 하니까.”

도현은 거의 모든 일을 알아서 잘했기 때문에, 진은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도 니콜라스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현이 그것 때문에 무리하는 걸까 봐 걱정된 거뿐이었지.

진이 괜히 농담 삼아 말을 건넸다.

“그러다가 또 일 생기는 거 아니야? 작품 들어온다든가?”

“응? 그럴 리가. 매독스도 한동안 쉬라고 그랬고.”

도현이 가볍게 부정하며 웃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지이잉.

[새디 로스 : 안녕! 줄리!]

그 생각을 전면 철회해야 했다.

* * *

- 오랜만이야, 줄리!

“새디. 나도 오랜만….”

- 로즈.

“그래, 로즈. 오랜만이야.”

- 네가 나온 영화 잘 봤어! 내가 SNS에도 올렸는데, 그거 봤니?

“응. 기사로 나온 거 봤어.”

- 정말? 봤으면 댓글이라도 남기지! 헉, 혹시 남겼는데 내가 못 발견한 거 아니지?

“아니야. 내가 SNS를 안 하거든.”

- 세상에, 너 유니콘이구나.

줄리에 이어서 유니콘까지. 도현은 그냥 포기하고 웃었다.

- 내 친구들한테 말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내 친구들은 다 오늘 저녁에 뭐 먹었는지까지 SNS에 올리지 않으면 죽는 줄 아는 애들이거든! 물론 나도 그렇고 말이야!

웃는 목소리가 활기찼다. 도현은 뭐라 대답할지 몰라 따라 웃었다. 그는 그동안 경험상 할 말이 없으면 웃는 게 제일 좋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였다.

- 아, 참. 그럼 이번에 만나면 내가 SNS 계정 만드는 걸 도와줄까?

“아니, 나는 괜찮아.”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잠깐만, 새디.”

- 로즈.

“로즈.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게 되니?”

그냥 나중에 보자는 의례상의 언급으로 지나칠 수 있었지만, 도현은 그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면 이렇게 갑자기 전화할 리가 없으니까.

- 오, 바로 알아채네.

조금 신기함이 묻어난 어투였다.

- 이건 비밀이야. 알았지? 너한테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몰래 연락한 거란 말이야.

“난 한 번도 비밀을 발설한 적이 없어.”

- 다른 애라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줄리, 네가 말하니까 정말 그런 거 같다. 좋아, 말해줄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야!

긴장감을 조성하는 새디에 도현이 숨을 죽이며 집중했다. 마침내 새디가 말했다.

- 곧 디에나한테서 연락이 갈 거야.

“디에나 도슨 감독님?”

- 응! 물론 줄리, 너한테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네 밴드한테 연락이 모두 갈 거란 뜻이야!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괴짜들이 다시 모일 일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 * *

새디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새디에게 전화가 온 바로 다음 날 오스카가 찾아왔다.

잔뜩 기대감에 젖은 눈을 하던 그는 도현이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자 맥 빠지는 얼굴을 했다.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놀랐어요.”

“그게?”

그게 놀란 얼굴이냐는 듯,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도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 원래 놀라면 이런 표정이에요.”

사실 전날에 새디에게 들어서 안 놀란 게 맞았지만,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

“무슨 헛소리냐고 하고 싶은데 너라면 정말 그럴 거 같다….”

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대체 자신을 무어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들었다면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을 생각을 한 도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괴짜들 멤버 모두가 출연한다는 거죠?”

“응. 그런데 네가 저번에 출연했던 거랑은 좀 느낌이 달라. 그때는 한 회 차 전반에 걸쳐 등장했잖아. 한 회만 등장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에피소드의 주인공에 가까웠지?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로 ‘특별 출연’이라는 느낌이거든. 일단 이거 볼래?”

도현은 오스카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오스카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괴짜들 멤버가 등장하는 건 에피소드의 끝자락. 마지막 대회 장면에서뿐이었다.

에피소드의 시작은, 배우를 꿈꾸는 매그가 오디션에 합격했다가 유명한 가수에게 밀려 불합리하게 배역에서 떨어지면서부터였다.

매그는 몇 날 며칠을 울며 슬퍼했다. 그에 자매들은 매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가 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스타를 발굴한다는 전단지였다.

조는 곧바로 자매와 로리의 이름을 올려 참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폐인이 된 매그를 억지로 끌고 왔다. 자신은 배우가 되고 싶은데 밴드를 뽑는 대회에는 왜 나가야 하냐며 항변하는 매그에게 그 가수는 그럼 배우라서 네 자리를 차지했냐며 따끔한 일침을 놓고는, 일단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지는 게 우선이라고 목표를 세운다.

그렇게 자매들과 로리는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학교에서 한 가지 소문을 듣는다. 그 대회에 유력 우승 후보가 있단 소리였다.

그리고 그 유력 우승 후보가 바로 의 괴짜들이었다.

“정말 오스카의 말대로네요.”

마치가 자매들이 유력 우승 후보와 마주치는 건 대회에서였다. 대회에서 몇 가지 사건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저번의 ‘유진’에 비하면 상당히 가벼운 등장이었다.

말하자면, 정말 ‘이벤트성 출연’이라는 느낌일까.

“듣기로는 이게 원래 있던 에피소드라고 하더라. 그런데 지금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아니고, 좀 더 나중에 예정되어 있던 건데… 이 나오고 영화 반응도 꽤 괜찮은 데다가 이전에 출연했던 너도 거기에 껴 있으니까 에피소드 순서를 바꿔서 조금만 수정했나 봐.”

유력 우승 후보만 괴짜들로 바꾸었다는 소리였다.

의 저력을 생각해볼 때, 영화 속 밴드가 아니라 실제 인기 밴드를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도현은 조금 의아했지만, 사실 자신에게는 잘된 일이라서 의문을 덮어두었다.

“그래서 어때? 출연하고 싶어?”

“다른 애들이 출연할까요?”

“아마 그러지 않을까? 아, 출연하게 되면 공연해야 해. 이와 관련해서 영화사 측에서는 동의했고.”

동의하다뿐일까. 도현은 왠지 화색을 밝히며 즐거워했을 스티브 로이 감독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잠깐의 침묵 후.

“전 출연하고 싶어요.”

도현이 가볍게 결정했다. 사실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오스카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