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선택과 집중 (5)
마지막 장면까지 촬영이 모두 끝났다.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
루카는 이 정신 나간 시트콤이 마음에 쏙 들다 못해 매료되기까지 했다. 그녀가 새디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새디, 나는 지금 무척 반성 중이야. 지금까지 내가 충분히 말썽꾸러기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거든! 나는 집에 돌아가면 당장 달력을 꺼내서 엉망진창의 날을 지정하고, 그날엔 집에 친구들을 불러서 정신이 나가도록 놀 거야!”
“파티 초대 목록에 혹시 새디 로스도 있니?”
당연한 소리였다. 금발을 돌돌 만 이 소녀는 새침한 인상과 달리 상당히 유쾌했고, 유명한 시트콤의 주연이었으며, 자신과 같은 할리우드 틴에이저였다. 루카는 그녀를 마다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설마 안 올 생각이었니?”
“오, 설마!”
두 사람은 꺄르륵 웃었다. 자신의 친구도 불러도 되냐는 새디의 말에 그럼 내 친구도 소개해 주겠다며 흔쾌히 말하기도 했다.
“저기 있는 네 친구들도 부를 거니?”
“아-니. 너만큼 마음에 드는 애는 없어.”
“정말? 영광이긴 한데, 줄리도 초대하지 않을 생각이야?”
“줄리?”
“애칭이야. 줄리!”
새디가 고개를 홱 틀며 크게 부르자 멀리서 누군가 반응했다. 상대를 확인한 루카의 미간이 좁아졌다.
“쟤는 초대하지 않을 거야.”
“그래? 아쉽다. 나는 네가 줄리랑 친할 줄 알았어. 둘 다 좀, 음, 그러니까 눈에 띄는 타입이잖아.”
정확히 그런 이유로 친해지고자 들이댔다가 거하게 차인 루카가 비스듬히 웃었다. 긍정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여자애만 불러서 놀 거야. 그게 더 재밌을 거 같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남자애들은 가끔 좀 바보 같거든.”
새디는 금방 그 말에 동의하며 웃었다. 루카는 처음 이 시트콤 특별 출연 제안이 왔을 때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으나, 웃는 새디의 얼굴을 보니 오기로 한 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회장은 파장 분위기였다. 루카와 새디도 느적느적 옷을 갈아입고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 후 인사를 하러 돌아다녔는데, 루카는 그 과정에서 검은 머리통이 시야에 비칠 때마다 자동적으로 부릅 떠지는 눈에 힘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루카는 자신이 쿨하지 못하게 저 애를 아직도 신경 쓴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그런 식으로 사람한테 엿을 주었으면서 다 잊은 사람처럼 얌전한 낯을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그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마지막으로 디에나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의외로 그녀가 아빠와 친분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습득하고 돌아서는 순간.
“안녕, 루카. 잠깐 시간 있을까?”
하루 내내 최대한 귀를 닫아두려고 노력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거슬렸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못 들은 척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남자애가 다시금 말했다.
“루카, 괜찮다면 대화 좀 하자.”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렇게 꼬투리를 잡는 건 너무 찌질한 행동이었다. 두 번 말한 이상 무시하고 가는 것도 도망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알겠다고 말을….
“내가 왜?”
루카가 눈썹을 꿈틀했다. 이러면 꼭 지난 일을 엄청나게 신경 쓰는 거 같아 보이지 않는가! 불퉁하게 나온 말투가 괜히 어리광을 부리는 애 같아서 열이 올랐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대방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되레 난감한 얼굴이 되어 머뭇거렸다. 비웃기라도 했으면 주먹을 날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에 루카는 부끄러움을 싹 지웠다.
“네게 할 말이 있어.”
당연히 할 말이 있으니까 말을 걸었겠지. 그건 정말 멍청한 대답이었다고 이죽거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도현은 풀 죽은 얼굴로 소심하게 덧붙였다.
“내가 달갑지 않은 건 알아. 그래도 오늘이 지나면 너와 내가 다시 마주할 날이 언제가 될지 몰라서… 지금 너와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번엔 좀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도현이 제이 로빈마냥 소심하게 구는 게 루카의 마음에 들었다. 루카는 관대한 마음으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오래 걸릴까? 그러면 매니저한테 말해야 하거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잠깐… 저쪽이 조용할 거 같은데.”
루카가 승낙하자 도현이 특유의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은은하고 가식적인 낯에 루카는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두 사람은 정리가 끝난 무대 뒤편으로 갔다. 그 둘을 본 새디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려고 했지만, 콜린과 브레디, 주디스가 쩔쩔매며 막아섰다.
루카가 삐딱하게 서서 그를 보았다.
“그래서, 왜?”
말투가 썩 전투적이었지만 루카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로 도현이 그녀를 비웃거나 하지 않는단 걸 터득해서였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너에게 말하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야. 네겐 너무나 갑작스럽고,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일 테니까.”
내가 왜 그딴 걸 궁금해할 거라고 확신하냐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궁금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루카는 조용히 눈으로만 쏘아보았다.
살짝 아래를 향한 시선 탓에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깊은 음영이 어딘가 우수에 차 보여서 들어나 보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때… 음, 그러니까 내가 너를 피하기 시작했을 때 말하는 거야. 그때 내가 이상하게 굴었잖아. 사실 내가 개인적인 문제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부모님과 모두 같이 사는 게 아니잖아. 정확히는 엄마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아빠는 한국에 계시지. 그리고 그때의 나는 내 거주지 문제로 고민 중이었어. 부모님이 그렇게 따로 떨어져 사는 건 전적으로 나 때문이거든.”
이제 피했던 걸 인정하는 거냐고 빈정거리려던 루카는 이어서 나오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문제에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한국에 가는 게 맞는데 내 모든 게 여기 있으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고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어서 조금 생각이 많았어.”
상대는 ‘조금’이라고 말했으나 정작 옆에서 봐왔던 루카는 그게 조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주디스와 대화할 때 그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벅차서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온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어. 나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고, 너와 있을수록 그게 더 크게 느껴졌거든. 넌… 항상 자신감이 가득했으니까.”
루카가 미간을 좁혔고 도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랑 가까워지고, 너에 대해서 더 많이 알수록 더 그랬어. 난 그 감정을 받아들일 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네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았어. 그래서 널 피한 거야.”
쟤는 말도 참 자기처럼 했다. 빙빙 돌려 말한 말의 요지를 간신히 파악했다. 그러니까 루카와 자신이 비교되어서 피했다는 소리였다.
이쯤 되자 루카는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 자신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을 거란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도현에게 그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주절거렸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게 싫었으면 말을 하면 됐잖아.
루카가 눈가를 찡그렸다. 물론 내가 좀 재수 없게 보였을지 모르고, 실제로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쳐도- 무엇 때문에 힘든지, 그리고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건 도현이었다.
그러니 전적으로 그의 탓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카는 뺨이 조금 느슨하게 풀리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문제의 그날, 주디스와 도현의 대화를 엿들은 날. 루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모멸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가 하는 말은 꼭, 그는 루카에게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없는데 루카만 그에게 눈치 없이 달라붙었고, 그게 아주 귀찮고 짜증 났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피해망상적 태도가 아니라 그의 말투나 말의 내용, 모든 것이 그걸 가리켰다. 루카는 제 생각을 확신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루카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자신이 그저 귀찮은 거머리 하나가 아니었고, 그에게 꽤 큰 의미로 작용했다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자신만 그렇게 안달복달한 게 아니란 소리였으니까. 금이 간 자존심이 조금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지금처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됐잖아. 왜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야?”
말했다면 이해했을 터였고, 사이가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도 않았을 거였다. 일어날 수 없는 과거에 아쉬움을 느끼며 너그러워진 목소리로 말하자, 도현이 망설이며 물었다.
“그걸 꼭 알아야 할까?”
루카는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지만 쓸데없이 말간 눈동자는 진지했다.
루카는 참았다.
네가 말하겠다고 날 불러낸 거 아니었냐고, 지금 내가 말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 거냐며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아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아빠, 아빠 딸은 천사가 맞았나 봐. 맨날 온갖 달콤한 호칭-스윗하트, 엔젤, 허니-등등으로 부르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사실 아빠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나를 화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
그걸 바라는 건 아닌 모양인지, 도현이 옅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거의 반쯤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너랑 친해지고 싶지 않았어.”
어딘가 데자뷔가 느껴졌다.
그게 주디스에게 했던 발언 ‘네 말대로 루카를 싫어하지는 않아. 그냥, 가까워지고 싶지 않을 뿐이야.’의 두 번째 버전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얼마나 어이가 없고 황당하고 기가 막혔으면 대사를 토씨 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나와 더 친해지고 싶지 않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소리지?”
“그게… 그렇게까진….”
얼추 맞단 소리였다.
루카는 그를 닦달해 말을 토해내게 한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지금 저 낯짝에 주먹을 날리면 아빠가 수습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왜?”
“왜냐니…?”
“내가 뭐 어때서? 너,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얼마나 인기 많고 유명한지도? 대체 나랑 왜 친해지기 싫은데? 그 망할 자격지심 때문에?”
콕 집어 말한 것에 검은 눈동자가 떨렸다. 루카는 그게 찔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상처받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설명하기 어려워. 내가 좀 생각이 많아서 그래.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니까 네게 원인이 있지는 않아.”
“하, 처음부터.”
이젠 기가 차서 웃기지도 않았다. 루카는 허무해졌다. 얘를 데리고 뭐 하는 거지. 그냥 내가 처음부터 싫었다는 놈인데. 그에게 열을 낸 게 아주 허탈하게 느껴졌다.
루카의 얼굴에 피로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오 분 사이에 오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그래봤자 열여섯이겠지만.
그녀는 그만 이 무의미하고 양쪽에 상처만 남는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게 다야?”
“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냐고.”
사과는?
생략된 말을 읽었는지, 도현이 눈을 깜빡이다가 아, 하고는 말했다.
“사과는 네가 바라지 않잖아.”
“뭐?”
“마리가, 아, 마리는 내 상담 선생님이야. 아무튼 그녀가 사과를 바라지 않는 상대에게 하는 사과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했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상담이 필요한 정신 상태라는 걸 아웃팅한 것도 어이없었고, 지 마음대로 사과를 받고 싶은지 받기 싫은지 판단하는 건 더 기가 막혔다.
대체 어떤 사고를 거치면 저런 헛소릴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루카는 그에게 가졌던 인상을 전면 수정했다. 쟨 그냥 미친놈이었다. 너무 조용하게 미쳐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인!
“그리고 난 내가 너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이유를 전부 설명해줄 수 없거든. 무언갈 감추면서 사과하는 건 자기만족에 불과하고.”
아주 지혜롭고 잘나신 이도현께서 주절주절 떠들고 계셨다. 루카는 얘가 솔직한 건지, 아니면 비밀이 많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루카가 웃었다.
그리고.
“루, 루카가 정신이 나갔어요!”
“으악! 얘들아! 미쳤니!”
“애꿎은 샐러리는 왜 던지는 거야! 헉, 케이크는 안 돼! 막아! 막아!”
“루카! 진정해! 루카? 루카?!”
한번 해보자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성질을 긁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한 역사가 없었다. 순식간에 스튜디오가 난리가 났다.
이제 막 정리를 끝낸 공간이 다시 엉망이 된 걸 보며 스태프들이 눈물을 삼키며 망할 망아지들을 말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