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54)화 (255/582)

제254화. 선택과 집중 (6)

“…대체.”

디에나가 할 말이 많은 눈으로 그들을 보았지만 결국 입만 뻐끔거리고 말았다. 그녀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내 잘못이지. 어린애들을 부르면서 이런 일이 생길 거란 걸 생각도 못 한 내 잘못이지….”

그녀가 착잡한 눈으로 두 소년 소녀를 보았다. 둘 다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는 거 같아 다행이긴 했지만… 아니 이런 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슬펐다.

그녀는 잠깐의 자기 연민을 마치고 상황을 정리했다. 사실 할리우드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온갖 사건 사고를 겪는 법이었다. 이 정도면 사고치고 얌전한 편이긴 했다.

적어도 모든 촬영이 끝난 후에 일어났으며, 공격한 사람이 남자애가 아닌 여자애고-어린애들은 별로 차이가 없다지만 사회적 시선이 그랬다-, 나름 조심은 한 건지 도현이 온갖 요리로 플레이팅 되기는 했지만, 테이블에 부딪힌 팔꿈치에 멍이 든 것 외에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피해 당사자가 별일 아니라고 했다는 거였다. 이런 문제는 피해자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게 작용하니까.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고 해도- 음식 좀 손으로 집어서 던진 건 아이들이 좀 심한 장난을 쳤다고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긴 했다.

그건 그거였고, 보호자에게 연락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한테는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요. 괜찮다고 하셨고, 별문제 없을 거예요.”

놀랍게도 이 말을 꺼낸 건 도현이었다. 대체 그 난장판에서 언제 연락을 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디에나는 네가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처지냐고 묻고 싶었다.

도현의 말을 들은 루카가 코웃음을 쳤다. 그 반응에 도현은 은은히 웃기만 했다.

“그래… 일단 그래도 연락은 드릴게. 그리고 이 일은… 최대한 안 새어 나가게 주의할 테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 알지?”

할리우드에서 매일 터지는 스캔들을 잘 알고 있는 루카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린애들 싸움이야, 금방 묻힐 게 뻔하지. 그리고 화두에 오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또 뭔가. 조금 씹히다가 식겠지, 뭐.

루카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영리한 편이었다. 막 사는 듯하면서도 미움받지 않는 건 그 이유 덕분이었다. 샐러리를 한 손 가득 쥐면서도 머릿속으론 이후에 어떻게 대처할지 계산을 끝냈다.

디에나의 잔소리를 잔뜩 들은 후, 루카는 조금의 반성의 기미도 없이 새디를 불렀다.

“새디, 우리는 친구지?”

“어? 어, 응….”

이 금발의 소녀는 조금 쫀 게 분명했지만, 루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친구의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 물론 잊지 않을게.”

“뭐, 뭔데?”

“어렵지 않아. 그냥, 문제가 커지면 나도 나지만 시트콤도 곤란해지잖아.”

이윽고 루카가 꺼낸 얘기에 새디가 다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는데….

“좋아. 나한테도 나쁠 거 없으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루카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원래 할리우드에 있다 보면 아이들은 영악해지는 법이었다.

“정말? 고마워!”

“하지만… 줄리가 좋다고 할까?”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카는 반신반의했다.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퍽 분별하는 거 같진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곧 무산되었다.

새디와 함께 이쪽을 향해 오는 걸 본 도현이 새디의 손과 루카를 번갈아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고선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좋은 아이디어야.”

“뭔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같이 사진 찍어서 새디 계정에 올리려는 거 아니야?”

“…아네.”

“어떻게 안 거야?”

새디가 놀라서 물었고, 도현은 핸드폰을 들고 새디와 함께 오니 한 가지 경우밖에 없지 않냐며 반문했다. 새디는 놀라워했지만, 루카는 이제 속지 않았다. 저렇게 멀쩡하고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해도 실상은 좀 맛이 간 놈이었다.

“근데 너 괜찮아? 그….”

새디의 눈길이 향한 곳은 프렌치프라이 소스가 엉겨 붙은 도현의 머리카락이었다. 닦아낸다고 닦아냈는데 아직 남아 있었다. 아까의 난장판을 떠올리게 하는 몰골이었다.

“조금 찐득거리긴 한데 생각보다 괜찮아. 걱정 고마워.”

그렇게 세 사람은 나란히 붙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친근하게 붙어 섰던 루카는 곧 진절머리를 내며 떨어졌다.

루카의 매니저가 허겁지겁 달려와 다시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했지만, 도현은 그저 편안한 얼굴로 괜찮다고만 했다. 그러다가 루카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도현은 겉으로는 퍽 초연해 보였지만 속으론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놀람이 특이점에 도달해 되레 차분해졌다는 게 정확했다.

삶이 두부처럼 반으로 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굳이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으로 나눠보자면 도현의 삶은 정적인 것에 한없이 가까웠다. 으레 한 번씩 겪어봤을 법한, 마음에 들지 않는 또래 애를 꼬집거나 몸싸움하는 것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샐러리나, 프렌치프라이, 케이크 따위로 얼굴을 맞아본 적도 없었다. 원래 그런 걸로 맞아본 사람은 전체 인류 중에서 상당히 적은 수에 속할 테지만, 도현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새디가 계정에 ‘에이미보다 더한 사고뭉치 듀오’라는 코멘트를 달아 올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루카는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 달려가 싱글생글 웃으며 돕기 시작했다.

집중 포격을 했고 도현이 그다지 반항하지 않아 금방 치울 수 있었다. 도현도 가만히 서 있기 눈치 보여 슬쩍 휴지 몇 장을 뜯어 바닥에 튄 것을 닦다가, 너는 머리카락부터 닦으라는 스태프의 친절한 말에 어색하게 물러났다.

얼추 정리가 끝나자 소란도 가라앉았다.

디에나도 머릿속에서 타협과 합리화가 끝났는지 웃으며 ‘다음번에 부를 땐 음식은 멀리 치워 둬야겠다’라며 하하 웃었다. 사실 아직 제대로 멘탈이 돌아온 거 같진 않았다.

루카가 오스카와 대화하고 있는 도현을 불렀다. 오스카가 여차하면 몸으로 막을 기세로 불안하게 루카를 쳐다보았다. 루카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네가 사과 안 한 거처럼 나도 안 할 거야.”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천사 같은 루카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너랑 친해지고 싶지 않거든.”

비꼰 걸 대번에 알아들은 도현의 얼굴에 희미하게 금이 갔다. 그 한 방 먹은 얼굴에 루카는 속이 다 시원했다. 저 개자식, 맘대로 하라지.

나도 맘대로 할 거니까!

루카가 비웃음을 짓곤 홱 뒤돌았다. 그리고 레몬 껍질이라도 씹은 양 떫은 표정을 짓는 소년을 등진 채 오랜만에 아주, 아주 상쾌하게 웃었다.

* * *

어떤 정신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시끄러웠던 소음과 밝은 조명이 멀어지고, 차 특유의 서늘하고 차가운 향이 후각을 자극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오스카가 시동을 거는 소리를 들으면서, 도현은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넋 나간 소년을 오스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도현, 괜찮아?”

“네?”

“괜찮냐고 물어봤어.”

“네?”

“…그래.”

걱정 어린 눈이 딱한 것을 보듯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오스카는 일단 이 영혼이 빠져나간 소년이 빨리 휴식을 취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 액셀을 밟았다.

더는 괜찮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없자 도현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방금까지 일어난 일을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왜?”

“왜?”

“아니에요.”

도현은 다시 생각했다.

“아니, 왜?”

“왜? 무슨 일인데?”

“아니에요.”

“…….”

“하아… 아니, 대체.”

“왜.”

“……?”

“아니, 그 말 할 거 같아서.”

“…….”

“미안. 계속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오스카를 보던 도현이 이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일이 왜 그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마리에게 성실하게 상담을 받았고, 조언을 구했으며, 그녀가 알려준 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중에 샐러리를 얼굴에 던질 만한 내용은 없었다.

도현의 얼굴이 점점 더 억울해졌다.

‘진지하게 말한 건데.’

진심으로, 한국에 가는 문제로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했다는 걸 말하는 건 부모님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아, 물론 마리도 있지만, 그녀는 상담의이니 제외한다. 아무튼 그 얘기를 꺼낸다는 건 도현에게 아주 대단하고 중대한 일이었다.

그렇게 속을 까발려 드러낸 건 그만큼 미안해서였고, 차마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도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탓이었는데.

분명 내가 먼저 잘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심을 짓밟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진심 어린 행동과 용기에 돌아온 게 샐러리라니….

차라리 싫다거나, 욕을 했으면 이만큼 억울하고 황당하지 않을 거 같았다.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더 당황스럽고 속이 끓었다. 아까 너무 놀라서 침착해진 탓에 아무 말도 못 해서 더욱 감정이 오갈 길이 없어졌다.

막 우회전을 한 오스카가 도현의 얼굴을 흘깃, 훔쳐보았다가 생각했다.

‘삐졌군.’

소년의 얼굴은 속상함으로 퉁퉁 불어 입이 평소보다 0.3센티 정도 튀어나와 있었다.

영락없이 잔뜩 삐친 아이였다.

* * *

“난 네가 미친 줄 알았어.”

“…그 얘기는 그만 꺼내기로 했잖아요.”

“아, 미안, 미안.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잔뜩 우그러트린 맥이 전혀 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도현이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난 이해해.”

뭘 이해한다는 건지. 자애로운 얼굴을 한 진을 본 도현이 착잡한 눈을 했다.

그 일이 일어난 후.

도현은 사람들의 입이 굉장히, 매우 가볍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빨리 이 사실을 퍼트렸는지, 바로 다음 날 루카와 도현의 다툼이 쫙 퍼져 있었다. 도현은 자신의 정체를 감춰준 지난 방랑자 스태프들을 떠올리며, 신의를 지켜준 그들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세간에는 어린애 둘이 음식을 던져대며 싸웠다는 걸로 받아들여졌다. 일방적으로 음식을 얼굴로 받았던 도현만 억울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맞은 거라곤 음식뿐인 데다가 새디의 계정에 올라온 사진 -뚱한 낯의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반대편을 보는 사진이었다. 도현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감자튀김 조각이 포인트였다- 덕에 꽤 귀여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덕분에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날 시청률은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디에나를 전화를 받고 도현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너네 또 도리토스 놀리고 있니?”

콜라를 사 온 나르샤가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자 마음이 더 약해진 나르샤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 상영관 열렸다!”

그 잔소리를 듣다 못한 니콜라스가 손가락으로 상영관을 가리키며 주의를 흩트렸고, 정말 운 좋게도 그 순간 상영관이 열렸다.

도현은 애써 지난 일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 쥔 영화 티켓에는 ‘Midnight Dance’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개봉 이야기가 나왔던 에드워드 주연의 영화, 가 개봉한 지 이틀째.

시트콤 촬영 때문에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보러 오지 못한 도현은 현재, 영화관에 와 있었다.

원래는 진, 니콜라스, 도현, 나르샤가 예정 인원이었으나, 기사를 보고 웃겨 죽으려 하며 연락한 맥에 나르샤가 차를 틀어 맥을 픽업하러 갔고, 멍청한 얼굴을 한 맥을 납치해 영화관에 함께 온 참이었다.

상영관 문이 활짝 열렸다.

“들어가자, 얘들아.”

나르샤의 말에 도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의 화제는 어느새 완전히 잊고 새로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 품은 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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