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선택과 집중 (7)
“진짜 엄청났지. 특히 그 장면.”
“에드워드가 뛰쳐나와서 거리를 헤맬 때요?”
“그래! 그 장면!”
“확실히. 저는 슬픔을 걷는 뒷모습만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역시 에드워드는….”
맥과 도현이 서로의 말을 척척 받았다. 둘 다 관심사가 같아서 그런지 말이 잘 통했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본 진이 웃음을 그렸다.
도현은 상기된 뺨을 손으로 내리누르며 벅차오른 마음을 진정시켰다. 베니스에서 처음 그의 연기를 봤을 때도 충격적이었다. 그의 연기는 아주 직관적이고… 사람을 충동질하는 야성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정말.
“완전히 미쳤어!”
맥의 감탄 어린 탄식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평범한 감정이더라도 특별하게 느껴지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재능이었다.
“내 생각엔,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정해진 거 같아.”
섣불리 단정하는 걸 좋아하지 않음에도, 이번만큼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사람은 영화관 근처의 피자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곧 갓 구워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가 나왔다.
피자 위에 올라간 루꼴라를 보고 니콜라스의 두 눈이 흔들리자, 나르샤가 특별히 가장 루꼴라가 많이 들어간 조각을 니콜라스 앞에 내어주었다. 니콜라스가 좌절했다.
최대한 루꼴라를 덜어내려는 니콜라스와 나르샤의 공방을 구경하며 비웃던 맥이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다.
툭.
“응?”
어깨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깜짝 놀란 도현은 그게 진임을 확인한 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이 슬쩍 웃다가 작게 속삭였다.
“맥 말이야. 많이 변한 거 같지 않아?”
“아….”
도현의 눈이 반사적으로 맥을 좇았다. 오랜만에 만난 맥은… 진의 말대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춘기로 접어들어 가는 나이라 그런가. 저번에 방랑자 촬영을 끝낸 후 도현의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할 때만 해도 어느 정도 또래 같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형과 동생들로 보였다.
“우리보다 나르샤 친구처럼 보여.”
“푸흡!”
콜라를 마시던 도현은 그대로 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도현이 얼굴을 가렸다. 진의 말이 너무 웃긴데 웃으면 맥에게 실례일 거 같았다.
“뭐야. 뭔데 그렇게 웃고 있어?”
“큼,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자를 빼내 자리에 앉던 맥이 이상한 표정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은 또 웃음이 터질 거 같아 그를 외면했다.
오랜만에 모인 이들은 끝없이 화제를 쏟아냈다. 도현의 영화나 진의 밴드부, 니콜라스의 수영부부터 시작해서 맥이 드라마에 출연한 일까지. 각자 개성이 강하다 보니 서로의 근황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특히 맥은 최근에 출연한 드라마 이전에 연극에 두 번, 영화에 한 번 출연했다고 해서 도현은 깜짝 놀랐다. 감탄을 담아 동그랗게 커진 눈에 맥이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 너처럼 비중 있는 역도 아니었어.”
“그래도… 대단한걸요. 맥은 열다섯 살이잖아요.”
맥이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너는 내가 너보다 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더라. 나보다 한참 어리면서.”
그러나 그게 거슬리지는 않았는지, 곧 별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봐서 그래. 그동안 오디션 본 횟수만 서른 번을 넘어갈걸.”
“서른 번?”
니콜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나르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맥을 보았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시각적 요소에 약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맥은 전보다 성숙해진 지금, 본래 가지고 있던 반항적이고 불량한 분위기가 더욱 돋보였다. 그래서 그의 성실함이 더욱 의외로 다가왔다.
그리고 놀란 이들 사이에서 도현의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다섯 번이 채 안 되는데.’
이렇게 두고 보니 그동안 너무 놀았던 게 아닌가 싶었다. 저번에 캐스팅이 취소되었을 때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슬퍼한 것도 떠올라 왠지 부끄러워졌다.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야. 내가 그 말을 믿겠냐? 왜 갑자기 얼굴이 썩었는데.”
몇 년 전, 호흡 곤란을 겪는 도현을 본 적이 있었던 맥은 도현의 안위에 민감하게 굴었다. 그건 거의 낙인처럼 찍힌 경험에 의한 자동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도현이 다소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 털어놓았다.
“그냥, 제가 좀 게을렀나 싶어서요.”
“허.”
팔짱을 낀 맥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을 뱉으며 삐딱하게 도현을 쳐다보았다.
“너. 네가 동양인이란 거 잊은 거 아니지?”
맥의 말에 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금갈색 눈동자는 거의 쏟아질 지경이었다.
“맥! 지금 인종 차별한 거야?!”
맥이 이마를 짚었다. 어이없음에 말을 잃은 그 대신에 도현이 다급히 변명해 주었다.
“그게 아니라, 오디션 때문에 말한 걸 거야. 내가 동양인이라는 좀 특수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오디션 기회 자체가 적거든.”
“아… 다행이다.”
“…근데 그건 왜 든 거야?”
“아, 이거?”
진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맥이 정말 인종 차별주의자면 분명 뇌에 이상이 생겨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든 걸 테니까, 충격 요법으로 치료하려고 했지.”
…빨리 말하길 잘했다. 도현은 진이 양손으로 야무지게 들어 올린 의자를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건 맥도 마찬가지였는지 ‘나 방금 스틱스강 건널 뻔한 건가?’라고 희게 질린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 인종 차별이 아니라. 쟤가 말한 대로야. 괜히 나랑 비교하면서 헛생각하는 거 같길래 그런 거지.”
“으음, 부끄럽네. 오해해서 미안해.”
완전히 진정한 진이 의자를 고이 내려놓고 자리에 사뿐히 앉았다. 맥이 삐질삐질 땀을 흘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의 푸른 눈이 도현에게 향했다. 고생 한번 해본 적 없어 보이는 흰 피부나, 브랜드 같은 건 몰라도 비싸다는 건 알 수 있는 옷 따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
“…아니다.”
맥이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지만, 맥은 그 시선을 못 본 척 무시했다. 끝내 내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렸다.
취미로 하는 애랑 생계가 걸린 문제가 같을 리가 있나. 실패해도,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건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었다. 괜히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자랑도 아니고. 굳이 구질구질한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컵을 탁 내려놓다가, 소매에 풀린 실오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감이 엉망이다 보니 종종 이렇게 실밥이 튀어나오곤 했다. 평소에 신경조차 쓰지 않던 부분인데 왠지 거슬려 팔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근데 도리토스 소식은 어떻게 바로 알았어?”
신경이 다른 곳에 팔려서 그런가,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생각 없이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건 친구들이 네 여자 친구가 스캔들….”
말이 뚝 멈췄다.
“나 방금 뭐라고 말했지?”
“여자 친구라고….”
“잘못 들었겠지.”
맥이 하하 웃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초리는 더욱 가늘어졌다. 도현은 굉장히, 떨떠름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 차분하게 배척하는 시선에 순간 맥은 자신이 원숭이랑 키스했다고 말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맥… 혹시 루카랑 만나요?”
그 묘하게 안타까운 시선과 말투, 은근슬쩍 거리를 벌리는 작태에 맥은 울컥하고 말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루카랑 만나는 게 저 때문이라고요?”
“아니! 아, 미친, 뭔….”
맥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붕붕 뜬 머리카락을 하고선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이내 이 상황을 넘어갈 방법이 없음을 깨닫곤 체념한 낯으로 말했다.
“그쪽이 아니라 너거든?”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깨트린 건 니콜라스였다.
“도리토스, 너 여자였어?”
“…아닐걸?”
“언제부터 맥이랑 사귄 거야?”
“나도 모르는데….”
니콜라스와 도현이 멍청한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던 맥이 심호흡했다. 아니면 저 망할 꼬맹이들을 한 대씩 쥐어박을 거 같아서였다.
잠시 후.
테이블에는 착잡한 낯을 한 맥과 찡그린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도현, 그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숨을 헐떡이는 세 사람이라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 너무 웃었더니 배 아파….”
니콜라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도현은 그저 입만 뻐끔이다가 도로 다물었다.
사건의 발달은 이랬다.
서혜나와 도현은 베이킹을 즐겼지만, 둘 다 입이 짧은 편이라 디저트들 대부분이 냉장고에서 썩다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맥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그의 손에 들려 보내면서 도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지인들을 위해 만든다면?
베이킹도 할 수 있고 음식 낭비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도현은 지인들에게 만든 디저트를 선물하기 시작했고, 그중 한 명이 맥이었다. 맥은 도현이 보내준 디저트들을 집에서 먹다가 종종 학교에 가져갔다. 그맘때의 아이들은 뱃속에 아귀가 든 법이라, 가져갈 때마다 인기 스타가 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이 디저트가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았고, 맥은 순순히 친구가 만들어준 거라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에겐 새로운 소문이 생겼다. ‘디저트를 보내주는 천사 같은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맥이 기겁하며 그 친구의 정체를 밝혔지만, 맥을 놀리는 데 맛이 들린 이들은 믿지 않거나, 믿어도 놀리는 게 더 재밌어 안 믿는 척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아예 도현을 여자 친구라고 불렀다. 맥만 환장할 일이었다….
“어… 음, 그럴 줄은 몰랐어요. 이제 그만 보낼까요?”
“아니… 저번에 보낸 커스터드 슈 맛있더라…. 엄마도 좋아했어.”
그건 그거였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였다. 이런 데도 재능이 넘치는지 갈수록 보내오는 디저트의 퀄리티가 상승하고 있어서, 그걸 먹는 건 맥의 낙 중 하나였다. 이젠 엄마도 택배가 올 때면 ‘이번엔 뭐니?’ 하며 기웃거렸다.
진과 니콜라스가 눈을 빛내는 걸 보아하니 또 놀리고 싶어서 시동을 거는 거 같아 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진짜 왜 싸운 거야? 그것도 시트콤을 찍다가?”
도현이 배신감이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나한테 토스한다고? 맥이 그 시선을 회피했다. 양심은 조금 아팠지만 어그로는 훌륭하게 끌려서, 이제 어린 하이에나들이 도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맞아. 나 그거 진짜 궁금했어. 물어봐도 자꾸 별일 아니었다고만 하고. 근데 먹을 걸 얼굴에 던질 정도면 별일 아닌 게 아니잖아?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진이 도현의 어깨를 턱 짚으며 말했다.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나자 누군가 반대쪽 어깨를 짚었다.
“도망치지 말라고, 친구.”
니콜라스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현은 앞뒤가 막힌 상황에서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 적어도 ‘그건’ 모르는 거 같으니까.
루카와의 일에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걸 보니 아예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하긴. 모르는 게 당연한 건가. 도현은 긴장을 풀고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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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을 울려라!!!]
오늘이 우리 말랭도리토스 첫 CF가 나오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