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56)화 (257/582)

제256화. 선택과 집중 (8)

“너 안 일어나?”

“으으으… 오십 분만….”

“오십 분? 학교에 안 가겠단 소리를 참 기똥차게도 한다. 이눔아. 얼른 일어나.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퍼질러 자고 있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꾸물거리는 모습에 프로 주부 이모 씨는 저게 인간인지, 아니면 애벌레 새끼인지 모르겠다며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내가 그래서 어제! 일찍! 자라고! 했어! 안 했어!”

“악! 그만! 그만 때려! 일어났어! 일어났다고!”

오혜은이 얼얼한 팔뚝을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얼굴은 피곤함에 절어 퉁퉁 불은 상태였다. 그녀가 비척비척, 좀비처럼 화장실로 걸어가자 이모 씨가 혀를 끌끌 찼다.

샤워를 마치고 조금 인간과 닮은 행색으로 돌아오자 이모 씨가 방금 끓인 된장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오혜은이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곤 식탁에 앉았다.

“그러니까 제때제때 자면 얼마나 좋아. 아침마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엄마가 몰라서 그래. 어제 얼마나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허이고. 퍽이나 그러시겠다.”

엄마의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반응에 오혜은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밥을 푹 떠먹었다.

어제는 정말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게 맞았다. 같은 잼잼 동지들과 커뮤니티에 모여 오늘 나올 CF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도현이는 천사인지 외계인인지 백 분 토론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바로 양치부터 해!”

오혜은은 알았다고 말하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실로 향했다. 평소라면 학교 가기 싫어서 세상 죽어, 지구 죽어를 염불처럼 외고 있었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은 지윤정과 함께 학교에서 CF를 같이 까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을 보고 난 후 혼란스러워하던 갓반인 지윤정은 결국 오혜은의 끈질긴 영업을 이겨내지 못하고 새로운 잼잼이가 되어버렸다. 이 맛에 영업하지. 오혜은이 흐뭇한 얼굴로 코를 쓱 쓸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어, 차 조심하고! 수업 시간에 졸지 말고!”

“엄마는, 내가 애인가. 암튼 나 간다!”

쾅!

시원하게도 닫힌 현관문을 보던 이모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침에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게 애지, 그럼 어른인가. 그러다가 결국 바람 빠지듯 한숨 같은 웃음을 뱉고 말았다.

애도 학교에 보냈으니 이제 좀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남편은 진즉에 회사에 나갔고….

“이제 좀 쉬겠네.”

이모 씨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미끄러트렸다. 아침부터 밥하랴, 남편 회사 보내랴, 자식새끼 학교 보내랴, 너무 바빴다. 이 집구석은 제가 없으면 어찌 굴러갈는지. 혀를 쯧 찬 이모 씨가 채널을 돌렸다.

오늘 아침 뉴스도 보고, 월요일마다 챙겨 보는 연속극도 보고, 홈쇼핑 광고도 보고, 슬슬 저녁 찬거리를 사러 마트나 갈까 생각할 때 즈음이었다.

“…어? 저거?”

소파에서 일어나던 이모 씨가 도로 앉았다. 익숙한 얼굴이 텔레비전에 비쳐서였다.

“맞지? 이도현?”

흰 방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소년은 이모 씨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불과 몇 년 전에 거하게 애국심을 불타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고, 얼마 전 이건 꼭 봐야 한다며 딸내미가 영화관에 끌고 가서 본 얼굴이기도 해서였다.

“어쩜. 애 부모는 좋겠네. 애가 무슨 저렇게 생겼담.”

티브이에서 도현은 한창 우유를 마시는 중이었다. 이모 씨는 그 뽀얀 얼굴을 넋 놓고 보았다. 내 딸도 저렇게 귀여웠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충 그런 감상이었다.

소년이 컵을 내려놓고 웃었다.

- 개운한 아침의 비밀.

직접 녹음한 건지, 야무진 소년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렸다. 곧 화면이 바뀌며 배경이 학교로 변해 있었다. 남색 교복이 그 어린 몸에 그림처럼 잘 맞았다.

탁탁, 탁.

칠판에 분필로 문제를 적어 내려가던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문제 맞혀볼 사람?”

조용한 가운데 하얀 손이 불쑥 올라왔다. 단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싱긋 웃으며 문제의 답을 맞혔다.

- 똑똑한 두뇌의 비밀.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강당이었다. 주름 하나 없이 교복을 차려입고 있던 소년은 이제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이 날개네, 얼굴이 날개야.”

옷이 날개라는 건 옛말이 틀림없었다. 하얗고 파란 평범한 체육복을 입었는데도 무슨 화보 촬영이라도 하는 거 같았다.

잠깐 그 얼굴에 홀렸던 이모 씨는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소년의 눈빛이 싸악, 변하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방금까지 청춘 멜로드라마의 한복판에 있었다면, 방금의 변화로 인해 열혈 스포츠 만화로 바뀌었다. 카메라가 소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긴장감을 주는 브금을 깔았다.

이모 씨가 작게 감탄했다. 물론 무슨 수를 써서 그럴듯하게 만든 거긴 하겠지만, 날렵하게 파고들어 공을 던지는 모습은 확실히 멋있었다.

멋지게 점수를 따낸 소년이 저에게 달려드는 소년들과 어깨동무를 하곤 하이파이브를 했다. 청춘 그 자체였다.

- 건강한 뼈의 비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입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곤 교실로 돌아갔다. 친구 한 명이 이가 시린지 인상을 찡그렸는데,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척 봐도 한기가 줄줄 흐르는 아이스 바를 거침없이 씹어 먹었다.

- 튼튼한 치아의 비밀.

이 부분에서 이모 씨는 조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대체 무슨 광고길래 저런 내레이션인지. 그러나 이모 씨의 귀여움 가득한 눈빛도 다음 장면에선 감탄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보다 훨씬 어린데 멋있네….”

바뀐 장면은 촬영지였다. 온갖 촬영 장비가 즐비하고 스태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본을 보는 소년이 있었다. 소란 속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집중하는 게 퍽 진지해 보였다.

“다시 촬영 들어갑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우유를 잡아채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환하게 웃으며 세트장으로 걸어갔다. 세트장 조명이 후광처럼 쏟아졌다. 스타가 저런 거구나 싶었다.

- 활기찬 에너지의 비밀.

이쯤에서 이모 씨는 깨달았다. 이게 저 소년의 하루 일과를 보여주는 중이라는 걸. 왠지 이도현은 정말 저런 하루를 보낼 거 같아 기분이 묘했다.

밤이 되었는지 창밖이 어두웠다.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소년이 머그컵에 따른 따뜻한 우유를 두어 모금 마시곤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졸린지 하품을 하며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잠드는 모습에 전염되어 이모 씨의 입술도 어느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잠든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속눈썹이 저게 몇 센티야.”

이모 씨는 아주 순수하게 놀랐다.

- 질 좋은 수면의 비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화면이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고 나니, 새하얀 방에서 푸르른 목초지로 바뀌어 있었다. 소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광경을 멀리서 보여주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이내 흰 점처럼 보였던 게 서서히 형태를 그렸다.

흰 점이라고 생각했던 건 하얀색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소년이었다.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은 소년이 초원을 거닐었다.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소년이 풀을 뜯기 위해 고개를 숙인 소의 옆을 지나가며 명랑하게 웃다가, 땅을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인 풀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울렸다.

- 좋은 목초지에서 푸른 공기와 깨끗한 풀을 먹고 자란 행복한 소의 우유. 250가지 테스트를 통과하고 우리 몸에 필요한 111가지 성장 영양소를 가진 우유. 당신의 하루와 함께하는 우유.

내레이션이 끝나자 허리를 든 소년이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눈을 마주친 이모 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푸른 초원을 등지고 선 소년이 옷만큼이나 깨끗하고 흰 뺨을 옅게 물들이며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바람을 닮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산뜻한 미소였다.

- 내 하루의 비밀, 너도 함께할래?

화면이 하얗게 물들고 아무것도 남지 않자 푸른색 선들이 이리저리 나타나 그림을 그렸다. 목초지와 소를 표현한 하루 우유 로고였다.

로고 밑에 글씨가 떠올랐다.

[하루를 채우는 우유.

하루 우유.]

“뭔….”

이모 씨는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이내 딸내미가 저 어린 배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젠 아이돌을 파다 못해 10살짜리 애가 좋다고 그 난리냐고 타박을 줬는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치고 올라왔다. 마지막에 본 사랑스러운 미소가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건 거의 시각적 충격에 가까웠다.

“나도 저렇게 낳았어야 했는데….”

이모 씨가 잠깐 한탄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불 망아지를 낳은 건지. 신세 한탄도 잠깐. 그 불 망아지가 좋아하는 갈비찜 재료를 사야겠단 생각에 채비하고 나왔다.

자주 애용하는 마트로 들어가서 장을 보던 이모 씨는 한 코너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 내 하루의 비밀, 너도 함께할래?

이모씨는 홀린 듯이 가판대에 진열된 것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장바구니에 담긴 하루 우유를 본 이모 씨가 바랐다. 철없는 딸내미가 이거라도 마시고 이도현의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닮아 속 차리기를.

이뤄질 수 없음에도 바라는 건 여타 부모들이 그렇듯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 * *

“대박, 개 귀여워. 진짜! 나 오늘 집 가서 엄마한테 우유 사달라고 할 거야.”

오혜은이 행복한 낯으로 발을 동동 굴리며 말했다. 원래 딱히 우유를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지금 기분대로라면 하루에 한 팩씩은 마실 수 있을 거 같았다.

매의 눈으로 주변에 선생님이 없음을 확인한 오혜은이 팬 카페에 들어갔다. 무릇 봤으면 봤다고 흔적을 남겨 다른 사람과 기쁨을 공유해야 하는 법이었다.

신나서 ‘도리 진짜 멋있고 귀엽고 혼자 다해ㅠㅠ’라는 게시글을 올린 오혜은이 게시글을 쭉 둘러보았다.

“으응?”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왜?”

“아니….”

지윤정이 의아해하자 오혜은이 말을 흐리다가, 이내 핸드폰 화면을 지윤정에게 보여줬다.

“이게 왜… 어? 반응이 왜 이래.”

[이도현 본업 모먼트 진짜 치인다]

[하루 우유 마시면 나도 도혀니처럼 될 수 있을까, 잼드라?]

[하루 우유 미친 줄ㅋㅋㅋㅋㅋㅋ]

[광고 보고 개 터짐]

[아씩ㅋㅋㅋ큐ㅠ 우리 애 데리고 뭐 하는 건데!!]

[도리 진짜 멋있고 귀엽고 혼자 다 해ㅠㅠ]

[도혀니 그런 캐릭터도 할 줄 알았는지 몰랐음ㅋㅋㅋ]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물론 어린애 가지고 건강한 뼈니, 튼튼한 치아니 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의아했다.

[지금 반응 완전 극과 극인데?]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이런 게시글이 올라왔다. 오혜은도 거기에 들어가 댓글을 달았다.

- 그러게. 왜 웃기다고 하는 거지? 난 멋있었는데!

⌞나도!

⌞그게 멋있었다고? 물론 도리토스는 언제나 멋있지만 좀 웃기지 않았나?

⌞222 그러니까 웃긴 거 맞지 않음?

⌞?

⌞대체 다들 뭔 이야길 하는 거야;

⌞이게 뭐지… 혼란

이야기가 겉돌았다. 오혜은이 대체 뭔지, 세상이 나를 상대로 몰카를 하는 건지, 사실 나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아닌지 하는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사이 지윤정이 무언갈 발견하고 오혜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야. 이거, 이거 봐봐!”

지윤정이 보여준 화면에 오혜은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지윤정이 재차 말했다.

“광고가 한 개가 아닌가 봐!”

화면에는 [하루 우유 CF – 번외편]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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