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선택과 집중 (10)
와작와작.
우물우물우물.
“너는 언제 나와?”
“한참 남았어.”
도현이 대답하며 손에 쥔 과자를 입에 털어 넣었다. 세 사람은 진의 집 거실 소파에 나란히 늘어져 시트콤을 보는 참이었다.
“근데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해줬잖아.”
“‘내가 실수해서 그래’가 말해준 거냐?”
“…….”
영화를 보러 간 날 이후로도 진과 니콜라스는 틈만 나면 그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도현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다툼이 있었다는 게 너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도현은 시간을 끌기 위해 과자 하나를 씹었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과자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에 니콜라스가 ‘쟤 또 저러네’ 하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하려면 많은 것을 말해야 하니.
도현은 지금이 좋았다. 서로 아무런 걱정도 없고,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 거기에 무언가 끼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알고 싶어 하는데.
도현이 멈칫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기대감 가득한 눈에 실망이 떠오르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어, 루카 나왔다!”
진이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도현도 허공에 있던 시선을 내려 화면을 보았다. 보라색이 아닌 갈색 머리를 한 루카가 거기 있었다. 반사적으로 미간이 좁아졌다.
쟤한테는 말해줬는데.
그러다가 곧 루카의 행패가 떠오르자 얼굴이 더 구겨졌다. 내가 얼마나 고민한 끝에 말한 건지도 모르고 샐러리나 던지는 여자애. 모두가 제 진심을 알아줘야 하는 법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진심을 그런 식으로 무시한 건…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전히 충격적인 일이다.
반감은 곧 다른 흐름으로까지 이어졌다. 쟤한테도 말해줬는데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못할 게 뭐야? 물론 분노에 눈이 멀어 이성적 사고를 잃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분노에 힘을 얻어 용기를 낸 거라면 모를까.
사실 언젠가 말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미적거리는 태도가 제 이기심이란 것도 알았다. 정말 친구를 위한다면, 미리 이야기해 받아들일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게 맞는 일일 테니.
‘그래. 미루는 건 이 정도 하면 됐잖아.’
미루다가 일을 키우는 건 더는 사양하고 싶었다. 한쪽 구석에서 그래도 싫다며 억지 부리는 어린 마음을 꾹 눌렀다.
“저기 도리토스 너도 나왔-”
“얘들아, 나 내년에 한국에 갈지도 몰라.”
툭.
니콜라스가 베어 물던 과자의 반절이 뚝 떨어졌다. 티브이에는 방금 등장한 괴짜들 멤버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게 소파 위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깔렸다.
“…어, 음, 그러니까. 저번에 갔던 것처럼 놀러 간다는 얘기지?”
진이 더듬더듬 뱉은 말에 도현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가게 되면, 거기서 사는 거야.”
“…야, 넌. 무슨 그런 얘길 시트콤 보다가 해?”
니콜라스가 입에 있는 과자를 간신히 씹어 삼키며 말했다. 하마터면 뱉어버릴 뻔했다. 사실 지금도 과자를 씹고 있는지 혀를 씹고 있는지 헷갈렸다. 니콜라스의 황망한 물음에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반면, 그 웃음에 정신이 돌아온 니콜라스가 도현의 멱살을 잽싸게 틀어 쥐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헉, 혀 씹을 뻔했어.”
“그런다고 봐줄 줄 알아? 어디 봐봐! 괜찮네! 한국에서 산다니, 갑자기 뭔 소린데!”
“잠까안!”
진의 목소리에 탈탈탈 털리던 도현이 비틀거리며 니콜라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이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상황을 정리해보자. 도현, 내년에 한국에 갈지도 모른다고? 정확하게 언제?”
“아마…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왜? 왜 가는데?”
“아빠가 한국에서 사시니까. 엄마랑 내가 한국에 가야 다 같이 살 수 있거든.”
“…언제 정해진 거야?”
이미 시트콤은 안중에도 없었다. 소란스럽게 구는 마치가 자매들과 괴짜들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울렸다. 일부러 친구들이 시트콤에 정신이 팔렸을 때 말해 별거 아닌 것처럼 지나가려 했는데…. 도현의 안타까운 시선이 화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 오래는 안 됐어. 영화 촬영이 끝나고 부모님이랑 얘기한 거니까.”
“벌써 몇 개월은 됐단 얘기잖아! 얘 진짜 안 되겠네!”
그리고 니콜라스가 폭발했다.
이번에는 진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멱살을 털어대는 니콜라스를 거들며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왜 말 안 했어? 나중에 졸업할 때 말할 생각이었어?”
그 애처로운 표정과 목소리에 약해진 도현은 두 사람이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었다. 수분이 차오른 올망졸망한 눈을 보자니 양심이 찔려 죄책감이 턱 끝까지 치고 올라와 반항할 수가 없었다.
“…말하려고 했어. 그냥….”
너희가 지금처럼 반응할 테니까.
뒷말은 삼켰다. 그는 항상 두 사람한테는 좋은 일만 가득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게 정말 친구를 위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인지 단순한 집착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을 누구한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도현은 제 우정관이 딱히 보편적이고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면 평범한 거 아닌가. 사실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친구 관계가 뭔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받은 트로피를 달라거나, 지금까지 번 돈을 모두 달라고 해도 들어줄 수 있을 만큼 딱 그 정도로 친구를 좋아할 뿐이었다.
“…나도, 가고 싶진 않아. 너희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
“그럼 안 가면 되잖아!”
“니키, 진정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야.”
그나마 정신이 남아 있는 진이 니콜라스의 어깨를 잡아 도닥이며 능숙하게 저지했다. 이럴 때면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 지냈다는 게 느껴졌다. 진은 니콜라스를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았고, 니콜라스는 유독 진의 말에 순해졌다.
몸속 어딘가 알싸해지는 기분에 도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틱-.
진이 티브이를 끄고는 두 사람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현도 시트콤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얘들아, 너네 시트콤 안 보니?”
막 물을 마시러 나왔던 밀턴이 물어봤지만, 아이들은 심각한 낯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볼살이 빵빵한 얼굴이 심각해져 봤자 심각하게 귀여울 뿐이라 밀턴은 입가를 가리며 애들을 보내주었다. 여기서 웃는 걸 티 내면 진이 일주일 동안 삐질 걸 알아서였다.
“자, 여기 앉자.”
세 사람은 바닥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진정이 안 되는지 도현을 노려봤다가, 애달프게 봤다가, 쏘아보았다가, 울먹거렸다가, 삼 초에 한 번씩 표정이 바뀌었다.
도현은 그런 니콜라스를 묘한 얼굴로 보았다. 분명 미안한 감정이 큰데… 떠난다는 말에 이토록 강렬한 반응을 보여주니 어딘가 빠듯한 기쁨이 스멀스멀 차올라 휑했던 부분을 채워 넣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제대로 들어야겠어.”
비장한 말에 도현이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하는 게 적절할지 결정했다. 결정이 끝나자 입을 여는 건 쉬웠다.
“한창 영화를 촬영할 때….”
* * *
미국 샌디에이고의 한 가정집에 심각한 세 아이가 있든, 말든 알 리 없는 한국의 팬 카페는 신이 났다. 시트콤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잼잼이들이 게시글을 꾸준히 올리는 탓이었다.
[도혀니 언제나와ㅏㅏㅏ]
[우리 애 엑스걸프렌드 만나는 거냐곸ㅋㅋㅋ]
나도 없는 걸… 주륵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