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59)화 (260/582)

제259화. 선택과 집중 (11)

세상에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게 관계였다.

“울지 마. 내가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나는 너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머뭇거리자 진이 재촉했다.

“말할 게 있다면 지금 다 말해. 나는 내가 이걸 몇 달간 모르고 있었단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니까! 이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 싫어.”

붉은 기가 남은 눈이 똑바로 쳐다보자 홀린 듯이 입이 열렸다. 생각건대, 마음의 빗장이 모두 풀려버린 건 니콜라스뿐만이 아니었던 거 같았다.

“어… 한국으로 가면 어쨌든 멀어지게 되는 거잖아. 사람은 멀어지면 거리감이 생기고… 안 그래? 그러니까, 나 같은 애는, 음, 너희가 금방은 아니겠지만 결국 잊어버리고 떠날 수 있잖아.”

“거기까지 해도 돼.”

어느새 눈물을 그친 진이 도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다 말하라면서… 도현이 어정쩡하게 입을 닫았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정말 모르겠어. 그렇잖아. 넌 정말 멋진 친구고, 나는 네가 너무 좋은데 말이야.”

니콜라스도 가만히 있지 않고 거들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솔직히 우리 학교에서 널 가장 안 좋게 보는 건 너일 거야.”

거기까지 말한 니콜라스가 눈썹을 살풋 찡그렸다.

“내가 너였다면 그렇게 살진 않았을걸. 대체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 거야?”

“니키.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말고 나중에 해.”

도현은 너무 뼈를 세게 맞아 얼얼할 지경이었다. 다시 진지해진 진이 특유의 야무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무슨 바보 같은 걱정을 했는지 알겠어. 네가 곧 떠날 테니까 우리가 거리를 둘까 봐 걱정했던 거잖아. 그렇지? 그리고 떠난 후에는 완전히 너와 멀어질까 봐 무서웠던 거고?”

“꼭 그것만은 아니야. 말했듯이 그냥 너희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

“허! 힘들어하는 건 너겠지. 네 생각부터 해.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챙길 수 있으니까!”

“니키, 맞는 말은 좀 이따가 하라니까!”

겉으로는 니키를 타박하고 있지만, 결론은 도현을 저격한 말이었다. 도현은 이제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진이 거친 손길로 휴지를 하나 뽑아 킁 하고 코를 푼 후 다시금 도현을 보았다.

“넌 정말 바보 같아.”

“…….”

기가 죽은 도현이 가만히 있자 진이 눈가를 찡그렸다.

“네가 얼마나 좋은 애인지 왜 모르는 거야? 내 인생에 너 같은 친구는 다시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욕심이 많아서 너 같은 친구는 절대 놓지 못해. 네가 한국에 가도, 거기서 평생 산다고 해도 너를 못 놔준다고!”

마지막엔 거의 윽박지르는 모양새였다. 대체 이건 무슨 전개지. 영 떨떠름한 눈이 진을 향했다. 이제 배경 음악만 깔리면,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멜로 장르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아니, 달래는 것까진 예상했는데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이글이글하게 노려보는 금갈색 눈에 도현이 속눈썹을 떨었다. 퍽 가련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니콜라스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았는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일단 도현은 이상하게 변하려는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익숙한 사과의 말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내가 미안,”

“미안한 건 네가 아니라 우리야! 너한테 그 정도 믿음도 주지 못했다는 소리잖아?”

“그건 절대 아니야!”

깜짝 놀라 황급히 부정했다.

“절대 너희 문제가 아니야! 이건 진짜야, 오해하지 말아줘.”

왜 항상 일이 터지면 상대방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형이 만나온 사람들은 다 남 탓하기 바쁘던데! 양쪽 중 어느 쪽이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현은 제발 제 주변 사람들이 저를 탓해줬으면 했다. 거꾸로 뒤집어서 봐도 가장 이상한 건 자신이 맞았다. 왜 나도 아는 걸 다른 이들은 모르는 건지!

“나는 그냥…!”

“사실이 뭐든 상관없어.”

길게 나오려는 변명을 진이 딱 잘라냈다. 단호한 어투는 어떤 다짐을 담고 있었다. 아까 울고 화내고 정색했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이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극히 악동 같은 미소에 도현이 어깨를 굳혔다.

“앞으로 보여줄게. 우리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말이야.”

분명 감동해야 마땅한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니, 그 전에 진은 최근에 대체 뭘 본 걸까. 도현은 더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 * *

결론부터 말하겠다.

결과적으로- 걱정은 헛된 일이었다. 진이 말한 ‘보여준다’는 것은 아주 온건하고 평화로우며… 사랑스러운 종류의 것이었다.

예를 들면.

‘너 오늘도 정말 사랑스럽구나.’

밑도 끝도 없는 칭찬이라든가.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애정 어필이라든가.

‘오다가 주웠다.’

음식 적선이라든가.

‘큭… 나를 쓰러트리기 전에는 도리토스를 넘볼 수 없어…!’

쓸데없는 짓까지…. 방금 건 그저 평범하게 피구를 할 뿐인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는데 익숙해지자 이제는 웃음부터 나왔다. 어리고 상냥한 친구들이 생각한 방법이 너무나 간지러워서였다.

평소와 다른 행동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세 사람의 사이가 달라지거나 어색해진 것도 아니었다. 아니, 달라졌다면 달라졌지.

그날.

도현이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자발적으로 꺼낸 일은 실처럼 세 사람을 엮었다. 어쩌면 그동안 꾸준히 엮이던 씨실과 날실이 이어지고 이어져 마침내 단단한 매듭이 지어진 건지도 몰랐다.

그저 도현이 조금만 솔직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세 사람의 사이는 전보다 훨씬 견고해졌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늘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생겨난다. 도현은 자신이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한다고 느꼈다.

“자, 이건 우리 우정의 증표야.”

도현은 한동안 멍하니 햇빛을 받아 호박색을 띠는 금갈색 눈동자를 보았다. 두 눈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확신만이 가득했다.

“지, 진…! 그건 대체!”

다비드가 경악에 차서 눈을 부릅떴다. 도현은 그의 심정에 공감했다. 진이 내미는 게 다름 아닌… 반지였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그랬어. 사람은 원래 남을 잘 믿지 못하고 불안해해서 늘 서로를 구속할 무언가를 찾아왔다고. 그런데 너와 나는 법적으로 묶일 수 없으니 이런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물건으로라도 사이의 견고함과 진실함을 증명하는 거야!”

“아니, 정말 그것보단 다른 이유가 컸….”

“나도 꼈다.”

니콜라스가 손을 슬렁슬렁 흔들었다. 어째 그 짧은 사이에 좀 야위었다. 머리카락이 엉망인 걸 보아하니, 진과 한바탕한 거 같았다. 대충 부끄러워서 끼기 싫어하는 니콜라스와 그런 니콜라스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진의 대립이었을까. 도현은 그의 친구들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너, 너… 네가!”

질투에 눈이 먼 다비드가 니콜라스의 멱살을 잡았다. “아, 너는 없지?” 니콜라스가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듯 두 눈을 빛냈다.

그다음이야 뭐-

두 사람이 투닥대는 소리를 ASMR 정도로 취급한 도현이 반지를 보았다.

심플한 은색 링은 D, J, N이 띄엄띄엄 박혀 있었다. 이니셜을 보니 음악 수행 평가 때의 DJ-N 조가 생각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이 뿌듯하게 어깨를 폈다.

“어때. 이제 한국에 가도 안 불안하겠지?”

도현은 그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지극히 적은 지분을 차지하는 생각이었다는 것과 너희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대신에 활짝 웃었다.

“응, 정말 그래.”

밀턴 씨와 진이 시청하는 프로그램과 정서 발달의 상관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던 계획을 도로 수납하며 반지를 꼈다.

도현이 상기된 얼굴로 반지를 살피는 사이, 진의 눈치를 보며 눈썹을 내려트리던 다비드가 결국 밴드부도 뭐 하나 맞추자는 진의 말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간 동안 도현이 친구들과 로맨스 코미디인지 우정 드라만지 모를 것만 찍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 드디어 끝났다!”

헤더가 희열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는 양팔을 벌리고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헤더에게서 그렇게 격렬한 리액션은 처음 보는 터라 도현이 흥미롭게 그걸 구경했다.

“거기! 다른 곳으로 빠지지 말고!”

수학 올림피아드 반의 모두가 응시했던 AMC 8과 달리 10은 지원한 몇몇 아이들만 응시해서 그 수가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인솔하는 게 쉽냐 묻는다면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비글은 수가 많아도 비글이고 적어도 비글이었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헤더가 풀린 낯으로 물었다.

“너 잘 봤어?”

“난,”

“아, 됐어. 잘 봤겠지.”

그러면서도 실실 웃고 있었다. 평소라면 재수 없다고 한마디 했을 텐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하, 그걸 말이라고 해?”

서두가 튀어나오자마자 잘못 말했단 걸 깨달았지만, 늘 그렇듯 깨달은 뒤는 대부분 늦는 법이었다.

“8에서 만점 맞은 너조차 더 잘하겠다면서 공부하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못하면 열심히라도 해야지! 근데 너는, 너는 이 치사하게 머리라도 좋으면 대충이라도 하든가!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어? 학교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면 집에선 좀 쉬든가! 다음 날만 되면 시험지를 두세 개씩 풀어오니까 내가 쉴 수가 없었잖아!”

헤더는 주먹을 꽉 쥐고 따졌다. 대체 그 말들을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져 내렸다. 어리둥절하게 그 말을 듣던 도현이 슬쩍 말했다.

“어- 그래도, 나는 네가 같이 공부해서 즐거웠어.”

“너는…!”

헤더가 기가 막힌 듯 말을 멈췄다. 속이 타고 열불이 나는데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김이 빠진 헤더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너는 정말… 그렇게 살면 안 돼.”

난데없이 삶의 방식을 지적당한 도현이 억울한 얼굴을 했지만, 헤더는 팔짱을 끼고 밉지 않게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자자, 다들 차에 올라타자. 모두 수고했어. 선생님이 사줄 테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해, 빨리 가자!”

방금까지 팔짱을 끼고 있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팔을 잡고 뛰어가는 헤더에 도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하늘을 보니 아직 선선한 공기 위로 청명한 푸른색이 보였다.

언제 끝날까 싶었던 시험도 어느새 끝났다. 원해서 한 일이니 부담감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무의식중에 신경이 쓰이긴 했나 보다. 후련함이 바람처럼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헤더한테 잡히지 않은 팔을 본 도현이 반짝 빛나는 반지를 보고 생각했다.

‘시험도 끝났으니까 내일은 애들이랑 놀아야겠다.’

뭐를 하면 좋을까.

도현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며 헤더를 따라갔다. 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현은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아차 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저 시험 끝났어요.]

문자가 향한 상대는 셋이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오스카.

지이잉-

[오스카]

가장 반응이 빠른 건 오스카였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오스카는 하루 종일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 연락하든 이렇게 빛과 같은 속도로 반응하지는 못할 테니까.

“나 전화 좀 받을게.”

“마음대로 해.”

그걸 굳이 말하는 게 신기하다는 듯한 어투로 헤더가 대답했다. 그러다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는지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도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도현! 정말 수고했어! 방금 끝난 거야?

“고마워요. 네, 막 끝나서 연락드린 거예요.”

- 좀 더 쉬고 연락해도 괜찮았는데. 시험 봤으면 힘들 거 아니야.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은 버스 안이라서요.”

- 그래, 너를 어떻게 말리겠니. 그래서 시험은 어때. 준비한 만큼 나온 거 같아?

“네. 후회는 없어요.”

- 그게 가장 중요한 거지. 잘했어.

“그런데 왜 연락하라고 하신 거예요?”

- 아아, 맞다. 그 얘길 해야지.

수화기 너머로 밝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저번에 발레 아카데미 다니고 싶다고 했지? 시험도 끝났으니 다음 주 주말에 가볼래?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