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선택과 집중 (12)
오스카, 서혜나와 함께 찾은 곳은 샌디에이고 해안가에 위치한 Sandiego ballet academy & Dance studio, 줄여서 SBADS였다. 샌디에이고에는 여러 발레단이 있는 만큼 부속 발레 학교도 많았는데, SBADS는 발레단 부속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교사들의 수준이 낮은 건 아니었다. 샌디에이고 발레스쿨, 하면 떠오를 만큼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교사들은 캘리포니아 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 골든 스테이트 발레단 수석 아티스트 출신, 조지아 발레단 출신 등등 그 이력이 화려했다. 아마 테스트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발레스쿨 중에서는 교사진의 수준이 탁월한 편에 속할 터였다.
매독스가 이곳을 추천한 것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모든 수업이 프라이빗하게 진행되어서 구경꾼이 없다는 점. 보호자조차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름 유명인인 도현에게는 필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그런 난리를 겪었으니 더욱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우리 아카데미에 온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야. 샌디에이고에서 우리만큼 남학생 클래스에 열정적인 곳은 없거든.”
아카데미에 도착해 눈이 돌아갈 만큼 넓은 센터에서 헤매던 그들을 안내해 데려와 준 여성, 세나 로렌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남학생들만을 모은 클래스를 운영한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학생들이 교류하며 파트너십을 기르기에도 좋고, 좀 더 남자아이의 신체적 특징에 맞는 커리큘럼을 짤 수 있었다.
“다른 곳은 남학생 클래스를 무슨 여름 집중 캠프쯤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달라. 여학생 수업만큼 체계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나이와 수준에 따라 반이 달라져서 네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어. 네가 전문 무용수를 꿈꾼다면 우리 아카데미만큼 제격인 곳은 없을 거야. 혹시 엘츠 알로네를 아니? 그도 우리 아카데미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이토록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보니 유명한 발레리노 같았다. 도현은 적당히 놀란 척 반응을 돌려주었다. 그는 최대한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앞에 보이는 풍경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는 중이었다.
SBADS는 샌디에이고에 두 곳의 센터가 있는데 그중 여기가 메인 센터였다. 메인 센터라는 말에 걸맞게 건물은 굉장히 넓었고 바닥은 모두 충격 흡수를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목재로 깔려 있었으며, 스튜디오 내부는 벽뿐만 아니라 천장까지도 모두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안가에 위치해서 2, 3층 정도 올라가면 사이드 창문으로 바닷가의 풍경이 펼쳐졌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산들바람이 흘러 들어와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여기에 데려다 놓으면 무언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날 거 같았다.
센터를 구경한 후 그들은 사무실로 초대되었다. 세나가 권하는 푹신한 소파에 앉은 그들은 한 파일을 받았다.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한 안내 책자였다.
세나가 책자를 휙휙 넘기더니 한 부분에서 멈췄다.
“발레는 처음이라고 했지?”
“네.”
한국에서 잠깐 배운 적이 있지만, 그 정도면 처음과 다른 게 없는 수준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켰다.
“아카데미에 등록하게 되면 제일 먼저 이 수업을 두 번 듣게 될 거야. 우리는 발레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기초 용어부터 알려주는 비기너 클래스를 운영하거든. 나이, 성별 상관없이 비기너들을 모은 수업이라 구성원이 좀 다양할 거야.”
한국에서는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여자아이뿐인 수업을 들었다. 그게 신경 쓰일 리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세나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 수업은 단순히 기초 습득뿐만 아니라 네 수준을 알아보는 시간이 될 거야. 연수가 끝나고 나면 널 가르쳐 주었던 교사가 네게 적당한 클래스를 배정하게 돼. 이제 거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인 거지.”
그녀는 이후 남학생 프로그램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기본적인 수업은 여학생 프로그램과 비슷하지만, 수업 중에 발레리노에게 필요한 근력, 컨디셔닝 및 운동 능력 향상을 위한 훈련이 조금 더 집중적으로 들어간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다른 것들도 배울 수 있어. 재즈, 탭, 힙합, 컨템퍼러리, 플라멩코 같은 것들 말이야. 여기 말고, 다른 센터에 가면 보컬까지 배울 수 있는데 메인 센터는 좀 더 퍼포먼스 중심이라서 보컬 클래스는 없어.”
미국의 댄스 아카데미는 종합학원 같은 느낌이 강한 편이었다. 특히 서부 쪽은 춤, 노래, 연기가 버무려진 브로드웨이 스타일이 강세였다. 도현은 발레도 초보인 마당에 다른 것들까지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별로 아쉽지 않았다.
“일단 한 가지만 잘 배워보고 싶어요.”
“그것도 좋지! 깊게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구나. 다른 수업을 추가해 듣지 않아도 우린 종합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편이라 수업 중에 간간이 다른 장르도 겪어볼 수 있을 거야. 오, 그렇다고 발레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는다는 소린 아니니까 오해하면 안 돼. 모든 춤은 다 연결점이 있기 마련이거든. 뭐든 다른 것도 겪어 보아야지 더 잘 알 수 있고 창의적인 예술성을 기를 수 있는 법이야. 그게 우리 학원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고.”
한마디를 하면 줄줄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모두 도움이 되는 것들뿐이라 도현은 집중해서 들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서혜나도 몹시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세나의 친절한 안내를 받은 후 도현은 레지스트레이션 폼을 작성했다. 헷갈리는 부분은 세나에게 물어보면서 폼을 다 채우자, 서혜나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세나가 즐거운 얼굴로 카드를 받았다.
일회성 등록금, 비기너 프로그램 수강료가 긁혔다. 프로그램마다 수강료가 달라서 나머진 비기너 연수가 끝난 후에 결제해야 했다.
“그럼 월요일 네 시까지 오도록 해.”
“혹시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요?”
“아, 맞아. 그걸 깜빡할 뻔했네. 초급자 드레스 코드는 체육관 반바지, 티셔츠, 흰색 양말과 부드러운 캔버스 신발이야. 반바지는 검정, 티셔츠는 흰색이어야 하고 혹시 없다면 일 층에 있는 매장에 가서 구매할 수 있어.”
드레스 코드라니.
한국에서 다녔던 학원에서는 그런 규정이 없었던 터라 아이들은 부모나 제 취향대로 발레복을 입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도현이 물었다.
“스타킹이나 발레 슈즈는 안 신는 건가요?”
“그건 중급자부터! 초보자들, 특히 남자아이인데 초보자일 경우에 스타킹을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지. 퍼포먼스에 집중해야 하는데 옷에 집중하다 보니 초보자는 일괄적으로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도록 하고 있어.”
확실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았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발레’ 하면 여성과 튜튜를 떠올렸다. 남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따로 개설되어 있는 것만 봐도 그들이 소수에 속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스타킹까지 더하면 접근성이 더 낮아질지도 몰랐다.
“혹시 마땅한 운동복이 없다면 가는 길에 센터 일 층에 있는 매장에 들러봐. 우리 수강생들은 10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구매 가능하니까 영수증을 가져가서 보여주면 할인받을 수 있을 거야.”
워낙 큰 센터다 보니까 센터 내에 매장을 유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스튜디오를 다시 한번 구경한 후 센터 밖으로 나왔다. 세나의 말과 달리 운동복은 이미 서혜나가 잔뜩 구매해둔 상태라 추가로 살 필요는 없었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매장을 향해 고개를 빼 드는 서혜나를 말리는 소소한 사건 빼고는 별일 없이 끝났다.
“마음에 든 얼굴이네.”
“네. 아직 수업은 듣지 못했지만… 일단 느낌은 좋은 거 같아요.”
“미안해서 어쩌죠. 이런 것까지 알아봐 주시고.”
“하나하나 다 도현에게 필요한 일이니까요. 원래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게 제 업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서혜나의 말에 오스카가 웃으며 답했다. 세 사람은 차를 타고 조금 달려 주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로컬 맛집으로 불리는 레스토랑이라 애매한 시간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그들이 착석하자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웨이터가 떠난 뒤.
“흠, 큼.”
오스카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긴장감이 흘렀다. 올 게 왔구나. 도현이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오늘 오스카가 온 건 단순히 발레 아카데미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음, 물론 이미 매독스와 충분한 이야길 나눴겠지만, 저도 도현의 매니저이니 함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도현의 학교와 거취 문제에 관련해서요.”
일종의, 설득의 장이었다.
도현은 친구들에게 한국에 간다는 사실을 말한 후 일종의 확신을 얻었다. 델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잠시 동안 이곳을 떠나도 괜찮을 거 같다는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도현의 에이전트와 매니저였다. 도현은 먼저 오스카를 통해 말을 전했고 매독스와 통화라고 쓰고 면담이라고 읽는 시간을 가졌다.
도현은 그렇게 처참한 매독스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 정말, 한국에 갈 생각입니까?
이미 계약 당시 충분히 이야기한 부분이라서 매독스는 처참한 심정을 드러내면서도 그에게 강력하게 말하진 못했다. 그저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 도현, 잘 생각해봐요. 당신은 지금 상승세를 타고 있어요. 그곳에 간다고 해서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 있는 것보단 더 기회가 적을 거예요. 당신은 이제 막, 할리우드에 이름을 퍼트리기 시작했다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도현은 이 대화가 엄청나게 길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건 틀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설득과 부드러운 거절, 우회적인 설득과 직접적인 거절, 안타까운 설득과 안타까운 거절, 설득, 거절, 설득, 거절, 설득, 단호한 거절….
대화는 두 사람 다 지칠 때까지 돌고 돌았다. 그러다 휴전 상태에 가까운 끝을 맺었고, 이어서 2차 설득을 하러 오스카가 투입된 게 현재 상황이었다.
도현이 오스카의 미련을 덜어내기 위해 부러 단호히 말했다.
“오스카. 이미 말한 것처럼 저는 충분히 고민했고 결정을 내린 상태예요.”
“…도현. 넌 그 문제가 단순히 너만의 문제는 아니란 걸 알잖니. 우린 좀 더 얘기해봐야 해.”
“계약 전에 이미 언급된 사항이기도 하고 이건 개인적인 문제인걸요.”
‘저 고집불통을 어떻게 하지’란 고민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몹시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그동안 뭐든 척척 잘해서 고생 하나 안 시키던 아티스트가 갑자기 핵폭탄 수준의 일을 터트려서였다. 그가 미간을 문질렀다.
“물론 학교나 거취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 그것보다 네 미래에 집중해서 말하고 싶은 거야.”
퍽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오스카는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조급한 것 같기도 했다.
도현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까운 상황이란 건 알았다.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한국에는 꼭 가야 해.’
가족 관계도 그렇지만 그건 막연한 직감에 가까웠다. 그곳에 나를 기다리는 게 있다는. 그건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친구들에게 –거의- 모든 걸 털어놓은 후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게다가,
‘메리의 말이 맞아.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잠깐 멀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해.’
“미안해요, 오스카.”
설명하기 어려우니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 없었다. 오스카가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너와 난 입장이 다를 뿐이니까. 그리고 좀 더 들어봐. 난 오늘 네게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 온 거거든.”
“다른 길이요?”
“만약 혜나 씨가 한국에 가야 하는 거라면 우리에겐 보딩 스쿨이라는 선택지가 있어. 흘륭한 퍼포먼스 아트 스쿨 중에는 보딩 스쿨이 많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네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거야.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은 물론이고 기회나, 커넥션 면에서도 말이야. 홀로 생활하는 게 힘들겠지만,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건 서혜나였다.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도현을 곁눈질했다. 도현이 그 말에 관심을 보일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도 도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여기 남는 게 좋다는 걸 알았다. 같이 한국에 가고 싶은 건 순전히 저의 욕심이었다.
흔들리는 눈이 도현을 향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네?’
서혜나가 눈을 깜빡였다. 예상외로 도현은 혹한 얼굴이 아니었다.
“물론 오스카라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죠. 당신은 훌륭한 매니저니까요. 하지만 제가 개인적인 문제라고 했던 이유는, 한국에 가고 싶은 건 제 미래나 커리어에 상관없이 오로지 제 욕심이라서예요.”
쉽지 않을 건 이미 예상했다. 매독스나 오스카나, 도현을 순순히 보내주기 어려운 입장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미 생각을 정리해 온 덕에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게 답답하게 들리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오스카, 전 아직 열 살이고… 좀 더 많은 변화를 겪어보고 싶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혜나는 감동했다.
‘부모님을 위해서’나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제 욕심’이라니!
‘도현이도 우리랑 같이 살고 싶어 하는구나.’
그리 생각하니 감격적이라 심장이 찡해졌다. 잠깐 감격에 허우적대던 서혜나가 흐물흐물 풀린 얼굴을 순식간에 갈아 끼웠다. 단숨에 지적이고 능력 있는 여성의 표본이 된 서혜나가 침착한 투로 말했다.
“저희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봤어요. 괜찮다면 들어 보실래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예요.”
오스카가 입을 다물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서혜나는 입을 열기 전, 잠시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도현이 살짝 웃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긴 해도 커리어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조금도, 1그램조차도 없었다. 세상만사 초연한 얼굴 때문에 다들 자주 오해하지만, 도현은 욕심이 많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