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1)화 (262/582)

제261화. 선택과 집중 (13)

오스카의 지난 일주일은 대체로 우울했다.

그가 삶에 회의를 느꼈다거나 새삼스럽게 세상의 불합리함을 깨달아서가 아니었다. 그건 직장인인 이상 늘, 24시간 달고 사는 종류의 우울이었고 이번 건 좀 달랐다.

이 우울엔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이도현.

그가 맡은 아티스트 중 가장 탁월하면서 최근 가장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선배 매니저들의 말을 듣다 보면 ‘얘는 된다’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중 극히 소수만이 정말로 ‘되었’기에 신빙성은 부족했다. 아무리 잘난 외모, 악마 같은 천재성을 가져도 운이 없으면 뜨지 못하는 게 현실이니.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웃었다. 너도 겪어보면 알 거라는,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리고 그 의미심장했던 웃음처럼, 도현을 본 순간 오스카는 ‘얘는 된다’고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말았다. 그 미신이라 치부했던 믿음을 그도 가지게 되었단 소리였다.

그를 처음 맡은 사람이 자신이란 게 마치 어떠한 계시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렸다.

넌 지금 네 인생이 달라질 기로에 선 거야.

그건 무척이나 매력적인 속삭임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확신이 생겼다. 확신을 견고히 한 건 처음의 마법 같은 예감도, 도현의 뛰어난 외모도 아닌 연기를 향한 그의 진실성이었다.

나도 슬슬 전담 매니저를 할 때가 됐지.

회사 측에서도 이번 영화에서 가능성을 봤는지 넌지시 떠보았다. 오스카는 자연스레 미래를 그려보았다. 도현이 승승장구하고, 그 옆에서 형 동생 하며 함께 있는 자신을.

그래, 그러니까 시험이 끝났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 다음 주에 가보면 좋을 거 같아요. 그보다 오스카, 제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요. 지금은 버스 안이라 좀 어렵고… 내일 이 시간에 전화 가능할까요?

통화 도중 이런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태평하게 시험도 끝났으니 이번에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전담 매니저를 본격적으로 진행해야겠다고, 얼마 안 있어 모두 파쇄기에 들어갈 헛된 계획이나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 저 학교를 졸업하면 한국에 가서 살기로 했어요.

와장창!

들렸다.

그의 밝은 미래, 희망찬 꿈, 성공적인 커리어… 모든 게 한순간에 부서지는 소리가….

그 비장하면서 어딘가 해맑은 목소리에 돌려줄 수 있는 건 ‘나중에 얘기하자’가 전부였다. 간신히 웃는 낯으로 전화를 마무리한 오스카는 충격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곧장 매독스를 찾았다.

- …결국 그렇게 됐군요.

“어, 어떡하죠?”

- 어차피 한 번쯤 겪을 일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이야길 나눠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매독스에게 다시 연락이 오기 전까지 오스카는 거의 조울증 환자처럼 살았다. 매독스의 유능함을 믿으면서도 도현의 단호함이 걸렸다. 도현은 허투루 말을 꺼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는 몇 번이고 심사숙고한 결과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 미스터 리의 생각이… 너무 확고하더군요.

이처럼 도현의 단호함과 결단력이 원망스레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우환이라도 생겼냐며 걱정했다. 그들을 붙잡고 전혀 괜찮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고 싶은 걸 보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건 확실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발레 아카데미를 구경하는 내내 거의 이 문제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을 정도였다. 서혜나와 도현이 부담감을 느낄까 봐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곧 그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레스토랑에 와서 앉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지만, 오스카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래도 주문은 마치고 입을 연 게 어딘가. 힘냈다, 나.

그는 최대한 차분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오스카도 어린아이를 붙잡고 징징대거나 강요하는 어른이 얼마나 이상하고 꼴불견인지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약 그렇게 해서 마음이 기울 위인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볼 의향이 있었다. 뭐, 결과적으로 하지 않았으니 된 일 아닌가? 뭐든 생각보단 행동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어쨌든 오스카는 참아냈다. 놀랍게도 좋은 어른이자 좋은 형으로 계속 남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매니저로서의 욕심보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앞서다니.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으면서도.

“이게 답답하게 들리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오스카, 전 아직 열 살이고… 좀 더 많은 변화를 겪어보고 싶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본을 볼 때 빛나던 눈동자가 저를 향하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저런 말을 듣고 어떻게 말려….

가끔 기계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매독스도 저 모습을 본다면 빛에 정화된 악마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지 않을까. 오스카의 상상 속 매독스가 퇴치되어 괴로워하며 사라졌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봤자 열 살짜리 아이의 다양한 인생 경험을 막는 속세에 찌든 어른이 될 뿐이었다. 혹시 의도한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떠보았지만, 말간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자 오스카는 거의 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아무리 매니저라고 한들, 계약서상에 묶이지 않은 내용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기도 했다.

“저희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봤어요. 괜찮다면 들어 보실래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예요.”

“네… 듣고 있어요….”

오스카가 슬프게 답했다. 오히려 서혜나의 말에 이 문제가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게 더 절절히 느껴졌다.

“일단, 오해가 좀 있는 거 같은데 우리가 한국에서 평생 살겠다는 건 아니에요. 남편과 저는 도현이 우리의 고향인 곳에서도 살아보길 원한 거뿐이니까요.”

“그, 그건… 다시 미국에 올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게… 오, 감사합니다.”

도중에 트레이를 끌고 온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놓으면서 대화가 끊겼다. 친절하고 젠틀한 낯으로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남자에 오스카는 거의 애가 닳아 죽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트러플 오일이 들어갔든 가솔린이 들어갔든 전혀 상관없으니 빨리 다음 말이나 듣고 싶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팁을 챙긴 웨이터가 왔을 때처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트레이를 몰고 사라졌다. 오스카는 그 소리가 멀어지기도 전에 조급히 입을 열었다.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얘기인가요?”

너무 초조한 티가 났나 싶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거의 포기했다고 한들, 찬란한 미래가 예약 중인 게 89% 확실한 배우가 먼 동양의 나라로 간다는데 손수건이나 흔들며 배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는 정확한 기간을 정해놓지 않았어요.”

“그 말씀은….”

“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어요. 그리고… 도현은 한국에 가면 이곳의 아트 스쿨과 비슷한 곳에 지원할 예정이거든요. 그런 학교에 가면 일정도 자유로워서 미국에서 촬영할 일이 있더라도 충분히 조정 가능할 거예요. 이 기간이 너무 길어져서 곤란하면, 유학 개념으로 이쪽에 머물며 학교에 다니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고요.”

서혜나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와 남편도 도현의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도현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울 거예요.”

조금만 방심하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믿음이 가는 태도였다. 사업을 한다더니 괜히 대표가 아니었다. 오스카는 애써 흔들리려는 마음을 붙잡았다.

저렇게 말하니 별것 아닌 거 같아도 그가 이곳에 있냐, 저곳에 있냐 하는 건 차이가 크다.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누구나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곳은 말 그대로 배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성지였다. 온갖 곳에 기회가 널려 있고, 본인이 준비만 되어 있다면야 언제든지 라이징 스타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곳. 그렇기에 모두가 선망하는 곳.

그렇지만….

오스카가 차분한 검은 머리칼과 똘망똘망한 눈, 희고 단정한 얼굴을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단 많이 성숙해지고 키도 컸지만….

도현의 말처럼 그는 고작 열 살이었다.

오스카는 그 나이 때 학교 가는 게 가장 힘들고 중대한 일이었다. 하는 거라곤 수업 시간에 졸기와 친구들과 몰려다니기, 엄마 아빠한테 귀여움받는 거밖에 없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나이가 두 손가락을 채우기도 전부터 연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런 아이들을 매니징하는 게 오스카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잘 알았다. 어려서부터 일에 매진하는 아이들이 어떤 결핍을 가지고 크는지 말이다.

그리고 아직 졸업 전까진 시간이 꽤 남았다. 또 아는가. 그사이 마음이 바뀌거나 어떤 신박한 해결책이 마법처럼 등장할 수도.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알지만 원래 이쪽 판은 불확실함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일단, 알겠습니다.”

오스카가 말과 동시에 참고 참았던 긴 숨을 내뱉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결국엔 항복의 표시였다.

* * *

주말에 등록하러 왔던 터라 첫 비기너 클래스는 빠르게 돌아왔다. 실상 일요일에 좀 쉬고 일어나니 월요일이었다.

학원에 도착해 세나에게 물어봐 비기너 클래스를 진행하는 스튜디오 내로 들어간 도현은 신선한 충격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가지각색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건 좀 놀라운 정도였다.

저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부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까지. 넓은 스튜디오는 거의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서로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별에 대한 관념은 한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임과 별개로, 발레가 좀 더 대중화되고 활성화된 건 맞는 거 같았다.

비기너 클래스는 재미있었다.

대체로 어린아이들은 유연성이 좋았고 성인은 뻣뻣했다. 의외인 건, 이곳의 유일한 할아버지가 유연성이 아주 좋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자 그는 원래 탱고를 했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비기너 클래스 교사는 유독 도현의 주변에만 오면 탄식했다.

“잘하네….”

칭찬이긴 하지만 ‘더 빨리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류의 아쉬움이 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실제로 이곳은 세 살짜리 아이부터 가르쳤다.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발레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잘하는 이유는 이미 한번 익힌 동작이었기 때문이라서 실제로는 몸치에 가까운 도현은 괜히 양심이 찔렸다. 왠지 속이는 기분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열 살이면 그렇게 늦진 않았어. 운동을 안 한 거치고는 뼈대도 잘 잡혀 있고 틀어진 곳도 없고. 익히는 것도 빠르고 집중력도 좋고 말이야. 가끔 동작이 어색하긴 한데… 그건 처음이라 그런 거니까.”

그녀는 이미 도현이 무용의 길을 밟는다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었다. 남자애가 발레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 진지하게 발레리노를 꿈꾸는 아이들이라서 더 그런 거 같았다.

그 오해를 어떻게 풀어줄까 고민하던 도현은 결국 포기했다. 내일이면 끝나는 수업이기도 하고, ‘저 사실 배우예요’라고 말하는 게 은근히 자랑 같아 꺼려져서였다.

오해는 의외의 방법으로 풀렸다.

“그 앤 일찍 시작했어도 무용수가 되진 않았을걸.”

“네?”

대화에 끼어든 할아버지에 교사가 되물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인자한 얼굴로 도현을 향해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어. 영화배우 맞지?”

“아… 네, 맞아요.”

내심 누군가 알아볼 수 있겠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이곳에서 가장 연세가 높은 할아버지가 될 줄은 몰랐기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허허 웃었다.

“아주 멋진 배우야. 우리 손녀딸도 좋아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본 것 같아…!”

젊은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곧 ‘영화, 그 제목이 뭐였지…. 아! Freak! 너 거기 나온 애 맞지?’ 하며 물어왔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시작으로 한마디씩 나왔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았고, 누군가는 시트콤을 보았으며, 누군가는 토크쇼를 보았다.

출연한 영화도 크리스마스 영화로 히트 쳤고, 시트콤은 애초에 가장 인기 많은 틴에이저 시트콤이었으며, 토크쇼는 날고 기는 토크쇼 중에서도 유명한 랜디 쇼였기에 이런 상황이 펼쳐진 거 같았다.

도현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기묘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미국에서는 그런 경험이 적어서 더욱 그랬다. 이제야 ‘당신은 이제 막, 할리우드에 이름을 퍼뜨리기 시작했다고요.’라고 참담히 통탄했던 매독스가 이해되었다. …조금 더 미안해졌다.

“자, 수업에 집중해야죠! 궁금한 건 수업이 끝나고 묻도록 해요.”

소란스럽던 스튜디오 내부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금방 조용해졌다. 도현도 수업 중에 관심을 받는 게 내심 부담스러웠던 터라 안심했다가.

“연기는 서른 살 넘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하지만 발레는 네 몸이 굳기 전에 시작해야 하지….”

방심한 사이 슬쩍 말을 흘리고 지나가는 선생님에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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