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2)화 (263/582)

제262화. 선택과 집중 (14)

도현이 최종적으로 받은 평가는 Primary B반이었다. 7~12세의 남아로 구성된 반이면서 발레를 시작한 기간이 평균 6개월인 아이들을 모아둔 반이었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배운 것에 비해 높은 평가였는데 아무래도 비기너 클래스 교사가 그를 높게 본 게 틀림없었다. 배정된 반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에 도현은 등록 날 받았던 책자를 뒤적여 P/B class의 교사를 확인했다. 그의 얼굴과 이름을 보고 머릿속에 잘 저장해 두었다.

며칠 뒤.

아침부터 해리 선생님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다. 뭔가 잔뜩 신난 것 같기도 하고 애가 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의 시선이 향하는 게 자신이라는 거였다.

“너 뭐 잘못했어?”

“아니?”

“그럼 해리가 너한테 잘못했어?”

도현은 어제 일을 곰곰이 되짚어보다가 곧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니콜라스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그만큼 해리의 표정은 이상했다.

“자, 조례 끝!”

후딱 지나간 조례에 해리 반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오늘도 수업 잘 듣고, 복도에서 뛰지 말고’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듣는 건 아무리 애정이 어린 행동이더라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강렬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 * *

“…사실 제가 엄청난 사고를 친 건가요? 미리 말하겠지만, 그건 제 의도가 아니었을 거예요.”

“사고? 오, 사고. 그래, 사고라면 사고겠지.”

해리의 부름에 따라 교무실로 간 도현은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무실 안의 선생님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일제히 쳐다보는 건 조금 섬뜩한 광경이었다. 놀라운 건 그 멤버에 교장 선생님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거였다.

그가 인자하게 두 팔을 벌렸다.

“얘야,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구나. 널 한 번 안아봐도 되겠니?”

평소에 화단 앞에 쭈그려 앉아 먼지를 호호 불거나-매일 흙먼지가 날리는 곳이라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수업을 할 때면 어느샌가 몰래 다가와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던 그가 점잖은 체하며 말하자 도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론 괜찮지만… 일단 제게 무슨 일인지부터 알려주시면 더 좋을 거 같은데요.”

“그럼, 그럼! 허허, 우리 도리토스가 그러는데 말해야지.”

진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더니, 언제부턴가 교장 선생님조차 그를 도리토스라고 불렀다. 그것까진 그러려니 해도 더 황당한 일은 따로 있었다.

도현이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코너에 몸을 숨기고 선 교장 선생님이 손바닥을 홱홱 흔들었다. 뭐 하는 걸까 싶어 멀뚱히 구경하니, 그가 험험, 헛기침을 하며 코너에서 걸어 나왔다. 두 손은 뒷짐을 진 채였다.

도현이 눈을 깜빡이자 가까이 다가온 그가 뒷짐을 슬쩍 풀었다. 그 뒤에서 나온 바스락거리는 빵빵한 봉지는 다름 아닌 도리토스였다….

담임 선생님한테 들키지 말고 잘 먹으라며 손에 억지로 넘기고 윙크하던 모습에 얼마나 황당하던지.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헛웃음부터 나왔다.

“자, 이걸 좀 보렴!”

교장 선생님이 그의 앞에 하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건 익숙한 양식이었다. 한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비단 그뿐만 아니라, 도현이 출연했던 라디오를 본 이들이라면 거의 봤을 것이었다.

AMC 결과지.

그걸 보자 도현은 이 상황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결과 발표가 오래 걸릴 때는 한 달이 넘는 경우도 있다더니, 이번엔 좀 빠르게 나온 모양이었다. 도현이 결과를 확인하는 사이 줄리아가 말했다.

“이 정도면 나사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사가 아니라 멘사일걸요. 나사는 항공우주국이고요.”

“아… 잠깐 헷갈렸어요. 진짜예요!”

줄리아가 다급히 말했지만, 거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결과를 확인한 도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아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도현은 차분히 확인했다. 점수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AMC 8과 마찬가지로 AMC 10은 25문항이었는데, 이전 시험에서 모두 풀었던 것과 다르게 도현은 이번에 18문항밖에 풀지 못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했어.’

두 시험 모두 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AMC 8은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그래, 힘을 내!’라는 느낌이라면 AMC 10은 ‘이거 풀 수 있어? 진짜? 그럼 한 번 더 꼬아야지. 이건? 하핫, 이제 못 풀겠지?’ 이런 느낌이었다.

어렵고 말고를 떠나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여러 번 계산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길었다. 어느 정도 대충 풀고 넘어갔다면 몇 문제 정도는 더 맞혔을지도 모르지만, 도현의 성격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푼 18문제를 모두 맞혀서 개당 6점, 거기다가 풀지 못한 7문제는 기본 점수 1.5점으로 총 150점 만점에 118.5점.

도현의 눈이 옆쪽으로 옮겨갔다. Honor 칸에 써진 글씨 중에 ‘AIME Qualifier’란 부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주변의 어른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자, 반응해 봐!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우리는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그리고.

종이를 곱게 쥔 도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턱짓을 따라 주변을 에워싼 어른들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도로 위로 올라왔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네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괜찮다고? 하느님 맙소사! 다시 봐봐! 도현, 이건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얘야. 네가 지금 무슨 일을 해낸 건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말이다, 이건….”

“세상에, 동양인은 겸손이 문화라더니! 그렇게 기쁨을 참을 필요 없단다!”

일단 도현이 동양인은 맞아도 동양에서 산 적은 없었기에 낯선 선생님의 생각을 틀렸다. 도현은 그 생각을 정정해주는 대신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어른들의 불신 가득한 목소리 위로 맑은 웃음소리가 얹어졌다.

도현이 웃음으로 찡그려진 눈가를 펴내며 말했다. 목소리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이게 놀라운 일인 건 말해주시지 않아도 알아요. 저도 많이 놀랐어요.”

모두의 이목이 자신을 향할 때 괜히 한번 튕겨보고 싶은 건 모두 한 번쯤은 가지는 충동 아니던가? 일단 도현이 아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랬다.

도현이 키득키득 웃자 해리가 힘 빠진 얼굴을 했다.

“그런데 정말 아까워. 한 문제만, 아니 두 문제만 더 맞혔다면 상위 1퍼센트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한 선생님이 말했다. 아까 동양의 문화를 언급하던 선생님이었다. 그에 다른 선생님이 눈치를 주었다. 지금 애가 이렇게 잘했는데 그게 무슨 힘 빠지는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도현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한 문제라면 모를까, 두 문제가 더 필요했다면 그건 더 이상 아까운 수준이 아니지 않나. 대신 그는 궁금한 걸 물었다.

“이번 상위 1퍼센트 컷오프가 몇 점인데요?”

“125.5야.”

대답한 건 해리였다.

125.5. 확실히 한 문제 더 맞혔다면 123점이니 두 문제 정도는 더 풀었어야 하는 게 맞았다. 아예 미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던 터라 크게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도현의 눈이 다시 결과지로 향했다.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AIME Qualifier’란 글자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AIME는 미국 수학 협회(MMA)에서 AMC 10과 12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을 초청하는 대회였다. AMC 10의 경우, 이번에 응시자가 대략 2만 9천 명이었는데 400명가량이 AIME에 초청되었으며 그중 한 명이 도현이라고 했다.

이 시험에서 대략 500명 안에 든 학생이 미국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인 USAMO 출전권을 얻고 또다시 12명 안에 든 학생이 수학 올림피아드 여름 캠프, MOSP에 참가하고 여기서 결정된 마지막 6명이 미국 대표로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출전권을 얻는 피라미드 식이었다.

왜 이렇게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러니까 결국 미국 대표로 활동할 학생을 뽑기 위해서….”

옆에서 해리가 계속해서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도중에 끊기도 애매한 게, 도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해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어째 당사자는 도현인데 그들이 더 설레 보였다.

특히 교장 선생님은 ‘오, 그렇군.’, ‘세상에, 그게 진짠가?’, ‘허어, 쉽지 않구먼’ 가장 다채로운 리액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인공은 도현인데 도현이 소외된 기이한 풍경이었다.

음. 나 사실 가도 되는 거 아닐까.

슬슬 그런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려 강렬하게 응시하는 해리의 모습에 도현의 어깨가 튀었다. 설마 다른 생각하는 거 들킨 건….

“…그러니까 결론은. AIME에 응시할 거지?”

아니네.

도현은 내심 안도하며 그의 질문을 되짚었다. 그러다 눈매를 찡그렸다. 해리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건데 일이 좀 커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분이 별로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부담되는 건 사실이었다. 작년 11월에 시험 보고, 이번 2월에 시험 보고 또 시험….

도현은 잠깐 아득해졌다.

물론 도현이 수학 문제를 푸는 걸 즐거워하는 편이기도 하고, 지난 시험이나 이번 시험 때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의 인식과 달리 도현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시험에 짜릿함이나 희열 따위를 느끼진 않는단 소리였다….

도현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미적거리자 해리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얼굴에 너무 뚜렷하게 ‘나 경악했음’이 쓰여 있어서 도현은 마치 엄청나게 비윤리적인 일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설마… 나가기 싫니?”

“그 일단,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어, 또… 이제 오디션을 보러 다닐 거 같은데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이 시험은 3월에 있어! 힘든 건 이해하지만, 마음 굳게 먹고 조금만 더 고생하면 끝이야! 선생님이 딱 붙어서 도와줄 테니까…”

“해리 선생님, 너무 애한테 강요하지는 마십시다.”

교장 선생님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해리를 가로막았다. 도현은 감동에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독특한 분이긴 하시지만 역시 학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

“험, 그러니까. 힘들어서 싫으면 준비는 안 하고 그냥 시험만 보는 건 어떤가?”

“…….”

“교장 선생님! 도현은 조금만 더 하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아이라고요!”

“내 당연히 알지. 그걸 모르겠나? 여기 있는 우리 도리토스는 우리 학교에 다시는 없을 천재 아닌가.”

꽤 품위 있게 말했는데 굳이 도리토스라고 말해서 좀 깼다. 그가 뒷짐을 지길래 도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확인했다.

“그래도 말이야.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키다가 수학에 학이라도 떼면 어떡하나. 그러니까 적당히 중간 지점을 찾아서, 서로 좋게 좋게 가야지.”

줄리아는 생각했다. 어디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아, 아이 성적을 두고 말씨름하던 부부였나.’

줄리아가 깨달은 눈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구경꾼처럼 빙 둘러선 선생님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주고받는 해리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

“저, 제 의견은….”

“아뇨, 교장 선생님. 생각해 보세요. 저 아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상상이 되세요? 이건 아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라고요!”

“꼭 그게 지금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어차피 도현은 앞으로 시간이 많고….”

“…….”

나 가면 안 될까.

도현이 텅 빈 눈으로 그들의 설전을 듣다가, 줄리아의 손짓에 따라 교무실에 마련된 휴게용 소파에 앉았다. 그래, 수업 시작 전에는 끝내주시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