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선택과 집중 (15)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종이 쳤다. 언쟁을 벌이던 두 사람은 그게 퍽 못마땅한 듯싶었다.
둘이 결론 내봐야 내가 싫다고 하면 끝인데.
도현은 애석한 눈길로 그들을 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원래라면 종 치기 전에 반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해리, 종 쳤어요.”
“아, 그래. 가야지.”
해리가 머리를 긁적이곤 책상에서 교재를 챙겼다. 교장 선생님도 더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찡긋했다.
“가자.”
해리가 먼저 교무실 문을 열고 앞에서 기다렸다. 도현도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들께 가볍게 인사한 후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종이 친 뒤라 복도는 조용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벽에 부딪히며 울려댔다.
도현이 조용한 해리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방금까지의 열띤 기세로 보았을 때 둘만 남은 지금 무언가 말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지켜본 너는… 정말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 너는 네가 하고자 마음먹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최고가 될 수 있을 거야. 넌 결심한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걸 받쳐줄 재능까지 있으니까.”
탁.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난 네게 너의 가능성을 알려주고 싶었어. 넌 정말 뭐든 할 수 있는 아이란 걸 말이야. 혹시라도 네가 너무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서 그것만 보게 될까 걱정스러웠거든.”
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내 태도가 네게 부담이 되었을까?”
“…….”
아침부터 결과를 확인한 해리는 완전히 흥분 상태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시니어도 아니고 주니어인 학생이 AIME에 초청되었다니. 특히 수학 올림피아드 반을 맡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몇 번이고 본 것을 다시 보고 뒤집어서도 보고 동료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카메라로 찍어서 확인할 만큼 경악스러웠다.
이건 정말, 그동안의 평가를 완전히 없애고 재생성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똑똑하단 것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이건….
그도 살면서 그런 이야길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옆옆집에 사는 토마스의 친구의 아들의 친구가 엄청난 천재라 15살에 옥스퍼드를 갔다더라, 옆 학교를 졸업한 이사벨의 형제의 친구의 자매의 육촌의 조카가 하버드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폭탄 제조 연구에 몰두했다가 나사에 스카우트되었다더라, 하는.
정말 해리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지금부터 도현이 과학 분야에 투신한다면 교과서에 실릴 과학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연기를 그만두지 않아도 좋았다.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계를 지배했던, 단연코 그 시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헤디 라마르도 낮에는 배우였지만 밤에는 발명가가 아니었던가. 그녀의 업적은 당시에는 묻혔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사를 바꾼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것과 정말 어떠한 업적을 만드는 게 다른 일임은 알아도 망상에 가까운 공상은 무럭무럭 피어났다. 나중에는 천재의 주니어 시절 담임 선생님으로서 인터뷰하는 상상까지 갔다.
해리는 자신의 상상력이 이토록 풍부한지 오늘 처음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공계가 아니라 인문계로 갈 걸 그랬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이 날뛰던 흥분이 가라앉은 건 조용한 복도에 다다르고 난 후였다. 주변이 고요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머리가 좀 식었다.
그러고 나니 방금까지의 추태가 영화 필름처럼 촤라락 펼쳐졌다. 그중 해리를 가장 괴롭게 만든 건 공허한 눈으로 소파에 앉아 줄리아가 조달해주는 쿠키를 기계적으로 씹던 도현의 표정이었다.
아니, 어린애가 무슨 영혼이 없어….
그 영혼 없는 표정을 만든 게 자신임을 알아 더욱 멋쩍어졌다. 도현이 괜히 넥타이를 다듬는 해리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해리가 저를 신경 써주시는 거 알아요.”
해리는 도현의 삶의 역사를 모른다. 연기가 어떤 의미이고 왜 그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러니 그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알려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만히 언쟁을 벌이는 걸 듣고 있는 게 힘들긴 했지만, 기분이 나빴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눈을 감자 인상 좋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 나 기억나니? 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었잖아. 하하, 정말 잘 컸구나. 선생님이 널 참 많이 보고 싶었는데. 매정한 녀석. 인사 한 번 하러 오질 않는구나. 선생님이 널 많이 도와줬는데, 기억나지?
옆에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안 친하신 거 아닌가요? 에헤이, 오랜만이라 좀 어색한 거죠. 얘가 어렸을 때부터 낯을 좀 가렸어요, 하하. 잠깐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 웃는 낯에 자글자글 맺힌 주름이 없던 때를 기억해냈다.
깔끔한 델마 아카데미의 건물과 달리 좀 노화되고, 어딘가 오래된 느낌의 공간이었다. 탈탈탈,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창문으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탁, 탁. 30센티 길이의 자가 책상 모서리와 부딪히며 일정한 소리를 냈다. 권위를 내세우길 좋아하는 남자가 한 몸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 너, 내가 체험학습비 오늘까지라고 했어, 안 했어? 엉? 지금 나한테 도전하는 거야?
쿡. 자 끝으로 어깨를 찔렀다. 밀려나고 싶지 않은 오기에 버텨 섰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 안 가겠다고? 허어.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체험학습비 낼 돈이 없어서잖아. 왜, 부끄러워? 사실이잖아. 어? 내가 못 할 말 했어?
귀찮고 성가신 것을 본 얼굴로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 이래서 고아들은. 왜 학교 주변에 고아원이 있어서… 쯧. 학교가 무슨 기부 단체도 아니고.
뒤로 숨긴 두 손이 분노인지 모멸감인지 모를 감정에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쥐였다가, 체념한 듯 툭 풀렸다.
도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정작 해리의 입장에서는 그냥 조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이 행운이 당신에게 갔다면 좋았을 텐데.
도현이 눈을 뜨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잘 알고 있으니 괜한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는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걸요. 해리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해리는 원하는 대로 말해도 괜찮아요.”
진심으로 괜한 걱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긴가민가하는 얼굴에 도현은 말을 덧붙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도현이 이런 표정과 이런 말투로 말하면 사람들은 대게 재수 없어하며 수긍하곤 했다.
“어차피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건 저예요.”
“…어, 그래.”
역시나 해리의 표정이 좀 떨떠름해졌다. 이내 그가 씩 웃었다.
“그래,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네가 가끔 나보다 더 어른스럽단 사실을 깜빡했다, 내가.”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도현도 그를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반 앞에 도착하자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해리가 뒷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 자리로 돌아가렴. 이와 관련해서는 네 말대로 네가 좀 더 고민하고 결정해서 알려줘. 이 녀석들아! 수업 시작했는데 누가 돌아다니는 거야? 다들 자리에 앉아! 실시!”
단숨에 부산스러워진 교실에 도현이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지나가던 길에 툭, 치는 감각이 느껴져서 보니 니콜라스였다.
뭐, 래, ?
입 모양으로 말하는 그에 도현이 이따가 말해 주겠다며 입 모양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았다.
수업 시작이었다.
* * *
“음, 그렇구나. 그것참… 곤란하네.”
말 사이사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을 하면서도 실실 웃는 입매는 전혀 곤란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흠. 그렇단 말이지. 그거참 곤란하네, 곤란해-”
운전대를 잡은 서혜나는 거의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하교 후 도현의 결과지를 보고 이야기를 들은 후 쭉 저 상태였다.
“너무 잘나도 문제라니까. 정말, 세상이 우리 아들을 담기에는 너무 좁은 거 아닌가 몰라.”
같이 고민해 보자는 의미에서 꺼낸 얘기였는데 일단 엄마는 한동안 계속 저럴 거 같았다. 도현은 그녀가 마음껏 기뻐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지금은 상의하긴 글렀으니 내일이나, 그녀가 좀 차분해졌을 때 다시 진지하게 말을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도현은 문제를 잘 보관해 두었다.
세상에는 수학 경시 대회 말고도 흥미롭고 중요하며 즐거운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오늘은 도현이 본격적으로 P/B 반에 배정되고 첫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 * *
“너구나.”
도현은 저도 모르게 작게 감탄했다. P/B 클래스 교사의 첫인상은 이거였다.
멋있다.
책자에 들어간 흑백 사진을 볼 땐 몰랐는데, 실제로 본 그는 굉장히… 잘생겼다. 에드워드가 ‘놀랍도록 잘생긴 미국인’의 표본인 느낌이라면 그는 좀 더 자유분방한 느낌이 강했다.
마누엘 시우바라는 이름을 봤을 때 브라질 사람인가 싶긴 했는데 실제로 그쪽 계열이 맞는 거 같았다. 정확한 이름은 좀 더 길었다. 마누엘 올리베이라 두스 시우바였던가.
그리고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한평생 운동에 헌신한 몸이었다. 연습복을 입고 있어도 길고 단단하게 짜인 근육이 숨겨지진 않았다.
“나는 마누엘 시우바야. 마누엘이라고 불러.”
“이도현이요. 도현이라고 불러주세요. 발음이 어렵다면 디도 좋아요.”
아무리 그의 별명이 도리토스라고 한들 초면인 사람한테 그렇게 불러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디? 정감가고 좋네. 보자, 일단 반듯하게 서볼래?”
그는 도현의 주위를 빙빙 돌며 무언갈 확인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틀어진 곳은 없네. 잘못된 습관이 있는 애들은 어려서부터 척추가 휘곤 하거든. 넌 그러지 않아 다행이야. 팔다리도 길고 아주 좋아.”
체형을 확인하는 거였나 보다. 도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병원에 있을 때 기운이 조금이라도 생긴 날이면 스트레칭을 한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야. 네 수준이 다른 아이들과 같아질 때까지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요구할 거거든.”
마누엘이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방하게 씨익 웃었다. 긴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가자 더 잘생겨 보였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내 클래스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잘해보자.”
“잘 부탁드려요.”
그가 아직 수업 전이니 몸 푸는 걸 도와주겠다며 도현에게 간단한 스트레칭을 시켰다. 꽤 유연한 몸에 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점점 아이들이 스튜디오 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처음 보는 얼굴이 흥미로운 거 같았다. 흘긋 보는 게 아니라 대놓고 응시했다. 저들끼리 속닥거리기도 했다.
“마누엘! 얜 누구예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누군가 묘한 거리감을 깨고 훅 다가왔다.
“오늘부터 함께할 동료야. 발레는 시작한 지 별로 안 됐고. 네가 많이 도와줘.”
“제가 그런 건 또 잘하죠. 안녕?”
소년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햇빛에 잘 그을린 것처럼 어두운 피부색이 이국적이었다. 태닝한 건 아닐 테고 혼혈이나 마누엘처럼 라티노 같았다.
샌디에이고를 포함해서 캘리포니아주는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큼 라티노가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당장에 다비드만 해도 엄마는 게르만, 아빠는 라티노였다.
도현은 벽에 대고 다리 찢기를 하던 상태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틀어 손을 맞잡았다.
“너 되게 유연하네.”
“이제 놔줄 수 있을까? 허리에 무리가 가서.”
그리고 장난기가 많은 거 같았다.
“그럼. 마누엘! 저도 옆에서 몸 풀어도 되죠?”
“당연하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소년이 냉큼 옆에 와서 앉았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허리를 숙이는데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났다.
“나는 여기 다닌 지 일 년 정도 됐어. 이 반에서는 오래된 편이야. 아마 한두 달 뒤에는 A반으로 옮겨 갈 거 같지만, 그 전까지는 친하게 지내보자.”
“응, 좋아.”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너 혼혈이야? 아니면 아시아?”
“혼혈은 아니야.”
“그래? 난 나처럼 너도 좀 섞인 줄 알았어. 나 여기서 동양인은 처음 봐.”
그러면 이 따가운 시선은 뉴 페이스라는 이유만은 아닌 건가. 샌디에이고는 유색 인종이 많은 도시라 의외였다. 한인 타운 같은 곳은 이쪽 해안가와 좀 거리가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자, 이제 다들 중앙에 모이자.”
벌떡!
마누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난 소년이 도현의 눈앞에 손을 뻗었다. 잡고 일어나란 건가 싶어서 마주 잡자 몸이 붕 뜨며 위로 올라갔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해? 가자!”
“어, 응….”
소년을 따라가던 도현은 뒤늦게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
“왜? -어? 너 이름이 뭐더라? 해리? 로널드?”
소년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오 분 동안 대화를 하면서 단 한 번도 통성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기억이 안 난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네 이름 까먹었나 봐. 다시 말해줄래?”
어색하게 웃으며 묻는 얼굴에 도현은 차마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