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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64)화 (265/582)

제264화. 선택과 집중 (16)

소년의 이름은 단사 가야르도였다. 크리스천인지 중간에 아브라함이라는 세례명이 있긴 했다.

이름을 모르는 건 도현도 마찬가지라 통성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는데, 단사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입꼬리가 당겨 올라가자 볼에 인디언 보조개가 푹 파였다.

도현은 가까스로 통성명을 마친 후 별생각 없이 마누엘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디라고 불러달라고 했는데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이랬다.

“내 친구 중에도 이미 디라고 부르는 애가 있거든. 물론 걔는 빅-디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널 리틀디라고 부르면 네가 꼭 빅디의 동생 같잖아. 걔랑 넌 정말 안 닮았다고.”

납득이 되는 이유였다. 그렇게 단사는 또래 아이 중 유일하게 도현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아이가 되었다.

도현은 위기감을 느꼈다.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봐도 동작을 취하는 데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도현은….

허둥지둥.

“디! 팔 더 뻗고, 허리 곧게!”

머리론 알고 있었다. 다만 몸이 안 따라줄 뿐이었다. 여유롭게 동작을 취하고 있던 단사가 고생하는 도현을 보고 킬킬 웃었다.

도현은 조금, 아주 조금 억울해졌다.

수업 시작 전,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요구한다던 말은 너를 한계까지 쥐어짜서 네가 할 수 있게 만들겠단 소리였다…. 어쨌든 할 수 있는 건 맞으니까.

그 과정에서 도현이 아무리 죽어 나가더라도 말이다.

“좋아, 디. 넌 그 동작 스무 번을 반복해. 자, 다른 애들은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원, 투.”

잠깐 숨을 돌린 도현은 이 수업을 듣고 있는 7살부터 12살까지의 아이들이, 아이치고 말랑말랑하기보다는 늘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운동을 다짐한 이유였던 체력 증진은 확실히 이루어질 거 같았다.

아니, 체력뿐일까.

에드워드는 몸매를 가꾸기 위해서 매일 세 시간이 넘도록 운동을 한다고 했다. 도현은 그가 진지한 낯으로 충고했던 걸 기억했다.

- 운동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해. 어릴 때 성장 호르몬이 활발해서 운동 능력도, 성장 속도도, 회복 속도도 좋거든. 너도 계속 배우 일을 할 거라면 미리미리 운동을 시작해.

그래, 결국은 다 연기를 위한 거였다. 도현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중했다. 어차피 육체의 고통을 인내하는 건 그의 강점이었다.

* * *

“살았어?”

“…아마?”

“살았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그러게?”

“정신이 나갔군.”

단사가 확언했다. 그가 털썩, 옆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다른 애들이 못 다가오잖아.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콕, 콕.

단사가 바닥에 쓰러진 도현을 찔러댔다. 도현이 미약하게 반응했다. 그게 재밌었는지 몇 번 더 찌르더니 도현이 완전히 몸을 굴려 피하자 ‘아, 어디 가’ 하며 따라왔다.

콕, 콕.

데굴.

콕.

데굴.

코….

데굴.

“어! 잠깐 멈춰… 아, 늦었네.”

단사를 피해서 구르던 도현은 무언가에 부딪혀 강제로 멈추고 말았다. 안 그래도 힘든데 계속 굴러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위를 쳐다보자.

“적응하는 건 문제 없어 보이네.”

웃고 있는 마누엘이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제집 안방처럼 바닥을 쓸고 다녔단 걸 깨닫고 화드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귓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바닥 청소를 해줄 필요까진 없어.”

마누엘이 덧붙인 말에 얼굴마저 붉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몸을 열심히 써본 적이 처음이라 정신이 너무 풀려버렸다. 도현이 뺨을 문지르는데 마누엘이 물었다.

“그래서, 오늘 수업은 어땠어? 생각보다 더 힘들었지?”

“…네.”

“네가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거기도 하고, 원래 발레가 온몸의 근육을 사용하는 거라서 처음에는 힘들어. 그래도 잘 따라오더라. 첫 수업에 그 정도 따라온 거면 정말 대단한 거야.”

그가 칭찬을 늘어놓으며 도현을 추켜세웠다. 도현은 지쳐 있던 마음이 뿌듯함으로 채워져 가는 걸 느꼈다.

마누엘은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발레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힘들고 인내심이 많이 필요해서 금방 그만두곤 한다고, 동기 부여가 필요할 때는 발레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좋다며 조언해 주었다.

“발보아 파크에서 샌디에이고 발레단 정기 공연도 하는 중인데, 안 가봤으면 거기 한번 가 봐.”

“아, 거긴 가봤어요.”

마누엘 말처럼 발보아 파크에서는 다양한 공연이 열렸다. 주말에 친구와 약속도 없고 한가할 때 도현은 서혜나와 종종 그곳에 공연을 관람하러 갔다. 발레 공연도 이미 몇 번 보았다.

샌디에이고는 문화생활을 향유하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해안가 근처라서 바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예술과 관련된 시설도 잘되어 있었다.

“그래? 그럼 다른 발레단의 공연은 본 적 있어?”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발보아 파크에서 본 게 전부예요.”

“그럼 다른 발레단 공연도 기회가 되면 한번 보러 가봐. 발레단마다 극의 해석도, 추구하는 방향도 달라서 다양하게 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되어주거든.”

도현은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반가운 것이었다.

“다음 주에 보자.”

단사가 인사하며 도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상당히 쿨한 퇴장이었다. 도현도 짐을 챙겨 스튜디오 밖으로 나오자, 다리를 꼬고 무언가를 심각하게 보고 있던 서혜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심각하게 보던 종이는 도현이 넘겨주었던 AMC 결과지였다.

…아직도 그 상태구나.

“끝났어요. 집으로 가요.”

“수고했어!”

서혜나가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겨 안았다. 땀을 흘렸던 터라 도현이 머뭇거리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고 밀어냈다. 서혜나는 아무렇지 않게 떨어졌다.

곧 두 사람은 함께 아카데미를 나왔다. 실외로 나오자 서혜나는 셔츠 주머니에 걸쳤던 선글라스를 꼈다. 선글라스 덕에 흰 피부가 더욱 돋보였다.

선글라스를 낀 늘씬하고 세련된 여성과 머리카락이 유독 까맣고 피부가 유독 하얀 소년은 눈에 띄는 조합이라서, 아카데미를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도현은 쏟아지는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고 있었다.

도현은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서혜나가 물어본 것에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누엘이 발레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면 좋다고 조언해 줬어요. 음, 샌디에이고 발레단의 공연을 몇 번 봤다니까 다른 발레단의 공연도 관람해 보래요.”

“그래?”

그러나 서혜나의 기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녀는 본래도 즉흥적이고, 결단력 있는 성격이었다. 거기다가 행복감까지 더해지면….

“그러면 보러 가야지. 다른 곳… 샌프란시스코 정도면 되려나? 여기서 비행기 타고 가면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까, 딱 좋네! 좋아!”

서혜나가 호탕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보러 가는 거니까 둘 다 멋지게 차려입고 가자. 비행기 타고 가는 김에 제일 좋은 박스석으로 구매하고… 집에 망원경이 있던가? 세상에, 벌써 설레잖아!”

이런 급전개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엄마와 산 지 어언 2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적응한 지 오래였다. 도현이 차분히 대답했다.

“좌석이 있는지부터 봐야겠네요.”

“없으면 평일에라도 가면 되지! 평일에는 자리 하나쯤 나게 되어 있어.”

“학교는요?”

“체험학습!”

단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온 외침이었다.

포지션이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닐까. 당당하게 학교를 빠지라고 주장하는 서혜나에 도현이 애매하게 웃었다.

* * *

…정말 왔다.

그것도 주말에는 박스석 자리가 없어 월요일에.

촬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디션을 봐야 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를 빠지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도현이 멍한 눈으로 창문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걱정 중이야?”

옆에서 들린 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배는 화려한 서혜나가 도현을 보고 있었다.

서혜나는 본래도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래도 그동안은 적당히 오피스 룩 느낌에 걸쳐 있었다면 오늘은 완전히 파티 룩이었다.

어깨선을 감싸는 블랙 오프숄더 드레스는 그녀와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도현이라고 다른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오늘 꼬마 신사였다.

“해리가 애타게 절 기다릴 거 같아서요.”

“…음.”

아침에 통화할 때 들렸던 간절한 목소릴 떠올린 서혜나가 부정하지 못했다.

AMC 결과가 나온 건 금요일.

도현은 해리에게 주말 동안 부모님과 상의해본 후 결정해서 알려 주겠다고 했는데, 서혜나의 불도저 같은 실행력으로 학교가 아닌 비행기에 올라타 있는 상태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본의 아니게 허언을 한 셈이 된 도현이 마음속으로 심심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쩐지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얼마 후.

비행기가 착륙했다.

두 사람은 짐이랄 것도 없이 가벼운 차림새로 내렸다. 공항에 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시선이 안 쏠릴 수 없는 복장이긴 했다.

공항을 나온 둘은 우버 택시를 불러 공연장으로 향했다. 택시가 멈춰 선 곳은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본거지,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였다.

맞은편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시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만큼 오페라 하우스는 눈에 띄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든 건물은 웅장한 멋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자 두 사람의 복장은 더는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오페라 홀을 찾은 사람들은 저마다 높은 하이힐과 드레스에 숄을 걸치고 있었고, 남성들은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래도 작은 소년이 멋있게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은 건 좀 인상 깊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거나 다정하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월요일인데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주민이 사랑하는 발레단이기도 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발레단인 만큼 인기가 많은 거 같았다.

“와… 멋지네요.”

오페라 하우스 내부는 외부의 웅장함 못지않게 화려했다. 높게 솟은 기둥과 둥근 천장, 아름다운 샹들리에. 서혜나가 비엔나가 생각난다며 중얼거렸다.

입장 시 생수를 제외한 음료는 모두 반입 금지라 복도 소파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서혜나는 어린 아들과 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샴페인을 쳐다보기만 할 뿐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도현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두 사람은 공연장 내부로 들어갔다. 수많은 좌석이 있었지만 그들의 자리는 2층 박스석이었다. 아직 공연이 시작하기 전이라 홀 안에 교향악단이 악기를 튜닝하는 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레 공연을 보러 온 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형의 영향인지 발레보다는 오늘 펼쳐질 교향악단의 연주에 관심이 더 쏠렸다.

이윽고, 1막이 시작되었다.

오늘 볼 공연은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이었다.

* * *

페어리 픽처스의 프로듀서, 데이먼 컬렌버그는 벌써 몇 달이나 그를 힘들게 하는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할리우드의 어린 배우 대부분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연기력이 괜찮다 싶으면 나이가 많았다. 나이가 적절하면 눈 색이 밝았다. 연령대와 눈 색을 맞추면 외모나 연기가 아쉬웠다,

검은색이나 암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십 대 초반의 소년.

원작자가 내건 조건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건만, 딱 맞는 적임자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캐스팅디렉터가 추천하는 인물도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다 어딘가 하나씩 아쉬웠다.

너무 까다로워서 그런가 싶어도, 어떻게 이 대형 프로젝트에서 까다롭게 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거대한 자본이 오가는 할리우드에서도 주목받을 정도로 엄청난 투자와 자본이 쏟아지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저마다 우아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잔잔하게 대화를 나누는 공간에서 그 혼자만이 심각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일에 몰두하고 살다 보니 감흥이 없어진 건가 싶어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쉬는 겸 예술적 영감을 충족하러 나온 건데 여유가 주어지니 또 일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거면 그냥 쉬지 말고 일이나 할 걸 그랬다. 그가 다시금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니 더 생각이 났다. 그는 결국 포기했다.

어차피 공연 시작도 전이니, 좀 더 생각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는 새롭게 선상에 올랐던 후보들을 머릿속으로 추리다가, 한 가지 생각에 닿았다.

얼마 전에 나름 괜찮은 애가 있긴 했는데.

데이먼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조건에도 맞고 연기력도 좋고 외모도 좋지만… 지금까지 나온 후보 중에서 가장 문제가 큰 후보였다. 곧 그는 애써 미련을 털어내 보았다. 그를 도와주려는 건지, 때마침 막이 오르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가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좋아하는 작곡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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