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5)화 (266/582)

제265화. 선택과 집중 (17)

도현이 학교를 빠지고 발레 공연을 보러 간다고 친구들에게 알렸을 때, 니콜라스는 공연의 주제를 듣고 시시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이건 주니어 스쿨 졸업 학년에 가까워진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어른스럽지 않은 걸 유치하다고 말하며 본인의 어른스러움을 강조했다.

하지만 도현은 공연을 보며 확신했다. 만약 니콜라스가 이걸 보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못했으리라고.

1막의 절정, 눈의 왈츠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무대에서는 쉴 새 없이 눈이 내렸다. 그 속에서 희고 푸른 드레스를 입은 눈꽃 요정들이 날아갈 듯 가볍게 춤을 추고 있었다.

빙글, 돌 때마다 발목 위까지 오는 베일같이 얇은 하얀 천 자락이 팔락였다. 그들이 팔과 머리에 찬 푸른 장신구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압도된 건 서혜나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두 사람은 1막이 내릴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숨을 죽인 채 공연을 지켜보았다.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자 객석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제각각 그대로 앉아서 쉬거나 공연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배고프지 않아? 잠깐 카페 갔다 올까?”

“좋아요.”

가만히 앉아서 무대를 즐겼을 뿐인데 이상하게 금방 출출해졌다. 너무 몰입해서 봐서 그런가. 도현은 서혜나와 함께 공연장을 나왔다.

카페는 4층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다 이곳으로 몰려 줄이 꽤 길었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호두까기 인형은 도현과 서혜나처럼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덕에 우아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부터 드레스를 입은 아주 어린 소녀까지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각양각색의 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도 도현을 구경했다는 말이 되었다.

서로서로 구경하며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거나 웃으며 지나가다 보니 금방 차례가 되었다.

“뭐 먹고 싶어?”

“전 초콜릿 쿠키요.”

“그거면 돼? 마실 건?”

도현이 음료 코너를 보았다. 특이한 점을 꼽자면 와인을 판다는 거였다. 당장 그들 앞줄에 섰던 노부부도 글라스 와인을 한 잔씩 들고 갔다. 도현은 주류에서 눈을 떼고 미리 봐두었던 메뉴를 말했다.

“음… 그럼 라벤더 밀크티도요.”

“그래. 주문할게요. 초콜릿 쿠키 하나랑….”

주문한 메뉴는 금방 나왔다. 두 사람은 쟁반을 들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양쪽 벽에 소파와 테이블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져 있는 터라 남는 자리는 많았다.

두 사람이 적당한 자리에 가서 앉을 때였다. 소파에 앉으려던 도현은 아주 따갑고도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시선같이 비물질적인 것이 촉각적으로 느껴질 리 없건만 뺨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도현이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너 뭐 하니?”

그 이상한 시선 교환은 서혜나가 소파에 앉고,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물티슈로 손을 닦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도로 서서 한 중년 남성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도현에 서혜나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는 분이야?”

“아니요.”

그녀의 눈빛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 같니?”

“모르겠어요.”

“먼저 눈을 돌릴 생각은?”

“…그럴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도현은 눈 깜빡임조차 줄인 채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이 너무 강렬한 건 둘째 치고, 그 눈빛에 담긴 함의는 명백히 ‘관찰’ 내지 ‘탐색’이었다.

그렇게 노골적인 관찰의 눈빛은 처음 받아보았다. 좀 더 정확히는 ‘일상’에서 말이다. 도현은 어쩐지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감이었다.

“엄마, 저기 뭐 하는 거야?”

“응? 어… 글쎄.”

옆 소파에 앉은 어린 숙녀와 보호자의 대화였다. 복도는 가로로 넓게 트이기보단 좁고 길어서 그들의 기행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도현도 그들의 대화를 들었으나 한 귀로 흘렸다.

‘뭘 관찰하는 거지.’

도현은 아무런 범죄 이력도 없었으니 찔릴 일도 없었다. 그 시선을 태연하게 맞받아치며 남자의 용건을 생각했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그야, 과거에 저런 눈빛을 받은 적이 있으니까.

‘음. 맞는 거 같지?’

도현은 잠깐의 고민 후, 엉거주춤한 자세를 반듯이 펴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전히 그를 응시한 채 일어난 표정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지도 너무 느릿하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1막 눈의 왈츠의 주인공이었던 눈꽃 요정의 드레스 자락만큼이나 희고 신비로운 얼굴에 웃음이 맺히는 광경은 퍽 인상적이었다. 데이먼 컬렌버그는 그 미소가 눈에 프레임 단위로 박히는 걸 느꼈다.

아, 그는 전율과 그것을 압도하는 환희를 느꼈다.

그는 발끝부터 올라오는 짜릿함에 환하게 웃으며 소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걸음걸이는 다소 마른 그의 몸체와 건조한 눈가에 내려온 다크서클이 주는 피곤한 인상과 다르게 단단하고 거침없었다.

그는 수천 번을 그리 해온 사람처럼 정장 안에 손을 넣어 그의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소년의 눈앞에 정중히 내밀었다. 모든 동작이 한 번에 이루어졌고 물처럼 유려했다.

“오디션을 보러 와주면 좋겠는데.”

한 텀 쉬고 재차 입을 열었다.

“생각 있니?”

* * *

데이먼 컬렌버그는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평소에 휴가는 둘째 치고 쉬는 날조차 일에 몰두하던 그가 충동적으로 쉬게 된 휴일에, 평소 즐겨 찾는 발레단의 공연을 보러 와서, 계륵 같아서 후보에는 끼워 넣었지만 차마 그 이상은 하지 못했던 후보를 마주칠 확률이란.

사람들은 보통 이런 걸 운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꽤, 성실한 운명 신봉자였다. 애초에 그는 어떠한 뚜렷한 사유보다는 순간적 영감이 더 예술에 가깝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의 휴식으로 말랑해진 두뇌에 알코올을 주입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온 4층 카페. 그가 막 줄을 설 때, 때마침 메뉴가 나왔는지 뒤를 돈 작은 신사에게 시선이 간 건 아주 무의식적인 일이었다.

이윽고 소년이 정면을 보는 순간 데이먼 컬렌버그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완벽하게 차려입은 소년의 모습은 그 생각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는 이 운명이 정말로 운명인지, 아니면 운명인 척 다가온 함정인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신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시련을 던져주곤 하시니.

그는 끈덕지게 소년을 관찰했다.

그가 복도를 걸어와 그가 서 있는 곳 주변에 자리를 잡고, 소파에 앉으려다가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든 그 순간까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하느님 맙소사, 그는 눈동자 색마저 어두웠다. 그가 지금껏 봐온 그 어느 후보보다 가장 검은색에 가까웠다.

그는 치열한 갈등 상태에 빠졌다.

배역의 조건은 검은색이나 암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십 대 초반의 소년. 조금 더 구체적인 것까지 따지자면 귀족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매력적인 소년.

신은 언제나 시련을 내려주심이 이로써 확실해졌다. 모든 화살표가 노골적일 정도로 저 소년을 가리키고 있건만, 그는 놀랍게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 사실이 그 모든 화살표의 방향을 잃도록 만들었다.

소년의 인종이었다.

데이먼 컬렌버그는 이도현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후보에 올렸다가 도로 뺐던 프로필의 주인공인데, 모를 리가. 이미 그를 몇 번이고 고민에 빠트렸던 이라서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름 끼치는 연기력이나 특출 난 외모조차도, 소년 한 명을 배역에 세우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것들을 떠올려 보면 빛을 잃고 희미해졌다.

그에게 있어서 이도현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볼 때마다 입맛은 다시지만, 결국 아무 데도 쓸 수 없는 것.

그랬건만.

끊임없이 흔들리던 저울이 완전히 기운 건, 바람이 불지 않는 들판처럼 고요하던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 가느다란 호선에 데이먼은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을 떠올렸다. 모두가 잠든 저녁에 홀로 희게 빛나는 달과 서늘한 공기, 고요한 아름다움과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안온한 위태로움.

그래서 그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건, 그가 주인을 찾아 헤맸던 배역, 의 두 번째 주인공, 르옌 누바라의 상징이었다.

* * *

“…오디션, 이요.”

도현이 명함에 박힌 그의 이름을 보며 말했다.

그러리라 생각하긴 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놀라게 됐다. 하단에 박힌 페어리 픽처스의 이름이 유독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도 들어본 적 있는 제작사였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부터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곳이었다.

“가 영화화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니?”

쿵, 쿵.

심장이 여기에 있다는 걸 티 내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네… 들어봤어요.”

매독스가 알려줬던 이야기였다. 작년의 일이었다. 한창 도현이 촬영하고 있을 때, 흘러가듯 말했다.

.

도현은 읽어본 적 없지만, 책 판매 사이트에서 늘 순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전 세계적으로 히트 친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런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건 초미의 관심사였다. 의 계보를 이을 판타지 영화가 등장할 것이라며, 사람들은 기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소설은 읽어본 적 있고?”

“아니요. 읽어보진 않았어요.”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지 않니?”

“가리지 않고 읽지만… 주로 고전을 즐겨 읽어서요. 읽어야 할 목록에서 후 순위로 미뤄두었죠.”

서혜나는 도현이 흥분했음을 눈치챘다. 도현은 보통 필요한 대답만 간결히 했다. 저 프로듀서라는 남성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평소에 비해 굉장히 사설을 덧붙이는 중이었다.

“어쩌면 순위가 바뀔지도 모르겠구나. 물론, 네가 오디션 제안을 승낙한다면 말이지.”

도현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떨어져 나갈까 봐 걱정됐다. 제자리에 있질 못하고 자꾸만 날뛰어서 호흡이 가빠졌다.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릴 수 있어. 한번 고민해보고 이 번호로 연락을 줘도 괜찮….”

“컬렌버그 씨.”

도현이 명함에 적인 이름을 읽자, 데이먼이 말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를 맑게 빛내며 차분히 말했다.

“저는 오늘 돌아가면 당장 를 읽을 거예요. 밤을 새워서라도 무조건이요.”

내용은 그다지 차분하지 않았다. 여지를 남기지 않고 단호히 대답하는 모습에 데이먼이 의외란 표정을 짓다가 곧 만족스러운 눈빛을 했다.

내내 차분한 낯이라 별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마 속으로 뜨겁게 태우는 타입인 거 같았다. 데이먼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언제나 열심히 하니까.

“멋진 계획이네. 네가 그걸 다 읽을 때쯤, 네게 오디션과 관련해서 연락이 갈 거야. 그때 나와 다시 보게 될 거란다.”

그가 기분 좋게 말했다.

그는 이 만남이 그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운명이 되길 바라며, 소년의 작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가 놓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