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6)화 (267/582)

제266화. 선택과 집중 (18)

집중이 안 된다.

2막이 올라가고, 극의 줄거리와 상관없이 여러 춤이 나오는 디베르티스망이 나와 꽃의 왈츠, 별사탕 요정의 춤 등등을 공연했는데 도현은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 이곳을 뛰쳐나가 서점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흥분 상태였다.

그는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회인지 알았다. 과거 매독스는 이 이야기를 꺼내며, 그의 자리가 없다는 것에 아쉬운 뉘앙스를 내비쳤다. 그만큼 의 제작은 뜨거운 감자, 그 자체였다.

그동안 도현이 작품을 고를 때 그 작품에 얼마나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지, 얼마나 흥행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하나, 그런 것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관심이 없으면 안 되지.

짧게 생각한 도현이 박스석 아래를 살폈다.

‘그도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왔다고 했으니, 여기 어딘가 있겠지.’

어두운 객석에서 사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무용한 일임을 인정하고 다시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몇 시간이나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관현악단이 이제 파 드 되(발레에서 두 사람이 추는 춤)를 이끌고 있었다. 성인이 된 마리와 왕자가 춤을 추는 장면은 퍽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정신이 다른 데로 새고 있던 도현의 시선마저 붙잡아 놓았다.

“후우.”

도현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지금 안달복달한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조금 진정하기로 했다. 다행히 마인드 컨트롤은 그에게 익숙한 일이라, 뜨겁게 타오르던 속이 점차 누그러졌다.

막이 내렸다.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리고 도현은-

벌떡!

“엄마, 지금 서점이 닫았을까요?”

“아직 열었을 거야. 비행기 타러 가기 전에 서점부터 가자.”

지금까지 공연을 감상하던 게 누구였냐는 듯 여유 없는 얼굴로 서혜나를 재촉했다. 서혜나는 참지 않고 웃었다. 속이 꽤 달아 보이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관람객처럼 발레단을 향해 점잖게 박수를 보내고 일어난 게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그들은 오페라 홀을 나서는 길에 데이먼 컬렌버그와 한 번 더 마주쳤다. 정확히는, 도현이 먼저 그를 발견했다. 아까는 너무 강렬한 눈빛과 그보다 더 강렬한 인상 탓에 몰랐는데, 그는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키는 크나 체구는 얇은 편이라 더 도드라졌다.

그때, 그도 도현을 발견했다. 버릇인지 미간을 좁히고 있던 그가 도현을 보고 안면을 펴며 웃었다. 도현은 마주 눈인사를 하며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현은 그가 제안한 배역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 저와 조건이 맞는 배역인 건가요?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결국 그의 특수한 조건, 인종에 관해 묻는 말이었다. 데이먼은 그에 꽤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 정확히는, 조건이 정해지지 않은 배역이라고 봐야지.

아리송한 도현의 얼굴에 그가 덧붙여 말했다.

- 소설을 읽으면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넌 아주 영특해 보이니까 말이야.

그건 안 그래도 활활 타오르고 있던 소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어느 정도의 불신이 담겨 있었다.

불신.

내 무엇을 못 믿는 걸까.

도현이 보기에 데이먼 컬렌버그는 좀 독특한 사람이었다. 삼 년 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처럼 간절히 보다가도 묘한 눈빛을 했다. 도현을 가늠하듯, 시험하듯, 냉정한 눈빛이었다. 도현은 정말 그가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꺼림칙하냐고 묻는다면…

아니.

도현은 아주 흥미로운 상태였다. 누군가 자신을 시험하고 판단하려 드는 건 생각보다 승부욕을 부추기는 일이었다. 도현이 눈인사에 화답하고 돌아가는 데이먼에게서 눈을 뗐다.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

도현이 서혜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말이지 이토록 설레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서혜나도 마음이 급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곧바로 우버 택시를 잡았다.

* * *

밤을 새웠다.

도현이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옆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서혜나가 느릿하게 팔을 뻗으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두 사람은 패스파인더 전권을 세 개 구매했다. 하나는 도현의 것, 하나는 서혜나의 것, 그리고 하나는 예비용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곧바로 독서 모드에 들어갔다. 도현은 원래 방에서 읽으려고 했으나, 같이 읽자는 서혜나의 제안에 거실에서 읽게 되었다. 밤을 새우는 계획을 말릴 줄 알았는데 반대로 동참하는 모습에 의아했다가, ‘말려도 몰래 볼 거잖니’라는 말에 납득했다. 이미 전적이 있는 도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새 소설을 읽었다.

도현이 테이블에 쌓인 책을 흘깃 보았다. 밤새 읽었음에도 아직 3권 초반까지밖에 못 읽었다. 소설의 두께가 상당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느린 속도였다. 문장을 날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읽고, 또 읽으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물끄러미 남은 책을 보고 있던 도현이 서혜나를 쳐다보았다.

“…응? 왜?”

“학교, 가야 할까요?”

“뭐?”

서혜나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가야지. 이제 학교 가려면 슬슬 준비해야 할 시간이잖아.”

그러자 도현이 간절한 눈과 미련이 남은 손길로 책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다 못 읽었어요….”

서혜나가 심장을 붙잡았다.

곧 그녀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학교를 이틀이나 빠지게 할 셈이야? 그게 뭐 어때서? 난 학창시절에 무단결석도 했는데. 도현이 너랑 같니? 같을 리가! AMIE에 초청되기까지 한 도현인데 나랑 비교가 말이 돼?

…….

…이 애한테 학교가 중요할까?

반박하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그래, 하루만 더 쉬자. 어차피 피곤하기도 하니까. 비행기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아서 하루만 쉬겠다고 선생님께 연락드릴게.”

화악-

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흰 뺨에 생기가 돌자 서혜나는 그만 뿌듯해지고 말았다. 아들의 꼬임에 넘어가 학교를 결석시키고 뿌듯해하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람직하진 않았지만….

“좋아?”

“네!”

뭐, 어떤가. 내 새끼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하염없이 도현을 기다렸던 해리가 들었다면 가슴을 쳐댔을 소리였다.

-탁.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도현이 눈을 감은 채 숨을 쉬었다. 그러다 입술을 안으로 오므리며 턱에 힘을 주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바르르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서혜나는 두 시간 전부터 자러 들어갔기 때문에 홀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읽었다.

는 뭐라고 딱 정의할 수 없는 소설이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기엔 환상적이었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엔 잔혹했다.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읽은 탓인지 마치 그가 모험을 시작했다가, 길고 긴 여정을 끝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 소설이 스테디셀러인지 알 거 같았다.

환상적인 이야기도 그렇지만, 어디엔가 하나씩 아픔을 품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르옌.”

데이먼 컬렌버그가 그에게 제안했던 배역이자 도현이 오디션을 보게 될 배역.

도현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일정한 소리가 울렸다.

- 정확히는, 조건이 정해지지 않은 배역이라고 봐야지.

그게 이런 의미였나.

는 신성한 나무를 중심으로 다양한 종족이 살아가는 세계, 노바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일정한 주기마다 신성한 나무는 새로 태어나고, 그때마다 나무의 힘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길잡이’가 등장한다. 길잡이는 길을 인도하는 별을 품고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길잡이는 각 종족마다 한 명씩 등장하는데, 이들이 모두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격의 증명 과정을 통해 남은 단 한 명의 길잡이만이 신성한 나무의 죽음과 탄생을 관할할 자격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길잡이를 배출한 종족은 다음 길잡이가 나타날 때까지 막대한 영광과 권력, 힘, 그리고 축복을 지니게 된다. 그들은 모든 종족을 대표하는 지도자이자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이러한 것 때문에 모든 종족은 길잡이를 배출해내길 원했다.

여기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다양한 종족’이었다.

설정상 노바우드에는 정말 다양한 종족이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인간과는 다르며, 각 종족마다 특징이 있었다.

그러니 ‘조건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나에게 조건을 맞추라는 거지?”

도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없어서도, 허탈해서도 아니었다. 도현은 도무지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설 속에는 백인, 황인, 흑인에 대한 말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다양한 종족만이 있을 뿐이고, 그들의 특징은 키가 작거나, 힘이 세거나, 뿔이 달렸거나, 날개가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즉, 도현이 르옌이 되면, 르옌이 속한 종족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특징을 가지게 된다. 지구 식으로 치면 동양인들이 종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데이먼의 불신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통 소설 속에 언급이 없었다고 해도, 미국 소설인 데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에 주연으로 동양인을 세우지는 않으니까.

그 한 명만 세운다면 모를까. 도현이 르옌이 되면 르옌의 종족 모두를 동양인으로 세워야 했다. 데이먼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거다. 아주 파격적인 시도였다.

“정말 말도 안 돼.”

아무도 동양인은 후보로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곳에 가서 내가 르옌임을 증명하고 나에게 맞추도록 만들라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데이먼 말대로 조건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불가능한 이야긴 아니나, 그렇다고 그게 가능하단 소리도 아니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가 자신을 놀렸다고, 괜한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막막해야 하는데, 어째서 난 웃고 있을까.

따르르르-

“아.”

도현의 눈이 전화기로 향했다.

- 네가 그걸 다 읽을 때쯤, 네게 오디션과 관련해서 연락이 갈 거야.

귀신같네.

우연임을 알아도 정말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온 전화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도현 본인 맞으신 가요? 저는 페어리 픽처스의….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기대를 담아, 활짝 미소 지었다.

“네, 말씀하세요.”

* * *

“…도현.”

음산한 목소리였다. 흠칫 놀란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해리는 이틀 사이 이십 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빨리 참가 신청을 해야 하는데, 월요일에는 발레 공연을 보러 간다고 체험 학습계를 내질 않나 다음 날엔 비행기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다며 병결을 하질 않나!

그는 정말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그의 기대가 부담스러워서 학교에 안 나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본 도현의 얼굴은 아주 밝았고, 환했다.

그리고.

“몸은 좀 괜찮아?”

“네. 어제 쉬었더니 괜찮아졌어요.”

“그래, 그럼… 결정은 했니?”

“…아.”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해리는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누가 저 ‘잊고 있었는데 방금 생각났다’라는 얼굴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으면 싶었다.

경악스럽게도… 도현은 AMIE와 관련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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