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7)화 (268/582)

제267화. 선택과 집중 (19)

‘아, 맞다’ 하는 얼굴을 보고 해리는 도현이 완전히 이 문제에 대해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도현은 그 문제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현이 잠깐 잊었던 건 ‘AIME 출전 여부’가 아니라 ‘AIME 출전 여부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해리’였다. 도현이 아닌 척 해리의 얼굴을 살폈다.

‘화난 건… 아닌 거 같지.’

다행히 해리는 태평한 제자에 속 터질 뿐 화나거나 하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까지 들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도현은 그가 너무 실망하지는 않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할 게 있어요.”

“말할 거?”

깜빡했다고 하겠거니 생각하던 해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도현은 묘하게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해리는 어째선지 그 생기 가득한 눈동자가 꽤, 불안하게 느껴졌다.

“제가 이번에 오디션 하나를 보게 될 거 같아요.”

“갑자기? 아니, 한동안 쉬는 거 아니었어?”

“슬슬 시작할 생각이기도 했고…. 음, 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정말 우연이었거든요. 월요일에 제가 발레 공연을 보러 갔었잖아요. 그때 우연히 프로듀서를 만났고, 그가 제게 오디션을 권유했어요. 거긴 로스앤젤레스도 아니고 샌프란시스코였는데… 저는 샌디에이고에 사는 사람이고요. 정말 엄청난 우연 아닌가요?”

도현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어… 축하해. 굉장히 기뻐 보이는구나….”

“정말요. 저에게까지 기회가 올 줄은 몰랐던 거거든요.”

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소식을 전하자 오스카는 물론이고, 그 매독스까지도 뒤집어졌다. 그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AIME는…?”

“오디션이랑 AIME랑 비슷한 시기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둘 다 하는 건 좀 어려울 거 같아요.”

도현은 똑똑하고, 숫자를 다루는 감각이 있지만, 그렇다고 세기의 천재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한다마는… 진실을 말해보자면 그저 조금 영특한 두뇌에 성인의 지능을 가졌을 뿐이었다.

AIME는 영특한 아이 중에서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들이 이를 갈고 나와 재량을 펼치는 자리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산책하듯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대회는 아니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면 최고일 테지만, 그러다가 두 마리 다 놓치면?

AIME는 모르겠지만, 이번 오디션은 그렇게 놓칠 수 없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한 일도 아니었다.

도현은 뭐든 바라는 게 있다면 그만한 각오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해리는 어느 쪽 토끼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 말씀처럼 참가만 하는 건 어떠니? 참가 자체만으로도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해리가 다급히 말했다. 며칠 전에는 교장 선생님의 의견에 극구 반대했건만, 이제는 그거라도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해리의 애타는 시선에 도현이 눈을 찡그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는 없어요, 해리.”

아니, 너 그렇게 대단한 사람 맞는데….

지금까지 도현의 행적을 보면 도저히 ‘불가능’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뭐라고 하겠는가. 본인이 그렇다는데.

“꼭 이번만 기회는 아니잖아요. 나중에 진지하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도 될 거예요. 그리고 엄마가 알려 주셨는데, AIME는 초청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대학 입시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하더라고요.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의미 없는 일이 되진 않을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고작 주니어 때 AIME에 초청받았다. 도중에 머리에 충격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좀 더 큰 후에 도전하면 더 쉬울 거였다.

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해리는 더 이상 권유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넌 똑 부러지는 애니까….”

해리가 눈물을 삼켰다. 아까웠다. 그것도 그냥 아까운 게 아니라 너무 아까웠다. 눈을 마주치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매달릴 거 같아 해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을 돌리기 위해 아무거나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오디션 보는 건 뭐니? 영화?”

“네. 아마 해리도 알고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알고 있다고?”

제작되지도 않은 영화를 어떻게 제가 안단 말인가. 해리가 물음표를 띄우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들어는 보시지 않았을까요?”

“뭔데 그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해리가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묻자 도현이 선선히 대답했다.

“요. 아세요? 판타지 소설인데.”

“아, 패스파인… 뭐?!”

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내가 아는 그거 맞아?”

“맞을 거예요.”

“세상에….”

뭔데 그 엄청난 걸 포기하나 했더니.

해리가 복도 창가에 서 있는 도현을 보았다. 얘가 에 나온다고? 나중에 엄청나게 유명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도나도 알고 있는 작품이 나오자 기분이 괜히 이상해졌다.

해리가 울적한 낯을 했다. 도현의 결정을 이해하게 되어서였다. 이젠 정말 도현의 마음을 돌릴 수 없게 생겼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어요.”

“말해봐.”

이젠 뭐가 나오든 해리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

“저 올림피아드 반 그만둘게요.”

“뭐어?!”

해리가 기함했다. 조금 전까지의 생각은 어딘가로 날려 보낸 후였다. 펄쩍 뛰어오를 기세에 도현이 뺨을 긁적였다.

“제가 임시로 소속된 거였잖아요. 대회도 끝났고… 충분히 할 만큼 한 것 같아서 이제 연기에 집중하고 싶어요.”

계획에도 없던 대회에 두 번이나 참가했다. 말이야 두 번이지, 그 두 번을 위해서 도현은 몇 개월 동안이나 학교, 집 할 것 없이 대회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기 때문에 별다른 미련이 남지 않았다. AIME도 포기하기로 한 이상 올림피아드 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도현, 너무 이른 생각이 아닐까? 일단 오디션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고….”

말을 하고 아차 했는지 해리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도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말도 맞죠. 하지만 오디션에 떨어진다고 해서 연기를 그만둘 건 아니라서요. 아마 여기저기 열심히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을까요? 그러면 시간이 부족하고요.”

가볍게 말하는 도현은 정말 쿨해 보였지만, 쿨하지 않은 해리는 그를 그렇게 놓아줄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겠다’란 대답을 얻어내고 만 해리였다.

* * *

“나는 진짜 네가 미친 거 같아.”

감탄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 니콜라스에 다비드가 눈빛으로 동조했다.

그들은 뜬금없이 발레 공연을 보겠다고 학교를 빠지더니 캐스팅을 받고 돌아온 친구에게 이상꾸리한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특히 다비드는 아주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니키, 원래 세상이 그래. 될 놈은 뭘 해도 되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불공평해.”

“쯧. 아직 어리구나.”

도현은 가끔가다 진이 사실 인생 2회 차 정도는 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다비드의 재수 없단 시선이 이번에는 니콜라스에게 향했다. 니콜라스는 일주일 전, 학교 간의 친선 대회에서 1등이라는 아주 우수하고도 특출 난 성적을 거둬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건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다른 애들한테 비밀로 해주면 좋겠어.”

“왜?”

“확실하지 않기도 하고. 너희처럼 놀랄 테니까.”

오디션 보는 영화의 제목을 말하자마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니콜라스가 납득했다. 이 소식이 퍼지면 너도나도 달려와 귀찮게 할 게 뻔했다.

특히 도현보다 주변인이 더 문제였다. 키가 크고 골격이 단단해질수록 특유의 서늘한 눈매나 조용한 분위기가 도드라지는 탓인지, 아이들은 도현을 묘하게 어려워했다.

같은 학년은 부대낀 날이 있어서 그런 경향이 적다지만, 다른 학년은 그게 심했다. 그래서 질문 폭탄을 받는 건 주변 사람이었다.

“좋아. 비밀로 할 테니까 좀 더 자세히 말해줘 봐.”

진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에 도현에게로 향했다. 아닌 척해도, 우연하게 받은 캐스팅 제의는 그들의 흥미를 잡아끄는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에….”

도현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그날의 일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시간.

도현은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 있다가 –당연히 도서 클럽 활동이었다-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를 돌려받아야 했다.

“안녕, 도현.”

“응, 안녕. 에릭. 책 읽으러 온 거야? 도서관에서는 처음 보네.”

에릭은 올림피아드 반 소속으로, 그곳에서 반장과도 같은 역할을 맡은 아이였다. 성격 좋고, 똑똑하고, 활기찬 에릭을 아이들은 도현과 다른 의미로 잘 따랐다.

“책이 아니라 너와 대화하려고 온 거야.”

“나랑?”

에릭은 그 직위에 맞게 올림피아드 반 아이들 모두를 신경 써서 그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어도 이렇게 사담을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던 도현은 헤더가 수상하게 그들을 흘끔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

“흐, 흠. 여기 책이 잘못 꽂혔네.”

헤더가 못 들은 척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현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헤더.”

도현의 부름에 움찔, 어깨를 떤 헤더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도현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보았다.

“내가 분명히 내일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했던 거 같은데 말이야.”

“음… 그랬던가?”

도현이 오리발을 내미는 헤더를 말없이 응시하자, 에릭이 그녀가 시선에 뚫리기 전에 끼어들었다.

“헤더는 그냥 네가 나가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거야. 너는 우리 반의 중심이나 다름없잖아.”

“그건 너잖아?”

“뭐? 아니야. 나랑 넌 다르지. 애들이 너를 목표로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솔직히 나도 네가 나가지 않았으면 해서 온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의외로 호감이 듬뿍 묻어 있었다. 에릭과 적당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도현은 그가 보이는 호의에 잠시 낯선 얼굴을 했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일걸. 다들 널 좋아해.”

“아하….”

그 말에 도현은 꽤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에릭의 말처럼 도현을 좋아하는 애들이 있긴 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아이도 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그들에게 피해를 준 적도, 심지어 그들과 몇 마디 나눈 적도 없는데 그랬다.

“미안. 이미 결정한 거라서… 다음 학기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학기는 확실히 쉴 거 같아.”

꿀 바른 말에도 흔들리지 않자 에릭이 퍽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진심이야? 수학이 싫어졌어?”

“그건 아니고 시간이 부족할 거 같아서 그래.”

“그런 거라면, 도서 클럽을 그만두고 올림피아드에 아예 소속되는 게 어때?”

“뭐? 에릭! 너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작스레 아군이라 생각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헤더가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 사서 선생님의 엄한 눈길을 받고 입을 합 다물었다.

에릭이 헤더의 시선에 뭐가 문제냐는 얼굴을 했다. 그는 대다수의 올림피아드 반 학생들이 그렇듯이, ‘특별하게 우수한 아이들’이 모인 올림피아드 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렇잖아? 분명 진학에도 도서 클럽보다는 올림피아드 반이 훨씬 유익할 거야. 그리고 헤더, 우리는 벌써 4학년이라고. 우린 이제 미래를 준비해야 해.”

“세상에! 네가 책을 안 읽는단 건 잘 알겠다, 에릭!”

“내가 얼마나 책을 많이 보는데? 책은 책이고, 진학은 진학이지. 현실을 봐, 헤더.”

에릭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치로 말했다. 그에 헤더가 도서 클럽이 진학에서 가지는 이점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현은 벌써 배신이 오갈 뿐만 아니라, 미래를 체계적으로 준비하기까지 하는 아이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샌디에이고가 학구열이 강한 도시긴 하지만 저 둘은 그중에서도 좀 유별난 축이었다. 에릭은 이제 ‘도현이 있음으로써 올림피아드 반의 성적이 얼마나 상승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모르고 싶어도 그가 자신을 붙잡은 이유를 알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게 자신이란 걸 깨달은 도현이 슬픈 눈을 했다.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고, 학교 활동쯤이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건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매번 험난한 과정을 건너야 할까.

“도현.”

“…네. 데리고 나갈게요.”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 있는 사서 선생님이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도현이 힘없이 말했다.

* * *

조금 지친 낯으로 스쿨버스에서 내린 도현은,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여성을 보고 웃었다.

“케일리, 저 다녀왔어요.”

“가방 이리 줘.”

도현은 순순히 가방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처음 몇 번은 거절해 보았지만, 그저 빠르게 넘겨주는 게 둘 모두에게 편한 일이란 걸 깨닫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얘기한 문제는 다 해결되었니?”

“아마도요.”

원래는 내일 있을 올림피아드 수업에서 해리가 아이들에게 알릴 예정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다 알게 되어버렸다. 그 탓에 하루 종일 시달렸지만….

언젠가 겪을 일을 미리 겪었다고 생각하자.

도현은 지난 일은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일만 보기로 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진짜 나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어?”

그날 저녁.

도현은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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