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8)화 (269/582)

제268화. 선택과 집중 (20)

[맥 버클러 : 너 패스파인더 오디션 본다며]

[진이 말해줬어요?]

[맥 버클러 : 바로 아네?]

[맥 버클러 : 걘 진짜 너한테 무슨 일만 생기면]

[맥 버클러 : 나한테 연락하는데]

[맥 버클러 : 이해할 수가 없어]

그거야… 맥이 내 일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서가 아닐까.

도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들었다면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방방 뛸 소리였지만 모를 테니 상관없었다.

톡, 토독. 도현이 답장을 적었다.

[진은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연락 자주 해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맥은 진이 친한 사람 중에서 유독, 연결 고리가 적은 편에 속했다. 나이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유일한 공통점이라곤 도현뿐이었다. 그러니 도현을 주제로 자주 연락할 수밖에.

사실인 건 사실인 거고, 맥은 유독 낯간지러운 것에 약했다. 얼핏 들어보면 맥이 어울리는 친구나 환경 자체가 쿨한 분위기인 거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맥 버클러 : 아무튼]

[맥 버클러 : 그거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고]

이렇게 주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문자 텀이 묘하게 길었다. 어쩐지 핸드폰을 내던지며 닭살이 돋은 팔을 쓰는 그가 눈앞에 보이는 듯해 웃음을 삼켰다.

[맥 버클러 : 내가]

[맥 버클러 : 아니다]

[맥 버클러 : 너 지금 전화 되냐?]

도현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세 번째 신호음이 울리기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흥미가 담긴 목소리였다. 맥이 이렇게 뜸을 들이는 일이 흔치 않아서 더욱 궁금했다.

- 저번에 영화관 갔을 때 내가 말 안 한 게 하나 있거든?

“네.”

- 그때 내가 오디션에 1차 지원, 그러니까 서류 접수를 한 상태였는데.

“네.”

- 최근에 합격 문자가 왔어.

“와, 축하해요.”

- 근데 그게 패스파인더야.

“…어.”

도현이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쳐다보았다. 딱히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다시 귀에 가져다 댄 후 입을 열었다.

“패스파인더요?”

- 응.

“어… 어?”

도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맥, 그럼 저랑 같은 작품 오디션 봐요?!”

- 어, 그렇게 됐다.

“세상에.”

도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격한 반응에 맥은 괜히 뿌듯한 기분이 되어 ‘놀랐지? 완전 상상도 못 했지?’ 하며 말했다.

도현이 뒤늦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해요.”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검은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느릿하게 긴 속눈썹을 팔락이며 말했다.

“맥이랑 저는… 둘 다 첫 작품으로 만났잖아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찍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이상하네요.”

과거를 회상하던 도현이 그리운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오디션 볼 때 맥이 절 싫어했….”

- 아악! 미친! 그만! 그만 말해!

“왜요? 그때 맥이 분명 저보고 ‘좋냐? 좋냐고, 돈으로 자리 꿰차니까. 좋겠네. 누구는 뭣도 없어도 돈으로 주연 자리를 얻고. 나같이 가난한….’”

- 그마안! 내가 잘못했어. 어? 잘못했다니까!

맥이 괴롭게 소리쳤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데다가 그 대단한 연기력 탓에 쓸데없이 사실적이었다. 맥은 도현이 성대모사도 잘한다는 정말 쓸모없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으며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 내가 미친놈이었어. 진짜 대가리에 총 맞은 새끼였다고.

자기 비하를 하던 그는 이제 부정하기 시작했다.

-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야. 어? 나랑 상관없다고. 그런 멍청한 새끼가 나일 리가 없어. 알겠어?

“뭐어… 그렇다고 해줄까요.”

- …너는 진짜.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뭐라 할 수 없는지 심호흡만 했다. 도현은 그가 괴로워하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듣다가, 그를 구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맥, 맥은 무슨 역할에 지원한 거예요?”

- 어? 아, 역할. 맞아, 진, 걔도 네가 어떤 배역 오디션 보는지 모르더라? 왜 비밀로 한 거야?

“맥이 영화관 간 날 말 안 한 거랑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 네가? 네가 떨어질까 봐 숨긴다고?

그의 목소리엔 불신이 가득했다. 도현은 다들 자기를 뭐로 보는지 모르겠다고 서른다섯 번째 정도로 생각하며 답했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주변 사람들이 너무 알고 있으면 나중에 미련을 떨치기 어려울 거 같기도 하고….”

- 그건 그렇지. 그리고?

“궁금해하는 게 귀엽잖아요.”

- ……?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얼마 후, 그가 떫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인성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데?

“저는 한결같은데요.”

- 아니야. 넌… 넌 좀 그래. 진인가? 걔가 문젠가? 니콜라스… 걔는 머리가 꽃밭이라 별로 영향은 안 끼칠 거 같은데. 역시 진이….

맥은 무슨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물든 자식을 둔 부모처럼 중얼거렸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저러니까 진이 내 일로 연락하지.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했으니까 맥도 비밀 지켜줘야 해요.”

- 뭐… 어렵지 않지.

은근히 신난 투였다. 방금까지 친구들에게 비밀로 한 도현을 이상한 사람 취급했으면서, 본인도 그걸로 놀릴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보고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먼저 말할까요?”

-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그러게요.”

- 아, 잠깐. 나 근데 네가 말 안 해도 알 거 같아.

“네?”

- 너, 르옌 맞지?

“…어?”

진짜 맞히자 도현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신기한 투로 말했다.

“어떻게 맞혔어요?”

- 딱 네 역할 같았으니까. 너 지원한 것도 아니고 캐스팅받은 거라며. 그 사람도 눈이 있었으면 알았겠지.

“오… 신기하네요. 그럼 맥은요? 맥은 무슨 역할에 지원했는데요?”

이내 그가 꺼낸 이름에 도현은 진심으로 놀라서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맥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답해주었다.

“네?”

- 아서 우더라고.

맥이 지원한 역할은 의 명실상부한 주인공, 아서 우더였다.

이쯤 되자 도현은 이건 어떠한 운명적인 흐름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둘 다 주연에 지원하다니.

그를 다시 촬영장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자 새삼 설렜다. 물론 그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해도, 상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둘 다 합격해서 만나면 너무 멋질 거 같아요.”

도현이 르옌 역에 합격하는 거나, 맥이 아서 역에 합격하는 거나 끔찍할 정도로 가능성이 낮지만, 말은 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 아서 역 지원자가 삼만 명을 넘던데, 내가 되겠냐.

도현은 그 말을 웃어넘겼다. 진짜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목소리가 그렇게 들뜰 리가. 그와 별개로 새로이 알게 된 경쟁률은 참… 놀라웠다. 도현은 르옌 역의 경쟁률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을 거란 걸 짐작했다.

하지만 도현은 기죽지 않았다. 그 경쟁률은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니까. 모두가 그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가야 하는 처지였다. 누가 더 힘드니, 어렵니 할 이유가 없었다.

도현은 시간 낭비를 싫어했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두려워할 바에야 미래를 대비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었다.

“맥, 맥도 오디션 준비해야 하잖아요.”

- 그렇지?

“괜찮다면 옛날처럼 우리 집에 와서 할래요?”

맥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혹여라도 거절할까 봐 도현이 그가 혹할 만한 말을 덧붙였다.

“둘 다 배역이 다르니까 경쟁자도 아닌 데다가, 서로 상대역이 되어줄 수 있잖아요. 항상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가끔 같이 연습하는 게 더 도움 되지 않을까요?”

- 아니, 난….

맥은 사탕 주는 어른처럼 살살 꼬시려는 도현이 어이가 없었다. 그가 망설인 이유는 싫어서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나한테만 좋은 일이잖아.’

도현은 무려, 할리우드 아역 중에서 유명인 반열에 들고 있는 배우였다. 그런 애한테 자기가 상대역을 해준다고 해서 도움이나 될까.

‘나만 도움받을 게 뻔하지.’

그가 꽤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맥과 달리 도현은 집에 온갖 설비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봐도 나 좋으라고 한 제안이었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흘렀는데 처지는 변함이 없었다.

-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기만 할까요.”

맥이 픽 웃으며 말했다.

- 그래, 이번 주 주말에 가면 되나?

“편할 때 언제든지 괜찮아요. 주말에 데리러 갈까요?”

- 나 다리 있어. 가는 김에 산책이나 하지, 뭐. 그럼 토요일에….

* * *

언제 와도 질린다.

맥이 도현의 집 앞에 서서 한 생각이었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금방 도현이 나왔다. 집이라 편하게 입은 건지, 세트로 보이는 하얀 맨투맨과 조거 팬츠를 입고 있었다.

‘저거 관리 어떻게 하지.’

맥이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도현이 그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쳐 내부로 들어가자 서혜나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그녀는 홈웨어로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손님을 맞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맥은 잠깐 집에서 헤진 반팔을 입고 있는 엄마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맥이 봤을 때 집에서 이러고 지내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무슨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점심은 먹었니?”

“네, 먹고 왔어요.”

“흠, 그래? 이따가 디저트 먹을 배는 있지? 오전에 도현이랑 내가 베이킹을 좀 했거든.”

일어나기 싫어서 오전 내내 침대 위를 뒹굴다가 약속 시간이 되어 기어 나왔던 맥이 그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했다. 가끔 이 두 사람은 좀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다.

이건 정말 저 두 사람이 이상한 게 맞았는데, 진과 니콜라스에게 물어봤을 때 그들은 맥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부자라고 해서 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었다. 이 가족들은 가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처럼 굴었다.

“주시면 감사하죠. 보내주시는 것들도 잘 먹고 있어요. 엄마도 인사 전해달라고 하셨고요.”

맥은 꽤 유려하게 대답했다. 그는 본래 사회생활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애초에 그는 겨우 열넷이었다.- 몇 번의 오디션과 촬영 경험을 거치며, 나름대로 처세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맥과 도현은 연습실로 향했다. 그 안에 들어간 맥은 이곳도 오랜만이란 걸 깨달았다. 온 벽면이 거울로 된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기, 새 책 있어요. 저는 제 책 있으니까 맥은 그걸로 봐요.”

“아, 고마워. 근데 왜 새 책이 있는 거야?”

“하나는 제 거, 하나는 엄마 거, 하나는 혹시 모르니 보관용으로 샀거든요. 그건 보관용 책이에요.”

“아하….”

맥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곧, 두 사람의 얼굴에 똑같이 막막함이 떠올랐다.

지원자 수가 너무 많은 탓에 충분히 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언갈 볼 생각이 없는 건지, 오디션 관련해서 무언갈 준비하라거나, 어떤 식으로 하겠다는 공지가 전혀 없었다. 그저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그건 캐스팅으로 오디션 제안을 받은 도현도 같았다. 언제 오디션을 보러 방문하라는 연락만 받았지, 뭘 준비하라는지는 듣지 못했다.

잠깐 고민하던 도현이 제안했다.

“일단, 캐릭터 분석한 것부터 얘기해 볼까요?”

“그게 좋겠다.”

곧 연습실은 열띤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몰래 구경하러 왔던 서혜나가 안을 슬쩍 훔쳐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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