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69)화 (270/582)

제269화. 선택과 집중 (21)

“안녕.”

“오, 안녕.”

벽에 다리를 붙이고 쭉쭉 늘리고 있는 단사에게 다가간 도현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단사도 아는 척을 했다.

도현은 주 3회 학원에 꾸준히 나오는 중이었고 그건 일주일에 세 번은 단사와 얼굴을 마주한다는 소리였다. 친화력은 좋으나 관계에 쿨해 보이는 단사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적당히 지낼 줄 아는 도현은 금방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도현이 그 옆으로 가서 같이 몸을 풀었다. 몇 주 전보다 훨씬 유연해진 몸이 수월하게 움직였다. 원래도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긴 했지만, 이제는 이 기분 좋은 활력에 중독되어 제대로 몸을 풀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의미심장하게 웃던 에드워드를 떠올린 도현이 생각을 떨쳐냈다. 자신이 에드워드처럼 두껍고 단단한 몸을 가지는 건 별로 상상이 안 됐다. …멋있을 거 같기도 하고?

도현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속속들이 도착한 아이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었다. 처음 몇 번은 다가오지 않더니, 어느 순간부터 친근하게 굴기 시작하는 P/B 클래스의 아이들이었다.

짐작하건대, 아마 밑천이 다 털리고 몸치인 걸 모두에게 들켰(?)던 그날부터인 거 같았다. 팔다리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게 분명했다. 도현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좋은 아침.”

마누엘이었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오늘도 잘생기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대개 타인의 외모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날부터 그의 잘생긴 얼굴에 눈이 갔던 도현은 곰곰이 고민해본 끝에 답을 찾았다. 마누엘과 단사의 공통점은 어두운 피부의 소유자라는 거였다.

딱히 누구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도현은 자신의 흰 피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 남들보다 유독 하얀 그 피부는 그에게 병자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시기에는 거울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자주 본 적은 없었지만, 화장실에 갈 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흰 병원복에 창백한 피부는 살 아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기보단 차라리 유령에 가까워 보였다. 적어도 도현은 그리 생각했다.

물론 이제는 햇빛을 자주 보는데도 여전히 하얀 피부색에 그게 아프거나 실내에만 있어서가 아니라 타고난 것임을 깨닫긴 했지만. 어쨌든, 호불호를 말해보자면 불호에 가까웠다.

‘나중에 태닝이나 할까.’

그의 주변인들이 들었다면 기겁하며 말릴 생각을 하며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누엘이 왔으니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도현은 몸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시선과 손끝까지 원하는 대로 통제하는 건 익숙한 감각이었다. 동시에 아무리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연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학원에 다니는 거겠지.

이번에 중요한 오디션이 있어서 그런가, 오스카는 오랜만에 연기 학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독학을 고집하는 도현을 이해하기 어려운 기색이었다.

도현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옆을 지나쳐 가던 마누엘이 신체의 고통 탓이라 생각한 건지, 자세 무너트리지 말고 버티라 말하며 지나갔다. 물론 도현은 다른 생각 중이었다.

고집이란 건 알았다. 아는데… 그럴 때마다 휴식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바이올린을 켰던 형이 생각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다 끝내 바이올린을 증오스럽게 쳐다보던 기억까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전에, 한창 <불량경찰>을 찍을 땐 이게 좋아하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고통받았던 형에게 자유로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현은 요즘 생각이 달라졌다.

이건 트라우마에 가깝다.

그의 고통은 곧 도현의 고통이었다. 과거의 경험은, 나의 자율적인 의지에서 벗어나게 되면 나도 그처럼 연기를 싫어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무의식 깊은 곳에 심어놓았다. 연기는 도현의 정체성과 다름없는데 그게 싫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 그는 겁을 먹은 것이다.

메리와 나눈 상담의 영향으로 이것저것을 알게 된 도현은 이게 트라우마 반응과 비슷하단 것을 포함해 스스로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감정적인 고집인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았다.

결론은, 이런저런 것을 따지다 보면 그냥 혼자 하는 게 낫겠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조금 힘든 길로 가는 게 길의 근간을 뒤엎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도 평생 이럴 수는 없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예술 중학교에 입학하는 게 그 첫 물꼬가 되어주지 않을까, 도현은 그리 생각하며 마누엘의 휴식 선언에 숨을 돌렸다.

“너는 이번 주말에 뭐 해?”

체력이 바닥난 도현과 다르게 쌩쌩한 단사가 스몰토킹을 걸어왔다. 숨을 고른 도현이 대답해 주었다.

“집에 있을 거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저번 주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단사의 눈이 안타깝게 변했다. 아마 그를 친구 없이 집에서 썩는 불쌍한 아이로 본 게 틀림없었다. 도현이 알기로 한국은 별로 그러지 않던데, 여기는 유독 주말에 놀러 다니거나 친구를 만나지 않으면 내향적인 게 아니라 아웃소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친구도 같이 하는 거야.”

“아하.”

그제야 눈빛이 거두어졌다. 이내 그가 심드렁한 투로 물었다. 궁금하다기보단 그냥 묻는 거에 가까워 보였다.

“뭘 하는데?”

“오디션 준비.”

“…아하.”

잠깐 도현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 배우였지, 하는 얼굴이었다.

“누가 날 평가하는 건 짜증 나는 일이야.”

그는 꼭 겪어본 것처럼 말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단사가 이어 말했다.

“나도 몇 번 오디션 경험 있어. 너처럼 무비스타 되려는 건 아니고, 발레 공연에 서려고. 여름이 되면 여기서도 오디션 열릴걸? 잘하는 애들 뽑아다가 무대 올리거든. 난 거기 나가려고.”

단사는 취미나 운동 목적으로 배우는 도현과 다르게 본격적인 느낌으로 발레를 대하고 있었다. 도현이 알기로 발레를 시작한 지는 일 년이 좀 넘었지만, 그 전에 다른 무용을 배워왔다는 거 같았다.

사실 P/B 반에 있기에는 수준이 안 맞았다. 그도 알았는지 곧 반을 옮긴다지만.

말을 하던 단사가 도현을 쳐다보았다.

“너 그럼 친구랑 같이 오디션 준비하는 거야? 같은 오디션?”

“응.”

“오, 왜 그런 짓을… 아니다.”

“그런 짓이라니?”

말을 하다 마는 단사에 도현이 되물었다. 단사가 짧은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경쟁자잖아. 나 같으면 내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거야.”

“우리는 지원하는 배역이 달라.”

“좀 낫긴 한데.”

그리 말하는 단사는 여전히 껄쩍지근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더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도현이 또다시 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음. 그냥 네가 그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려면 그만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

도현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눈을 하자 단사가 말했다.

“그렇잖아. 둘 다 붙거나 떨어지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붙고 누군가는 떨어질 텐데. 떨어진 쪽이 기분 상하지 않을 거라 어떻게 장담할래? 나는 내가 떨어지고 친구가 붙는다면 그 자식 얼굴을 일 년 정도는 안 볼 자신이 있어.”

“…….”

“그렇게 보지 말지? 대부분 다 이럴걸? 세상에 남의 행운을 진심으로 기뻐할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은데?”

단사가 당당하게 말하자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보던 도현이 한숨을 삼켰다.

“둘 다 최선을 다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너 세상을 깨끗하게 보네. 뭐, 난 그것도 좋다고 생각해.”

단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애초에 도현에게 제 입장을 강요할 생각은 없는 거 같았다. 도현은 단사의 말에 웃음 비스무리한 걸 입가에 매달았다.

아닐걸.

도현은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쪽이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추할 수 있는지도 잘 알았다. 세상에는, 장난감 데려오듯 어린아이를 입양했다가 애원하는 아이를 멋대로 파양하고, 그가 유명해지자 과거의 인연을 빌미로 돈을 요구하러 오는 쓰레기도 있는 법이었다.

그래도 도현은 단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겪은 걸로 판단할 뿐이고, 그가 봐온 맥은 목표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만큼 단단한 사람이었다.

* * *

톡, 톡.

펜의 끝부분이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도현은 몇 번째 읽는지 모를 소설을 펼쳐놓고 생각에 잠겼다.

르옌은 복잡한 인물이다.

주인공인 아서가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주인공처럼 한없이 빛에 가깝다면, 르옌은 그보다 어둠, 혼란과 같은 단어와 어울렸다. 악하다고 보면 악하고, 그저 사람답다고 칭하면 또 그렇게 보였다.

르옌은 의 서사를 풍부하고 깊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도현은 르옌 역할이 아주 매력적이란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첫 시작은 캐스팅이었지만, 만약 도현이 소설을 먼저 읽고, 배역에 지원할 자율성이 주어졌다고 해도 르옌 역할에 지원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늘 옳은 길을 찾는 주인공과 달리 틀린 길로도 가는 인물이지만, 그래서 와닿았다.

몇 번이나 집중해 읽었을까.

문단을 외울 지경이 되자, 도현은 르옌에게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의 속에서 조금씩 형상을 그려가던 르옌이라는 인물이 얼추 선명해졌다.

르옌은 깊은 숲속에 있는 호수 같았다. 그것도 늦은 새벽, 표면이 얇게 언 호수.

달빛이 요요히 흐르는 표면은 차가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서늘한 바람에도 얼어붙은 표면은 미동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호수는 그저 고요하며, 그렇기에 고결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아래, 얼지 않은 호수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호수를 덮은 얼음은 그 아래 흐르는 물에 의해 몇 번이고 녹고 얼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치열함과 위태로움을 숨기고 고요했다.

그러나 외부에서 충격을 가한다면?

그 얇은 얼음 막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도현은 판단했다. 르옌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위태로움이라고. 겉은 고요하지만 속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늘 두려움에 떠는 인물이었다.

도현은 자신이 해석한 르옌을 어떻게 심사 위원에게 보여주고,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잠시 후.

도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유연기.”

그때가 나의 르옌을 마음껏 보여줄 순간이야.

상황이 돌아가는 거로 봐서는, 그 전에 떨어지면 그조차도 보여주지 못할 거 같긴 하지만… 그러면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올라가면 될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도현은 자신이 있었다. 누구나 으레 갖는 근거 없는 확신일지도 몰라도… 맥은 르옌의 귀족적인 면모를 보고 말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의 말처럼 르옌은 자신과 많이 닮았다. 르옌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지원자들보다 부족할 거란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검은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랑이다가 곧 감겼다.

상상해보자.

나의 르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을. 그가 가장 위태로운 순간을.

머릿속에 영화처럼 펼쳐지는 장면이 넘어가다가 한 부분에서 정지했다. 아. 도현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도현은 어딘가 복잡한 눈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를 준비해야 할지, 알겠다.

* * *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렀다.

도현은 평소에는 집에서 홀로 캐릭터를 분석하거나 영상을 찍어 연기를 확인했고, 종종 서혜나에게 보여주며 피드백을 받았다. 그러다 주말이 되면 맥과 종일 연기 연습을 했다.

첫 주에는 오후에 오던 맥은 그다음 주부터 아침밥을 먹고 바로 왔고, 나중에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날이 많아지자 아예 토요일에 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맥의 2차 오디션 당일이 되었다.

“…맥은 잘하겠지?”

몇 주간 그들이 열심히 한 걸 봐온 서혜나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다른 집 자식이긴 하지만, 이미 맥에게 정을 준 서혜나는 진심으로 그가 오디션에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랐다.

친구인 자신보다 더 떨고 있는 서혜나를 보던 도현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잘할 거예요.”

오디션을 같이 준비하면서 도현은 그의 연기를 오랜만에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그는 과거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그가, 밤잠을 줄여가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도현이 보기에 맥의 아서는 완벽하진 않더라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의 연기를 본다면 누구든 그의 특별함을 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긴장만 안 한다면 말이지.’

전날 거의 백지장처럼 질려 헛구역질을 하던 게 떠올라 걱정스러웠다. 도현은 지금쯤 오디션장에 있을 맥을 상상하며, 그가 떨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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