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70)화 (271/582)

제270화. 선택과 집중 (22)

“뭐야….”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맥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함의 표현보다는, 위축된 스스로에 대한 반작용에 가까웠다.

삼만 명.

그 숫자가 이 센터 내에 다 있을 리는 없건만, 맥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람, 사람, 사람… 사방이 사람이었다. 그것도 십 대 초중반 아이들이.

그건 압도적인 동시에 조금 징그럽기까지 했다. 개미굴에 우글거리는 개미를 본 느낌, 그리고 그 개미 중 한 마리가 나라는 사실은 전의가 식기엔 충분했다.

숫자로 볼 때와 직접 경험한 것은 차원이 달랐다. 맥은 자신이 어떻게 이 수많은 후보를 제치고 선택되리라 기대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걔랑 있다 보니 물들었나.’

맥은 연습실 조명 아래 유독 환하게 보였던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눈앞의 목표만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너무 강렬한 색이 다른 색을 물들이듯이.

짝!

뺨이 얼얼했다. 제 뺨을 찰지게 때린 맥이 고개를 휘저었다.

“정신 차리자, 맥 버클러.”

여기까지 와서 쫄면 뭐 할 건데. 부딪혀는 봐야지. 어차피 여기 있는 애들 다 나랑 똑같아.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이번엔 조금 전과 다르게 보였다.

하나같이 얼굴에 불안, 기대, 초조, 두려움, 설렘… 온갖 감정이 넘실댔다. 맥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지원자들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이들로 봐서는 딱히 특별해 보이는 이는 없었다.

‘이도현 같은 애가 앉아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애가 흔치 않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다들 고만고만한 표정에, 고만고만한 존재감이었다.

맥은 조금 자신감이 차올랐다. 첫눈에 ‘이 애다!’ 하는 애가 없다면, 연기로 갈라진다는 거니까.

‘연기라면 자신 있어.’

그걸 위한 지난 몇 주였다. 그것도 무려, 걔가 도와준 연기였다. 그, 어딘가 남들과는 다른, 소위 말하는 천재가 말이다.

자신이 도현에게 거의 맹목적인 믿음을 보였단 걸 눈치채지 못한 맥이 비장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제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가 앉았다. 옆에 앉은 아이가 그를 흘끗 보았다가 도로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맥도 가방을 뒤적여 노트 하나를 꺼냈다. 그의 캐릭터 분석을 모두 적어놓은 노트였다. 다시금 노트를 눈에 담고 있을 때,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거 캐릭터 분석한 거야?”

제게 거는 말이라 생각하지 못한 맥이 노트에 집중하다가 팔뚝을 슬쩍 건드는 감각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안녕.”

“…어.”

떨떠름한 대답이 나왔다.

왜 말을 거는 걸까. 맥은 오디션장까지 와서 경쟁자에게 말을 거는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네 바로 앞 번호야. 으, 떨린다, 그치?”

“…뭐.”

“그나저나 그거, 캐릭터 분석한 거 맞지? 너 되게 열심히 했다.”

맥이 노트를 슬쩍 가슴께로 가져갔다. 혹시 내 분석을 훔칠 생각인가, 의심이 들어 불쾌함이 꾸물거림과 동시에 눈이 가느스름하게 떠졌다. 그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솔직히 이 방에만 지원자가 이만큼이잖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가 될 것 같진 않은데, 다른 애들 열심히 한 거 보니까 나도 좀 더 준비하고 왔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그래.”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심심하면 다른 애 붙잡고 놀아.”

맥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는 이 의미 없고 목적도 없으며 시간만 소모하는 대화를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방은 의견이 다른 거 같았다.

“어? 왜? 긴장도 푸는 겸, 대화하면 좋잖아.”

“난 보던 거나 보고 싶은데.”

“에이, 지금 준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오히려 지금은 긴장을 조금이라도 푸는 게 낫지. 그리고 앞 번호랑 뒤 번호로 만난 건 인연 아니야?”

고개를 휙휙 돌리던 그 애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방에서 너랑 내가 나란히 합격할지 누가 알아!”

아까는 네가 될 것 같지 않다며.

맥은 진심으로 피곤했으나, 이 앞 번호가 하는 말이 영 틀린 것 같진 않았다. 사실 노트에 적힌 건 이미 머릿속에 다 든 거고… 긴장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

맥이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설렁설렁 말을 받아주자, 앞 번호는 무슨 의식의 흐름을 거친 건지 이미 두 사람이 2차 오디션에 합격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맥은 그의 말을 끊으려다가 그 말간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맥보다 세 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아….”

맥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었다. 어디 사는 누구랑 비슷한 나이란 소리잖아. 맥은 내려던 짜증을 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다만 그는 속으로 ‘네가 될 일은 없겠다’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대기실 안에 명찰을 단 한 남성이 들어왔다. 척 보아도 관계자 같은 차림새에 아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쪽으로 향했다. 그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놀라지 않고 말했다.

“잠깐 공지하겠습니다. 10분 뒤부터 한 팀씩 들어갈 거예요. 팀은 번호순으로 끊고, 15명이 한 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1번부터 15번까지, 16번부터 30번까지, 이런 식으로요. 지금 여러분 자리는 번호순으로 앉은 겁니다. 차례가 되면 스태프가 열다섯 분씩 안내할 거니까 헷갈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요.”

“우리 같은 팀이야!”

맥은 앞 번호의 속삭임을 한 귀로 흘리며 생각했다.

열다섯 명이 한 팀이라고?

맥도 여러 번 오디션을 봤지만, 한 번에 열 명이 넘어가는 아이들과 본 적은 없었다.

‘열다섯 명을 세워놓고 어떻게 연기를 본다는 거야?’

연기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맥은 조금 불안해졌다.

“합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심사 위원분들이 번호를 호명하실 거예요. 그러면 합격한 사람들은 나와서 스태프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탈락하신 분들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시면 되고요.”

마지막 말은 퍽 잔인하게 귀에 꽂혔다. 맥은 애써 뒷말을 잊고 앞말에 집중했다. 오디션 결과를 마음 졸이며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맥이 시선을 내려 가슴팍에 붙인 스티커를 보았다.

148번.

15명씩 끊는다고 했으니, 아홉 번째… 아니, 열 번째 순서였다.

‘한참 남았겠네.’

맥은 그리 생각하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몇 번의 오디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로는, 오디션도 체력 싸움이란 거였다. 첫 타자면 부담감과 싸워야 했지만, 순서가 늦어질수록 늘어지는 긴장과 점점 피곤해지는 정신과 싸워야 했다.

“근데 여기 있는 애들 다 푸른 눈이라서 조금 무섭지 않아?”

말을 거는 걸 포기하지 않은 147번이 또다시 속닥였다. 친목을 하러 온 건지 오디션을 보러 온 건지 모를 애라고 생각했던 맥은 147번 같은 아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다 그 아이들이 모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걸 보고 침묵하다 말을 꺼냈다.

“…좀 그렇긴 하네.”

아서 우더의 조건에는 ‘푸른 눈’이 있었는데, 그 탓에 대기실에 있는 아이들은 온통 쨍한 푸른 눈, 초록기가 섞인 푸른 눈, 짙은 푸른 눈, 갈색이 섞인 푸른 눈… 온통 푸른색이었다. 147번도 흐릿한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미국에 있는 모든 푸른 눈의 남자아이들을 다 모아놓은 거 같았다. 맥은 이처럼 푸른 눈이 흔한지 오늘 처음 알았다.

약간 질린 낯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던 맥은 방금 나갔던 남자가 다시 들어오는 것에 의아해졌다.

“다음 팀, 16번부터 30번까지 절 따라오세요.”

뭐?

맥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첫 번째 팀이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미리 대기시켜 놓는 건가 싶었는데 그 생각조차 세 번째 팀이 나가자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대기실에 있던 아이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147번도 긴장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놀랍게도 맥의 차례는, 첫 번째 팀이 나가고 한 시간 조금 지난 후에 다가왔다. 적어도 서너 시간은 각오했던 그의 생각보다 몇 배는 빨랐다.

“다음 팀, 136번부터 150번까지 나오세요.”

덜컹.

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짐은 다 가지고 나오세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 일어나셨죠? 인원 확인하고 나갈게요.”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스태프가 그들의 가슴팍에 붙인 스티커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147번을 지나고 맥의 차례가 되었다. 스태프는 맥의 스티커를 흘깃 보고는 지나쳤다.

인원 확인을 마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에, 맥도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맥은 학교 체험학습이라도 온 것 같다는 기묘한 감상에 빠졌다.

그들은 오디션장 바로 앞에 늘어진 의자에 순서대로 앉았다. 남자는 그들에게 안에 들어갈 때 짐은 의자에 두고 갔다 오며, 화장실을 가고 싶은 사람은 스태프에게 말하라고 설명했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같이 갔다 올래?”

미쳤나.

맥이 진심으로 싫다는 얼굴로 그를 보자, 147번이 시무룩해지더니 혼자 화장실에 갔다. 그가 사라지니 조용하고 좋았다. 맥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요함을 차분히 누렸다.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사라져서 그런가,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맥은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괜찮아, 열심히 준비했잖아. 적어도 남들보다 부족하진 않을 만큼 준비했어.

그러니까 무섭지 않다.

내뱉는 숨이 떨렸지만, 맥은 고개를 바로 세우고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잠시 후.

147번이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쪽 문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맥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눈이 쏠렸다.

떨어졌는지 울음을 참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떨어져도 집에 가서 울어야겠다.

“이제 안에 들어갈 거예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냥 안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다들 힘내세요.”

내내 사무적으로 굴었던 남자도 들어가기 직전이 되자 따스한 응원을 날려주었다.

“제가 문을 열면 순서대로 안에 들어가서 일렬로 서면 돼요. 자, 이제 엽니다.”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앞에 열두 명이나 있는지라, 바로 안의 풍경이 보이진 않았다. 몇 걸음 걸어간 맥은 그제야 오디션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넓은 공간 한쪽에는 다섯 명의 심사 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심사 위원이 위치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 노란색 테이프가 길게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서라는 뜻 같았다.

탁.

마지막 지원자까지 들어오자 문이 닫혔다.

심사 위원 한 명이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을 때 맥은 흠칫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어서 와요, 우리 영화에 지원해줘서 고마워요. 다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금방 끝나니까. 혹여 탈락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맛있는 거 먹고 푹 쉬어요. 기회가 이번뿐만은 아니니까, 알겠죠?”

그는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곧장 이어 말했다.

“별거 없어요. 지금부터 반듯이 서 있으면 돼요. 지시하는 사항 있으면 따르면 되고요.”

그리고 정말 그들을 가만히 세워놓고 보았다. 제일 첫 번째로 온 아이를 향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볼 듯한 시선이 향했다. 그러다 저들끼리 몇 번 속삭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그 옆의, 137번에게로 향했다. 136번은 당혹감과 초조로 얼룩진 얼굴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들썩이는 어깨의 폭이 점차 커지는 게,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고 있는 거 같았다.

몇 번 반복되자, 노란 선 위에 서 있는 모든 아이가 어째서 앞선 순서가 일찍 끝났는지 깨달았다.

이번 오디션은 단순하고 일차적인 거름망이었다. 그 수많은 지원자 사이에서 아서 우더와 어울리는 사람을 찾기 위해, 키와 체격, 생김새, 분위기, 목소리로 걸러내는 거름망.

143번, 144번, 145번, 146번… 그리고 147번.

“잠깐 옆으로 돌아볼래요? 오른쪽으로.”

“네, 네!”

몇몇 심사 위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몇 사람이 무어라 말을 했다. 그들은 잠깐 이야길 나누더니, 한 사람이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다시 정면 보세요.”

맥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맥은 꼬챙이에 꿰어진 물고기처럼 빳빳하게 굳어 가만히 서 있었다.

맥은 한 심사 위원의 눈가가 좁혀지는 것이, 벌렸다 닫히는 입 모양이, 누군가 대화를 나누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흔드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아주 느릿하게 시야에 비쳤다.

이내, 그들의 시선이 옆으로 넘어갔다.

하.

아주 작은 숨이 내뱉어졌다. 맥의 시선이 정면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내 그가 밟고 서 있는 노란색 스티커까지 닿았다.

곧은 직선일 스티커가 어째선지 울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맥이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가 떴다가.

꽈악.

주먹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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