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선택과 집중 (23)
“아… 엄.”
맥은 저를 향한 시선에 눈 치우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갈 길이나 갈 것이지, 뭐 볼일이 있다고 남아서 신경을 긁는 거야.
“나, 난 가볼게. 안녕.”
내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말을 걸었던 147번은 어물어물 말을 내뱉고는 황급히 뒤돌아 사라졌다. 웃기는 새끼였다. 저럴 거면 그렇게 친한 척은 왜 했던 건지. 아니, 결과에 따라 태도를 휙휙 바꾸니 상황 판단이 빠르다고 해줘야 하는 걸까.
“합격자 호명은 끝났고요, 나머지분들은 돌아가시면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
사실 하나도 안 웃겼다. 웃기긴 무슨, 부러워 죽을 거 같았다. 남겨진 내 위치가 저 멍청이보다 훨씬 우습고 초라했다.
“갈 때 짐 다 챙기셨는지 확인하시고요. 나가는 길은 스태프가 알려줄 겁니다. 그쪽으로 나가시면 돼요.”
진짜 이대로 끝이라고?
머뭇머뭇, 오디션장을 나가기 시작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맥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혹시 그 미친 경쟁률을 뚫고 마지막에 선택되는 게 나는 아닐까, 상상하며 히죽거린 날들은 꽤 많았다. 솔직히 상상 속에서는 이미 할리우드 스타가 되어서 레드 카펫을 걷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 말이다.
상상과 현실이 다르단 걸 모르지 않는다. 운 좋게 첫 번째 오디션의 문턱을 넘었더라도, 그다음도 넘어설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단 건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이건 아니잖아.’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건 몇 번을 돌려봤던 시뮬레이션에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몇 주간의 노력이 흙발로 짓밟히는 모욕감과 수치심, 분노, 혼란, 스스로를 향한 비난… 온갖 것들이 소용돌이쳤다. 결국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낸 감정은 분노였다.
열이 올라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한 맥이 심사 위원석을 쳐다보았다. 아니, 형형하게 부릅뜬 눈은 쳐다보기보단 노려봤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상당히 불량한 태도란 건 알지만, 맥은 이 자리에서 욕설을 내뱉지 않는 것만으로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차례로 나오세요.”
맥의 옆에 서서 울먹이던 149번이 나가기 싫다는 듯 미적대다가, 다시금 남자가 재촉하자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형체 없는 분노에 못 이겨 애꿎은 이들을 노려보던 맥은 순간 힘이 풀렸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노려본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자괴감이 분노를 식혔다. 곧 입술을 짓씹고, 고개를 틀었다. 그 과정에서 심사 위원 중 한 명과 눈을 마주친 것도 같았으나, 맥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대기했던 의자로 돌아오자 147번의 짐이 사라져 있었다. 합격한 아이들은 먼저 나와 어딘가로 향한 모양이었다. 합격자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는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거기에 안도하는 자신을 향한 울분이 치솟았다.
탁.
맥이 의자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었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거기에 동참해 훌쩍거리기보단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아, 저쪽에 있는 복도로 가면 되는데, 다 같이 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안내해줄 거야.”
친절도 하셔라.
탈락자가 돌아가는 길까지 봐주셔서 아주 황송하다고 맥이 속으로 빈정거릴 때였다.
“여기, 148번 있어요?”
148번.
…나?
“148번, 아, 거기 너 148번 맞지?”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뒤를 돌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뜬금없는 부름에 아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남자가 맥의 가슴팍에 달린 번호를 확인하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맥의 표정이 바뀌었다.
* * *
피부 위로 와 닿는 햇살이 따스했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꽃잎이 흔들리자, 생화 특유의 향이 맡아졌다.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그 풍경 속에 서 있는 소년은 달랐다.
도현이 초조한 듯 대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평소에 눈길을 사로잡던 화단도, 푸른 하늘도 감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도현의 신경은 모조리 대문 밖에 쏠려 있었다.
이윽고.
띵동-
벨 소리가 들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문을 열었다. 벨을 누르자마자 활짝 열리는 문에 밖에 서 있던 이가 흠칫 놀랐다.
“맥!”
도현이 환하게 그를 반겼다.
“안녕.”
“얼른 들어와요! 내내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왠지 문이 바로 열리더라.”
픽 웃은 맥이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이 그런 맥의 안색을 흘끔, 살폈다.
지난주 주말.
도현은 맥이 오디션을 마치고 연락해오길 기다렸다. 연락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불안해질 때쯤, 맥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맥 버클러 : 다음 주 토요일에 네 집에 가도 돼? 그때 알려줄게.]
도현은 그 문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탈락한 건가 싶다가도 탈락하면 집에 온다고 했을까 싶고. 합격인가 싶으면 합격했다면 곧장 전화로 알릴 성격이라 망설여졌다.
결국, 도현은 그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얌전하게 답장을 보냈다.
[점심 먹기 전에 오는 거죠?]
저 문장 하나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는지 맥은 알지 못할 것이다. 저 문자에 맥은 태연하게 ‘평소에 가던 시간에 갈게’라며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5일.
도현은 그동안 맥에게 연락해서 묻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다. 그가 절제심이 강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못 참고 전화를 걸어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요?’라고 다짜고짜 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길에 지갑이라도 흘리고 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진과 니콜라스가 굉장히 이상해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맥이 도현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오디션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도현은 5일이라는 기다림 끝에 맥을 만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본 맥의 안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냥 평소와 똑같았다. 그래서 도현은 더욱 아리송해졌다.
“궁금한 거지?”
“네?”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네.”
하얀 얼굴은 크게 표정 변화랄 것이 없었지만, 맥은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언뜻 보면 늘 무표정해 보여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무표정함 속에서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눈빛이 너무 다채로웠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문학적 표현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저 애의 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란 걸 깨달을걸.
그리 생각하며 맥이 태평하게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떨어졌어.”
내용은 전혀 태평하지 않았다.
도현이 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 맥을 쳐다보았다. 그가 너무 태연해 보여서 순간 놀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바로 말하지 않은 건 탈락한 게 쪽팔려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거든.”
도현은 자신이 위로에 끔찍하게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다. 괜히 입을 열어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보다는 다물고 있기를 선택했다.
“한심하게 봐도 이해해. 네가 많이 도와줬는데 바로 떨어졌으니까. 근데 웃기는 게 뭔지 알아? 나 거기 가서 한 마디도 못 했어. 연기를 안 시켰거든.”
일렬로 세워놓고 진열대에 놓인 물건 품평하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그게 끝이었다고 말하며 웃는 맥에 도현은 웃을 수가 없었다.
한참 말을 하다가 옆이 조용한 걸 깨닫고 말을 멈춘 맥이 거의 울 듯 일그러진 검은 눈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왜, 왜 그래. 나 괜찮아.”
“…맥.”
도현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
“…아니, 하. 아씨… 이거 좀 늦게 말하려고 했는데.”
놀리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맥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 다음 주에 오디션 봐.”
“네?”
“아서 역은 아니고… 호르헤 역으로.”
“호르헤… 어, 호르헤요?”
“어. 그거 맞아. 네 따까리 1.”
도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누바라는 명실상부한 가장 강력한 종족인 탓에 작중 르옌 누바라를 따라다니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의 이름이 호르헤였다.
르옌의 추종자 무리 중에서도 공격성이 강하고, 거칠고, 어딘가 도덕관념이 어긋난… 말하자면 행동 대장 격인 인물.
“아서처럼 비중이 있지는 않지만 네 따까리 역이니까 같이 연습할 수 있을 거 아냐.”
“그건… 아무래도 괜찮은데.”
도현이 이해하기 힘들단 듯이 눈썹을 산 모양으로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음.”
맥은 그 질문에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뭐라고요?”
“거기 있던 캐스팅 디렉터 한 분이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생각 있으면 호르헤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하셨어. 얘야, 이건 정말 좋은 기회야. 물론 아서 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그 캐스팅 디렉터가… 안경 쓰고 머리카락 짧은 남자 맞나요?”
“어? 맞아. 어떻게 알았니?”
맥은 그의 물음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나가기 전, 눈이 마주쳤던 그 심사 위원이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던 터라 완전히 싸가지 없는 얼굴로 마주친 상대였다. 다음 오디션이 있었다면 밉보였을까 봐 쫄았겠지만, 이제 다음이든 뭐든 없는 맥은 배 째란 심정으로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걸 보고 캐스팅을 한다고?
“허.”
이럴 줄 알았으면 당장에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를 품평하는 심사 위원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다 노려볼 걸 그랬나.
맥은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네가 그 역할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더라. 혹시 생각 있니?”
“무슨 역할이라고 했죠?”
오디션 제의만으로도 황당해서 역할 이름을 흘려들었던 맥이 도로 물었다. 그가 흔쾌히 답해주었다.
“호르헤야. 호르헤 조반니.”
“…아하.”
그제야 맥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호르헤 조반니.
맥도 아는 이름이었다.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그 이름을 모를까. 맥은 당장에 패스파인더의 엑스트라 이름까지도 줄줄 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호르헤 조반니는… 상당히 불량하고 공격적인 캐릭터였다. 한마디로 질 낮은 양아치 같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분노가 완전히 푸시식 식어버렸다. 준비한 걸 보여주지조차 못해 울분에 차 노려봤는데, 그 모습이 싸가지 없어 보여서 다른 역할을 제의받다니.
세상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고속도로 잘 달리다가 갑자기 핸들을 돌려 방지턱을 뚫고 산으로 올라간 격이었다.
너무 기가 막혔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일주일 안에 이쪽으로 연락을 주면….”
“할게요.”
“어?”
“한다고요, 오디션. 언제 하는 건데요?”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