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선택과 집중 (24)
와. 이야기를 다 들은 도현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은 둘째 치고 노력의 성과조차 보이지 못한 채 탈락했다는 부분에서는 대체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에 심사 위원을 노려봤다는 대목에서는 아연해졌으며, 거기에 꽂힌 심사 위원 덕에 새로운 오디션 자리를 얻어냈다는 말에는 할 말을 잃었다.
“어이없지.”
“하하….”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부정하기 어려운데 긍정하기는 또 뭐했다. 도현의 어물쩍한 반응에도 맥은 개의치 않았다.
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도현을 보았다.
실은 말 안 하려고 했다.
‘오디션에 대차게 떨어지고 조연 자리를 어처구니없이 따 와서 같이 연습하자고 하는 건 너무 볼품없잖아.’
그런 건 자존심이 용납을 못 한다.
하지만 평일에 홀로 호르헤 역을 준비하면서 맥은 부족함을 느꼈다.
‘맞춰봐야 해.’
누군가와 합을 맞춰 연기하는 것과 홀로 연습하는 건 전혀 다르다. 상대의 호흡과 나의 호흡, 감정의 교류, 박자와 흐름, 그 모든 것이.
그래서 맥은 자존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깟 자존심이 아니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이번 기회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이 생각나서 울분이 터질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죽죽 그일 때마다 맥은 다짐했다.
너희들이 날 떨어트린 건 내 연기를 못 봐서란 걸 증명하겠다고.
맥이 부러 평온하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내일 너랑 같이 준비하려고. 생각해 보니까 네 오디션 날이랑 나랑 하루 차이네.”
“아, 그러네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아직도 오디션 관련해서 다른 안내는 없어?”
“네… 저번에 알려준 게 전부예요.”
“그럼 너도 나랑 비슷한 오디션을 볼 수도 있겠다.”
그리 말한 맥이 잠깐 생각하더니 정정했다.
“아니다. 캐스팅으로 오디션 보는 거라 그렇게는 안 볼 수도?”
“으음, 그렇네요. 그럼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대비해야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맥은 그 미소를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만약 맥과 똑같은 방식의 오디션이라면, 솔직히 도현은 굉장히 불리했다. 그는 동양인이었으니까.
우연찮게 지나가던 프로듀서가 도현에게 무언갈 느껴 캐스팅했더라도, 그 자리에 그 프로듀서가 없다면 다른 이들이 동양인이란 이유로 탈락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아는 걸 얘가 모를 리가.’
그런데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마음가짐의 문제인가.’
맥은 저 흔들림 없는 확신이 부러웠다. 지금 순간조차, 호르헤 역까지 떨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도현을 볼지 걱정하는 자신과 다르게, 도현은 불길한 미래는 조금도 상상하지 않는 거 같았다.
“일단 점심부터 먹어요.”
도현의 말에 맥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얘기하다 보니까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나면 장면 몇 개 뽑아서 같이 맞춰보는 거 어때요?”
“그거 좋네.”
맥은 의욕을 다지며 대답했다.
“둘 다 이야긴 다 했니? 손 씻고 이리로 오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서혜나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맥이 온 건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진지해 보이는 두 사람에 방해하지 않고 있던 모양이었다.
서혜나는 맥을 배려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먼저 묻지 않고 평소처럼 대했다. 맥은 그녀의 배려가 고마운 동시에, 질질 짜며 집에 들어오자 ‘아이고 화상아, 네가 거기서 춤을 추든 랩을 하든 뭘 하든 해서 눈에 들었어야지’ 하고 등짝을 치며 잔소리를 하던 엄마가 떠올라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무래도 속상해 죽겠는데 속을 박박 긁어대서 방으로 뛰쳐 올라갔었지.
…뭐, 속을 뒤집어 놓은 다음에 맥이 가장 좋아하는 베샤멜소스와 바질이 들어간 라자냐를 해주긴 했지만.
“저 다른 역할 오디션을 보게 되었어요.”
서혜나는 지난 몇 주간 그의 편의를 봐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이 정도는 말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맥이 도현에게 설명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안타까움, 놀라움을 지나 이내 기쁨으로 물들었다.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왜요? 전… 오디션도 떨어졌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잖아. 대단한 일이야.”
떨떠름히 대답하던 맥이 입을 다물었다. 서혜나의 목소리에는 가식 한 점 없이 진심뿐이었다.
이 가족은 너무 낯간지러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맥은 어쩐지 열이 오르는 기분에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는 도현을 보자 속이 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 둘 성격에 한심해하거나 무시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따뜻하고 훈훈한 분위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진짜, 적응 안 되는 곳이었다.
* * *
델마 아카데미 도서관.
최근 도사모는 당황스러운 변화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도사모의 성실한 회원인 패트리샤는 지금 패닉 상태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패트리샤는 충격에 빠진 눈으로 요정을 보았다. 그녀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며 다시금 세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주변을 얼쩡거렸는데 말을, 말을 안 걸어!’
확인 사살을 받았다.
충격받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상주하고 있던 도사모 회원들이 이럴 수는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사모 회원에게 그 클럽에 가입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의 눈에 띄는 외모나 배우라는 특이점이 빠질 수 없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연코 그 친절함이었다.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어른스럽고 상냥한 태도는 그들을 헤어 나올 수 없게 했다.
친절함이 기본 패시브라도 되는 듯, 은근히 주변을 맴돌기만 하면 늘 ‘뭐 찾는 거 있어? 도와줘도 될까?’ 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결코 부담스럽게 굴지 않았다. 늘 일정한 선이 있었다. 그건 그와 친해지길 원하는 사람들을 더욱 애타게 만드는 그의 매력 중 하나였다.
그뿐이었다면 도사모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도서관의 책들을 머릿속에 전부 외우고 있는 건지, 기가 막히도록 취향에 맞는 책들을 골라 건네줬다.
몇 번 얼굴을 비치면 주변에 어슬렁거릴 때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줄뿐더러, 얼굴과 이름, 취향까지 기억해서 말을 걸며 책을 골라줬다. 한 번이라도 그 친절을 받은 사람은 꿀에 꼬인 나비처럼 자꾸만 그 주변을 맴돌았다.
패트리샤도 그 친절에 중독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처음, 친구 따라 도서관에 왔을 때 죽상이었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독서가 취미가 되었다. 아마 델마 아카데미 학생들의 독서량은 도현이 도서 클럽에 든 후 상승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데!
가만히 서서 책장을 정리하는 뒷모습에 냉기가 흘렀다. 패트리샤는 차마 말을 걸 자신이 없어 그 주변만 맴돌았지만, 슬프게도 요정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게 벌써 며칠째였다.
결국 [기린은 사과를 싫어해]를 품에 안은 채 미련이 뚝뚝 남은 눈으로 요정을 보던 패트리샤가 시무룩하게 처진 어깨로 등을 돌렸다. 작은 어깨가 내려간 모습이 퍽 애처로워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헤더가 혀를 찼다.
“애 울겠다. 내가 진짜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너 뭐 문제 있어?”
“…무슨 문제?”
단정하게 서서 책을 정리하던 도현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린 후 물었다. 헤더는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또 이런다.
헤더는 요즘 도현이 종종 낯설게 느껴졌다.
아일라 사건을 거치고, 같은 반이 되고, 수학 올림피아드를 같이 준비하고 심지어 도서 클럽 활동도 같이하게 되면서 짝이어도 어딘가 거리감이 있었던 그들은 굉장히 친해졌다. 헤더에게 가장 친한 남자애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도현이라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헤더는 종종 자신만 도현을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될 때가 있었다.
그건 최근에 와서 심해졌다. 어째선지 저번 주부터 도현을 대할 때 어색했다. 아니, 어색하다기보다는 조금… 조심스럽다고 해야 하나.
뭔가 눈을 마주치는 게 대단한 불경을 저지르는 중인 거 같았다.
“아냐.”
헤더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자, 도현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헤더가 그 시선에 얼굴이 뚫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무언가 고민하듯 망설이던 도현이 몸을 살짝 숙였다.
“비밀 지켜줘야 해.”
“뭐, 뭐길래?”
잠깐 고개를 든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속삭이듯이 작게 말했다.
“사실 배역 몰입 중이야. 새로 오디션을 보는 게 있거든.”
“뭐?!”
헤더가 소리치자 사서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이 따라붙었다. 헤더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조용히 하겠다는 사인을 보낸 후 속사포처럼 속삭였다.
“배역 몰입 중이란 게 무슨 소리야? 지금 연기 중이라는 거야?”
“응, 맞아.”
“그럼 요즘 은근히 이상했던 게?”
“그것도 맞아.”
“미친.”
헤더가 굉장한 별종을 보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비밀이라며.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야?”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잖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도현에 헤더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물었다.
“그럼 네 친구들은 알고 있어?”
“내 친구?”
“네가 몰려다니는 애들 말이야. 진, 니콜라스, 그리고 다비드도 추가되었던데.”
“아… 응. 저번 주에 미리 말했어. 배역에 몰입할 거라, 평소와 조금 다르게 행동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오디션이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최대한 몰입하고 싶어서 평소에도 연기하는 편이거든.”
“근데 이걸 왜 비밀로… 아, 시끄러운 게 귀찮아서 그러는구나.”
금방 도현을 파악한 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명실상부 델마 아카데미의 셀럽이었다. 그가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라면, 아이들이 관심을 보일 게 뻔했다.
“그럼 네 명만 알고 있는 거야?”
“아니, 해리 선생님까지 다섯 명?”
“아하….”
헤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지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도현이 가장 친하게 생각하는 게 그 세 명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헤더도 도현이 자신을 그만큼 친근하게 여길 거란 기대는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셋만 아는 비밀을 나한테도 말해준 거면, 내 착각 아니지?’
일방통행인 우정이 아니었단 증거를 찾은 거 같아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헤더가 유쾌하게 웃으며 도현의 팔뚝을 내리쳤다.
“좋아. 나만 믿어. 내가 비밀 지켜줄게.”
헤더의 호탕한 발언에 도현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봄바람 같던 평소와 다르게 고개를 숙여야 할 거 같았지만, 헤더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팔뚝을 내리치던 헤더가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에 손을 멈췄다. 도현이 따가운 팔을 매만지는 사이 그녀가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런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뭔데?”
“오디션이 언제야?”
“아.”
도현이 매끄럽게 웃었다.
“내일.”
헤더의 턱이 툭, 내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