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선택과 집중 (25)
“무, 물 좀 줄까? 목 안 말라?”
“괜찮아요.”
“그래, 목마르면 말해. 그거 말고 그러면 뭐 필요한 거 없어? 배는 안 고파?”
“점심을 잘 챙겨 먹어서요. 그리고 주머니에 사탕도 몇 개 넣어뒀어요.”
“사탕…?”
오스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자 도현의 얼굴도 조금 굳었다.
“사탕 먹다가 목에 걸리면 어떡하지? 너무 위험하잖아.”
“네?”
“안 되겠다.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사탕 대신 젤리를….”
“오스카.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제가 오늘 사탕 먹다가 목에 걸릴 확률과 지금 차 위로 번개가 떨어질 확률이 비슷한 거 같아요.”
“그러면 안 되지!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잖아!”
도현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은 맑다 못해 청명하기까지 했다. 그 무언의 항의에도 오스카는 꿋꿋했다.
“위험 요소를 안고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잠깐 들르는 거라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이건 어때요? 제 주머니에 마침 초콜릿도 몇 개 들어 있거든요. 제가 배고프면 사탕이 아니라 초콜릿을 먹을게요.”
“초콜릿이라면….”
오스카의 미간이 좁아지며 주름이 졌다.
“혀가 초콜릿색으로 물들면 어떡하지? 편의점에서 치약 칫솔 세트, 아니다. 사는 김에 가글액까지 사야….”
“그냥 젤리 사요. 젤리 먹을게요.”
먼저 두 손 두 발을 든 건 도현이었다. 저렇게까지 넋이 나가 있는데 운전은 또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결국 도현은 오스카가 사다 준 젤리 한 봉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미 사탕과 초콜릿이라는 입주민이 있었는데 젤리까지 더해지자 바지 주머니가 빵빵해서 웃긴 모양새가 되었다.
도현은 아침부터 군것질거리를 챙겨주었던 엄마한테 소소한 미안함을 느끼며 사탕과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오디션을 보는데 빵빵한 주머니로 가는 건 좀 그랬다.
대신 도현은 갈 길 잃은 전 입주민을 오스카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상태를 보건대, 자신보다 더 당분이 필요할 거 같았다.
도로를 내달린 차가 한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 오스카가 시동을 끄자, 도현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한 박자 늦게 내린 오스카가 곧장 도현의 앞으로 걸어와 그를 가운데에 두고 한 바퀴 빙 돌았다.
“다행히 구겨진 곳은 없네. 아, 여기 살짝 접혔다. 잠시만.”
토옥.
섬세하다 못해 깃털 같은 손길로 옷자락을 정리해준 오스카가 흡족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흰 티셔츠 위로 탄탄한 검은색 청재킷을 걸친 패션은 과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적당히 깔끔하면서 어느 정도는 캐주얼한, 줄여서 말하자면 그냥 평범한 패션이었는데 그걸 입은 사람이 안 평범해서 당장에 화보를 찍으러 왔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거 같았다. 오스카는 이것이 눈에 콩깍지가 낀 게 아니라 아주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확신했다.
도현의 시선이 건물로 향했다. 따로 떨어진 건물 쪽에 유독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 인파를 보고 도현은 ‘미국에 있는 모든 푸른 눈의 남자애를 다 모아놓은 거 같았다’는 맥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인파 중 한 명이 되어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막막한 심정을 느낄 때였다.
그들에게 다가온 스태프에게 오스카가 무언갈 보여주자,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가 싶더니 손짓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아이들이 와글와글한 건물과 다른 건물이었다.
도현과 오스카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최악인 상황은 피한 거 같지?’
맥에게 오디션 경험담을 들은 후, 오스카에게도 전달했던 도현이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동일하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오디션을 보는데 데이먼 컬렌버그가 그 자리에 없는 경우’라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끙끙댔지만, 끝내 이렇다 할 반짝이는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가만히 있다가 탈락하는 거나 돌발 행동을 해서 탈락하는 거나 어차피 탈락하는 건 마찬가지니 미친 척 도발을 해보자.’였다.
참고로 서른다섯 번의 시뮬레이션 중 오스카는 ‘저를 이대로 보내면 후회하실걸요. 제가 없으면 르옌도 없거든요.’라는 대사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보편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초면인 이들 앞에서 저런 발언으로 관심을 모으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심사 위원을 비롯해 다른 지원자들을 도발하는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도현이 진심을 담아 안도했다.
스태프를 따라 도착한 곳은 대기실이었다. 놀랍게도, 이곳에도 오디션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그 수가 적다는 것일까.
대기실에는 매니저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대기실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도현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건 너무 잘 알지. 네가 누군데.”
이럴 때만큼은 겸손을 갖다 버리는 도현에 익숙해진 오스카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도현이 웃으며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렸다.
“저는 오스카가 사준 젤리 먹고 있을 테니까, 오스카는 사탕이랑 초콜릿 먹으면서 편하게 기다려요.”
말에는 여유가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정말 다 했기 때문에 도현은 별로 긴장되지 않았다.
‘올림피아드 덕분인가.’
필사적으로 쌓은 노력을 한 번에 쏟아붓는 경험을 몇 번 해서 그런가. 무섭거나 불안하기보다는… 그냥 재밌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하루가 너무 재밌었다.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신난 도현의 모습에 오스카는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잠시 후.
도현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적당히 빈 곳을 찾아 앉았다. 정해진 자리가 없어서 아이들은 굉장히 뜨문뜨문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유색 인종이 나타나자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몰렸다. 의아하게 보는 시선 반, 이상하게 보는 시선 반이었다. 도현은 그 시선을 태연하게 무시하며 주머니에서 그가 가져온 단 하나의 짐을 꺼냈다.
이미 스태프에게 먹어도 된다는 확인을 받은 터라 부담 없이 젤리를 입 안에 쏙 집어넣은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젤리가 아니라 안에 과일 잼이 든 젤리였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서너 개 정도 집어 먹은 도현은 젤리를 한구석에 잘 놓고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적힌 것을 다시 볼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몇 번이고 상상했던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 후부터는 완전한 몰입이었다. 도현은 스태프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눈을 감은 그를 다른 아이들이 따갑게 쳐다보는 것도, 대기실 안의 스태프가 자는 줄 알고 깨워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빠졌다.
깜빡.
재차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저예요, 도현 리.”
도현은 그가 다시금 말하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딱 봐도 동양계 이름에, 스태프는 그의 신상을 확인하는 둥 마는 둥 하곤 앞장섰다.
그를 따라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공간이었다.
회의실, 혹은 사무실.
흰 공간에 긴 소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앞에 있는 테이블에 종이 뭉치가 놓여 있었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소파를 둘러싸고 있는 카메라 장비였다.
오디션 장소라고 하기엔 상당히 편안한 분위기였다. 일단 직사각형의 테이블 뒤에 나란히 앉아서 그를 평가하는 심사 위원이 없다는 점부터가 그랬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누군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해왔다. 도현은 곧장 그를 알아봤다. 피로가 만성인지 꺼칠한 데다가 어딘가 창백한 피부는 인상에 깊게 남아 잊어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컬렌버그 감독님, 오랜만이네요.”
“소설은 읽었니?”
“그날 바로요.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다 읽었어요.”
그가 손짓으로 소파를 권했다. 도현이 소파에 앉는 사이, 데이먼이 말했다.
“하룻밤 새 다 읽기엔 좀 길 텐데! 대단하네.”
“…그렇죠.”
“음? 방금 뭔가 생략된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잠깐 뜸을 들이던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두 권을 다 읽고 다음 권을 읽기 시작할 때가 때마침 학교 갈 시간이어서요.”
이것 봐라?
데이먼의 눈에 즐거움과 흥미가 떠올랐다. 도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마저 다 읽기 위해 할 수 없이 결석계를 냈지만, 그사이 제가 잠들진 않았으니 감독님의 말도 틀리지 않아요.”
데이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요점을 콕 집어냈다.
“그래서 학교를 빠졌다고?”
“미리 말해두자면, 엄마의 동의와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적당한 절차를 거쳐 정당하게 빠졌어요. 규칙은 아무렇게나 어기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야무진 발언에도 데이먼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만난 사람처럼 바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널 만난 날도 월요일이었어.”
졸지에 상습적으로 결석하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그럴까 봐 미리 열심히 변명까지 해두었는데. 모조리 쓸모가 없어져 도현은 조금 슬퍼졌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학교를 빠진 건 그날이 처음이란 걸 말하면 믿어 주실까요?”
“학교에 성실하게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너에게 감점을 매기지는 않으니 안심하렴. 난 그런 것보다는 영혼에서 울리는 끌림을 따라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안 믿는단 소리였다. 도현이 포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삼지만 않는다면야 굳이 부정할 필요 없었다.
더 정확히는 그가 문제 삼지 않을 걸 예상했다. 원하던 대로 그의 흥미를 조금 더 끌어내는 데도 성공한 거 같고.
아이의 영악한 속을 알 리 없는 데이먼이 소파에 앉은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거기 네 앞에 놓인 대본 보이지?”
“네.”
그의 뜻을 알아들은 도현이 대본을 들고 첫 장을 뒤로 넘겨보았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해. 거기에 있는 푸티지(장면)를 편하게 읽으면 돼. 물론 카메라가 너를 찍겠지만, 그걸 의식할 필요는 없어.”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대충 짐작했던 대로 오늘 도현이 할 것은 대본 리딩이었다. 정확히는 대본 리딩을 하며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 것일까.
“지금부터 잠깐 대본을 읽을 시간을 줄 건데, 너한테 지금 당장 대사를 외우란 건 아니니까 걱정은 내려놓고 그냥 어떤 장면인지만 파악하는 정도로 읽어봐.”
이전에 들어왔던 아이들이 그의 말에 겁을 먹었던 게 틀림없었다. 데이먼의 말은 황급하고, 어딘가 변명조였다.
혹시 부담감에 운 애도 있던 걸까.
얼떨결에 정답을 맞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도현이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몇 명의 사람과 카메라 장비들, 그리고 맞은편의 감독까지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금방 대본에 빠져들었다.
대본에는 두 장면이 있었다.
르옌은 1권에서 분량이 놀라우리만치 적었다. 거의 스쳐 지나가는 수준이라 지금 도현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장면은 2권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이내 검은 눈동자가 흰 종이에서 떨어졌다.
“다 봤니? 더 천천히 봐도 돼.”
“충분히 봤어요.”
고개를 저은 도현이 차분하게 말하자, 데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가볍게 해보자. 네 상대 역할은 내가 할 거야. 슬레이트가 내려가면 시작하면 돼. 내가 컷이라고 할 때까지 대본을 읽는 거야. 할 수 있겠지?”
“네.”
데이먼이 옆에 있던 카메라 감독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 주변에 서 있던 스태프 한 명이 손에 든 슬레이트를 쭉 내밀었다.
도현의 얼굴 앞에 하얀 슬레이트가 내려왔다.
그리고.
탁!
대화하는 내내 미미하게 감돌던 설렘이 사라지자, 슬레이트를 잽싸게 빼내던 스태프가 소년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특유의 단정하고 예의 바르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여전히 정중했지만, 조금 더 귀족적이며 냉소적인 정중함에 가까웠다.
“…이해가 안 되는데.”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상대를 응시했다. 그의 우미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비스듬히 기울며, 불쾌감을 담아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첫 번째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