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선택과 집중 (26)
데이먼은 ‘그래, 그렇지!’ 하고 말하려던 걸 주워 삼키느라 다음 대사를 한 박자 늦게 쳤다. 그럼에도 그 공백마저도 상황의 일부란 듯이, 도현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너라면 알고 있을 거 같아서.”
“알고 있을 거 같다고.”
곱씹듯이 뇌까린 소년이 미지근하게 데이먼을 쳐다보다가 실소했다.
“그래. 네 말은, 내가 이 소동의 원인이니 그 방법도 알고 있을 거란 소린가?”
“…뭐? 아냐! 나는 그냥 누바라라면 옛 고서라도 알고 있을까 해서…!”
지레 찔린 것처럼 허둥지둥대는 목소리였다. 놀랍게도 데이먼은 배우는 아니었지만, 연기를 잘했다. 적어도 대본 리딩에서 배우의 연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됐어.”
미소를 지운 도현이 사뭇 단조로운 투로 말했다.
“네 사정엔 관심 없어.”
고저 없는 음성은 내용과 달리 기이하게도 부드러웠지만, 조금의 온기도 품고 있지 않았다.
미묘하리만치 섬세한 연기였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데이먼의 머릿속에서 도현이 그려내는 르옌이 점점 구체화되어 갈 정도로.
“아서 우더.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의무도, 유감스럽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
전혀 유감이 없어 보이는 무심한 낯으로 말한 도현이 데이먼을 응시했다. 마치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비키라는 듯한 태도였다.
“네가 말해줄 때까지 비켜줄 수 없어. 너도 봤잖아, 가시에 걸린 채 죽은 그 처참한 모습을!”
“그래, 불쾌한 사실이지만 내가 가장 유력한 범인이란 것도 알겠지.”
데이먼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너와 얽힌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 행한 범인은 네가 아니야.”
그 확신 어린 태도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별 움직임은 없었지만, 어이없어하는 게 역력히 느껴졌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범인은 나무 밖에서 온 자니까.”
주위를 한번 둘러본 데이먼이 목소리를 죽였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내가 봤어. 결계가 일그러지는 걸. 범인은 이곳에 있는 길잡이가 아니야. 다른 외부의 세력이지. 대체 어떻게 신성한 결계를 뚫고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서 우더.”
그는 얼핏 건조한 태도로 아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가 동요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소년이 새카맣고 차가운 눈으로 데이먼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얼핏 입꼬리가 비틀려 있는 것도 같았다. 데이먼은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꼈다.
“내가 얽힌 일이라면, 목격자인 넌 계획에 방해물일 뿐이니 당장에 널 죽일 수 있어. 아니면 내일 가시에 걸린 이가 네가 될지도 모르지. 다시 물어보지, 아서 우더. 대체 무얼 믿고 그러는 거야? 네 알량한 힘? 아니면… 친구?”
도현의 시선이 데이먼의 옆을 스쳤다. 지금은 없지만, 해당 장면에는 원래 아서의 동료이자 친구인 노아족의 소녀가 함께였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소녀에게서 시선을 뗀 도현이 다시금 데이먼을 눈에 담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데이먼은 그 눈에서 튀기는 파란 불꽃을 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아니야.”
한 박자 쉰 데이먼이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부탁을 들어줄 의무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그러니까 난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도록 대가를 내민 거뿐이야.”
“완전히 제멋대로군. 대가는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거라는 것 정도는 상식일 텐데.”
“하지만 넌 나한테 바라는 게 없잖아.”
도현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데이먼이 선수 쳤다.
“지금 네 앞에서 사라지는 거 빼고 말이야.”
도현이 눈가를 찡그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던 소년이 몇 초간의 정적 후,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충고 하나 하자면,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는 걸 그 얼빠진 머리에 새기는 게 좋겠어. 어느 날 비명횡사를 하고 싶은 게 소원이 아니라면 말이야.”
신랄한 비난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데이먼은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상당히 골칫거리를 보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가, 아주 짧은 찰나 무언가를 집어삼키듯 찡그리고, 결국엔 서늘하게 말했다.
“이 이상 날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맹세할게.”
곧장 나온 대답에 도현이 한쪽 눈썹을 휙 올렸다가 내리더니 탐탁지 않은 기색을 지우고 원래의 우아하고 고요한 낯으로 돌아갔다. 아까까지는 고압적이며 재수 없긴 해도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면 지금은 도자기로 빚은 인형처럼 무표정했다. 데이먼은 저도 모르게 그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물었다.
“그래서, 내게 궁금한 게 뭔데?”
“컷, 오케이.”
탁!
데이먼의 말이 떨어지고 슬레이트가 반 박자 늦게 도현의 얼굴 앞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고는 물러갔다.
데이먼은 고개를 쭉 빼 들고 있느라 뻐근해진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다양한 버전의 르옌을 보았다.
오만한, 냉혹한, 차가운, 예민한, 불같은, 재수 없는 등등…. 수많은 지원자가 있는 만큼 그들이 해석한 르옌은 비슷할 때도 있었고, 완전히 다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도현의 르옌은 무언가 딱 한 단어로 꼬집에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적당한 수식어를 찾기가 힘들었다. 모든 게 두루뭉술했다.
오만한가 싶으면 정중하고, 냉혹한가 싶으면 무르며, 차가운가 싶다가도 그저 거리를 두는 거 같고, 예민해 보이다가도 그저 지쳐 보이고, 차갑게 식은 것 같다가도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다.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종잡을 수 없다’가 제일 적확했다. 마치 결말이 없는 소설을 읽는 거 같았다. 어떻게, 어느 방향에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갈리는 그런 소설.
말이 쉽지, 글도 아니라 연기로, 표정 근육과 말의 높낮이, 숨의 간격 따위로 그런 ‘종잡을 수 없음’을 표현하는 건, 그게 연기의 일관성을 해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일관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건….
데이먼은 ‘타고났다’라는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데이먼이 느낀 게 도현의 의도가 아니라 해도 좋았다. 그는 무언가 달랐다. 영감에 예민한 데이먼은 도현이 범인과는 다른 어떠한 영역에 있음을 느꼈다.
‘동양인은 개뿔. 다 집어치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데이먼은 차라리 이 소년이 영화와 끝까지 함께해줄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앞뒤 꽉 막힌 인사들이 그렇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좋았어. 이번에는 이쪽을 보고 해보자. 대본을 볼 때 말고는 시선을 올려서…, 아.”
말을 하던 데이먼이 뚝 멎었다.
“대본을… 봤던가?”
기억을 뒤져봐도 도현은 내내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야, 몇 번이나 이걸 반복하며 이제 자다가도 읊을 지경이라지만….
그 물음에 슬레이트를 들고 있던 스태프가 팔로 엑스 자를 그렸다. 데이먼의 시선을 내려트려, 바르게 앉아 있는 소년을 보았다.
앉은 자세 좋네… 아니, 이게 아니고.
“그사이에 대사를 다 외운 거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게, 대사와 장면은 각색을 거친 터라 소설과 비슷한 듯 달랐다.
“장면이 짧았어요.”
데이먼이 놀라워한 것은, 물론 그 짧은 사이에 완벽하게 외운 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외운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연기를 펼친 자신감이었다. 외웠다고 생각하다가도 의심이나 불안이 남아 있다면 대본을 봤을 테니까. 애초에 대본 리딩이었다.
데이먼은 도현이 스스로에게 갖는 확신이 마음에 들었다. 틀려도 개의치 않을 용기마저도. 르옌과는 좀 다른 부분일지 몰라도, 배우에게는 아주 멋진 역량이었으니까.
“오늘 너를 보고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어. 넌 정말 기대 이상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단정하게 앉아 웃는 얼굴은 또 르옌과 닮은 거 같았다.
“좋아, 한 번 더 해보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네.”
도현이 아까 그가 말한 대로 몸을 좀 더 틀며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카메라가 들어오길 잠깐, 눈앞에 하얀 슬레이트가 드리워졌다.
* * *
도현은 한구석에서 잘 기다리고 있었던 젤리를 도로 들었다. 입에 한 개를 쏙 집어넣고, 옆에 있는 스태프를 쳐다보았다. 그가 나가도 좋다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은 스태프가 훈훈하게 웃으며 도현을 보내주었다.
도현은 저 다음으로 나가는 소년을 흐르듯이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갔다. 벽에 기대서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던 오스카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현!”
“오스카.”
오스카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침을 삼켰다.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젤리 되게 맛있어요.”
“…….”
침묵하는 오스카에 도현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아, 덕분에 잘 먹었어요.”
“…그래.”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애타 하는 걸 보자 낮에 오스카의 행동에 느꼈던 황당함을 보상받는 거 같아 슬쩍 웃었다.
“일단 나갈까요?”
오스카는 이곳이 대기실 앞이란 걸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는 꽤 이른 오후였는데, 슬슬 저녁으로 접어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도현은 오스카가 궁금해 죽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대본 리딩을 했어요.”
“대본 리딩?”
“네. 두 장면이었는데, 둘 다 여러 번 촬영했어요. 아, 그리고 제 상대역을 해준 사람은 데이먼 컬렌버그였고요. 그는 저를 꽤 좋게 본 거 같았어요. 표정이 밝았거든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오스카에 도현은 있었던 일을 좀 더 상세히 설명했다. 들어가서 나눈 대화와 어떤 장면을 연기했는지, 반응은 어땠는지, 감독이 무어라 했는지 등등….
“아쉬움이 남는 건 없었어요. 컬렌버그 감독님이 저도, 감독님도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게 해줬거든요.”
아직 최종 후보도 아닌데 꽤 정성스러운 태도였다. 오스카는 감독이 저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도현의 말이 진실에 근접하리라 생각했다.
“결과는 언제 알려준다는 말 있었어?”
“합격하면 연락이 갈 거래요. 근데 언제라고는 안 알려줬어요. 아, 나가는 길에 스태프 한 분이 알려 주셨는데, 이 주 내로 연락이 안 가면 보통 탈락인 거랬어요.”
탈락하라고 말한 건 아니고, 도현이 헛된 기대를 품으며 마음 졸일까 봐 친절하게 해준 충고에 가까웠다. 아마도 그의 눈에 도현은 이 단계에서 떨어질 아이로 보였던 거 같았다.
“아마도 네 테스트 영상을 심사 위원들이 다 같이 보고 너를 다시 부를지 말지 결정할 거야.”
오스카의 말에 도현이 짧게 긍정했다.
“잘 봐줘야 할 텐데….”
오스카가 불안함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먼 컬렌버그가 이 영화에서 주축인 프로듀서 중 한 명이라고는 하지만, 주축인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다.
이 정도 거대한 프로젝트는 프로듀서도 협력 프로듀서, 제작자, 공동 제작자 등, 여럿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원작자의 파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원작자가 히트 친 소설의 주인인 이상, 그의 의견이 중요하게 작용하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건물이 보였다. 이제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