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선택과 집중 (27)
마리아 그라시아.
그녀의 호적상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M. Paul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 분명했다.
그건 마리아가 를 출간하면서 사용한 가명이었으니까. 그녀의 본명은 두 살에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에 아버지 쪽의 성씨를 따 지어진 이름이었고, 필명은 어머니의 성씨를 빌린 것이었다.
마리아의 인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녀는 할 말이 무척 많거나,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길 택할 것이다.
프랑스 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미국인인 어머니를 따라 뉴욕에 정착했다든가, 그녀의 자유로움을 빙자한 방임 속에서 컸다든가, 어머니의 화려한 연애사를 보며 아버지와의 이혼 사유를 짐작했다든가 따위를 말이다.
마리아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할리우드 스캔들이나 가십보이 같은 드라마에 열광하지 않았다. 집에서 늘 보는 풍경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게 맞겠다.
대신 마리아는 복잡하고 지저분한 현실 대신 상상의 세계를 더 사랑했고, 좀 더 상상력이 넘치는- 나쁘게 말하자면 나사가 하나 정도 나간 아이로 자랐다. 판타지와 오컬트는 마리아가 사랑하는 것이었다.
마이너한 취향을 가졌지만, 마리아는 인기인이었다. 조금 엉뚱하긴 해도 학업에는 관심 없고 잘 놀고 얼굴도 예쁜 여자애는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17살에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러나 시작은 쉬웠을지 몰라도, 본격적인 모델의 삶은 쉽지 않았다. 마리아는 아주 매력적인 소녀였지만, 거긴 마리아만큼 매력적인 소녀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마리아는 끊임없이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고, 교통비도 안 주면서 멀리 불려가고, 사람보다 옷장에 걸린 수많은 옷걸이 중 하나로 취급받는 것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모델 일을 관둔 마리아는 시니어스쿨을 졸업하고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는 남자를 만나 그와 결혼해 맨해튼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리고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건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마리아는 그때의 고생을 굳이 되짚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튼 마리아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고, 남편과 이혼한 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평범한 주립 대학의 불문학과에 들어갔으니까.
그 뒤늦은 도전을 도와준 건, 놀랍게도 마리아의 어머니였다. 그 일로 소홀했던 모녀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마리아는 도전의 귀중함을 감사하게도 일찍 깨달은 편이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하고 봤다.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일을 해서 여행을 다녀왔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자신과 맞지 않는 거 같으면 과감히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다.
그러다 마리아가 ‘판타지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닿게 된 건 사실,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마리아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본 경험이 있었다. 어머니의 애인들, 학교 친구, 모델 일을 하며 만난 이들, 이제는 헤어진 남편,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과 그녀의 남자 친구들….
그들은 마리아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영감을 주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서 모티프를 얻어 캐릭터를 짜냈다. 장르는 어릴 적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동화 같은 판타지였다.
그녀의 첫 독자였던 어머니는 마리아의 소설을 읽고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건 마리아의 독기를 자극하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웃지 않고 읽을 때까지 쓰고,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마리아에게 다음 이야기는 언제 쓸 거냐고 은근슬쩍 물어올 때 마리아는 소설을 써내 출판사에 보냈다.
그리고 히트 쳤다.
얼떨떨한 일이었다. 소설이 흥행한 지 벌써 오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마리아는 가끔 잠에서 깰 때면 이게 꿈은 아닌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마리아는 이게 자신이 해낸 일이란 걸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 하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그녀에게 의 영화화는 앞으로 남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덜컹.
“작가님.”
마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데이먼이 몸을 일으켰다.
“제가 가도 괜찮았는데요.”
“작업실이랑 그리 멀지 않아서 괜찮아요. 요즘엔 맨날 작업실에서 살거든요. 이 김에 산책 삼아 걷는 거죠.”
마리아가 손에 든 커피를 그의 앞에 건네주며 말했다. 데이먼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커피를 받으며 의자에 앉은 그녀의 앞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말했다.
“오기 전에 말씀드렸던 오디션 푸티지 영상입니다.”
“르옌 영상이라고 했죠?”
마리아가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마리아는 최대한 캐스팅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이 한 개인 이상 모든 후보를 살펴볼 순 없었다. 지금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서 우더 역할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중이었다.
“네, 회의 들어가기 전에 작가님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이게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고요. 작가님을 귀찮게 한 게 아니라면 좋겠네요.”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구해달라고 제가 부탁한 걸요. 저도 이 영화에 온 신경을 쏟고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가볍게 대답한 마리아가 노트북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대체 뭐길래 그래요?”
“음, 온 김에 다른 후보들부터 보여 드릴게요. 괜찮은 후보가 꽤 있거든요.”
“데이먼이 말한 후보는요?”
“제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보면 아실 겁니다. 알 수밖에 없거든요.”
“정말 마음에 들었나 봐요.”
“영상을 보기 전에 말하기엔 이르지만….”
데이먼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최고였죠.”
이쯤 되자 마리아의 호기심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나 데이먼은 예의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첫 번째 영상을 틀 뿐이었다.
리더기를 꽂고 프로그램을 재생시키자, 깜깜하던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평범한 사무실 풍경 속, 한 남자아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 이제 시작해도 되겠니?
- 음, 네.
남자아이의 대답과 함께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마리아는 아까의 호기심을 잠깐 미뤄둘 정도로, 아이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았다.
마리아가 감탄하듯 말했다.
“정말 괜찮네.”
“그렇죠? 연극에 오른 경험이 몇 번 있어서 여러모로 능숙한 친구죠. 모델 출신이라 잘생기기도 아주 잘생겼고요.”
“몇 살인가요?”
“흠, 아마… 두 달 전에 생일이 지나 열두 살 되었을 거예요.”
“그래요? 조금 더 나이가 있을 거 같았는데.”
마리아가 의외란 눈빛을 했다. 괜히 모델 출신이 아닌 건지, 나이에 비해서 쭉쭉 뻗은 팔다리와 어려서부터 남다른 남성적인 이목구비가 시선을 끌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때가 기대되는 얼굴이었다.
영상이 끝나자 마리아가 고개를 들어 데이먼을 보았다.
“오만한 연기는 좋지만… 좀 과해서 딱딱한 느낌이 있네요. 귀족이라기보단 기사 같달까? 그런데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르옌이랑 잘 맞아서 연기적인 부분은 조금 수정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데이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데이먼과 마리아는 취향이 제법 잘 맞는 편이었다. 마리아가 르옌 역할을 데이먼에게 넘기고 아서를 찾는 것도 그의 안목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데이먼이 두 번째 지원자의 영상을 틀었다. 마리아는 이번에도 눈 한번 떼지 않고 집중해서 보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마지막 영상을 남겨놓고 두 사람은 잠깐 커피를 마셨다. 이런저런 코멘트를 붙이느라 목이 꺼끌해졌던 마리아가 커피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대체로 얼음 같은 이미지네요.”
“지금까지 본 후보 중에서는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살짝 웃은 마리아가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외모적인 부분은 첫 번째 지원자가 제일 괜찮았고, 르옌에 가장 어울리는 건 세 번째와 다섯 번째였어요.”
세 번째 지원자.
어린데도 샤프한 얼굴선이 돋보이는 아이였다. 무엇보다 가장 특별했던 점은, 그 아이의 연기였다.
“다른 르옌은 좀 더 차갑고, 냉철하며, 귀족적이었다면 세 번째 지원자의 르옌은….”
“어린아이 같았죠.”
데이먼이 말을 받자 마리아가 바로 그거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지금까지 르옌을 그런 이미지로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그 친구를 보고 나니까 설득력이 있다 싶어요. 좀 더 미숙하고, 어린 르옌이요.”
“그럼 다섯 번째는요?”
“그 친구는 완전히 반대죠. 가장 강렬했어요. 임팩트는 다섯 번째 지원자를 따라갈 애가 없던데요. 강렬한 인상을 만들기에 딱 좋은 느낌이었죠.”
영화 속 인물은 의외로 순간적인 이미지가 중요했다. 그 이미지에서 주는 느낌이 영화 내내 이어지니.
그런 면에서 다섯 번째는 초반에 짧게 나오는 르옌을 관객의 머리에 강하게 박아 넣기에 충분해 보였다.
“셋 다 좋았어요. 정하려면 고민이 좀 필요할 정도로.”
“그 고민은 잠깐 뒤로 미루죠. 마지막 영상이 남았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마리아가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지원자가 삼만 명을 넘어가니, 몇천 대 일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아이들이라 그런가. 한 명 한 명이 보석 같아서 완전히 주의를 빼앗겨 버렸다.
언급하지 않았던 두 번째와 네 번째도 상대적으로 부족했을 뿐, 아니,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그녀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았을 뿐 따로 떼어놓고 보자면 훌륭했다.
마리아는 다음 파일을 눌렀다. 그리고 정지된 화면에 나오는 얼굴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죠?”
“네.”
“오, 맙소사. 동양인이라고요?”
마리아가 잠깐 영상을 틀었다가 멈추더니 말했다.
“아니, 혼혈인가?”
“동양인입니다. 정확히는 한국계 미국인이죠.”
마리아가 할 말을 잃고 데이먼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데이먼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조건에 인종은 없었으니까요.”
“물론 그렇겠죠. 주인공 격에 동양인 후보를 데려올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작가님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강경한 생각은 없으시잖아요?”
물론 마리아는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 목록에 끼지 않은 인종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그런 경험은 그런 것들이 한 사람을 이루는 요소 중 한 가지뿐이란 걸 깨닫기에 충분했다.
“데이먼, 제가 말하는 게 그 문제가 아니란 걸 알잖아요. 제 소설은, 그래요. 솔직히 엄청나게 히트 치긴 했지만, 이건 제 첫 영화화라는 걸 당신은 알아야 해요. 실패할 수도, 실패해서도 안 돼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도 그래서 도현을 작가님께 보여드리는 거고요.”
“…데이먼. 지금 완전히 꽂혔군요. 그렇죠?”
“일단 영상부터 봐요.”
데이먼이 부정하지 않자 마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데이먼이 영상을 재생하자 마리아는 가벼운 체념과 함께 화면을 응시했다.
- 다 봤니? 더 천천히 봐도 돼.
- 충분히 봤어요.
“오, 저 애는 너무 어려 보여요. 뭐, 분위기는 확실히… 음, 그래요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랍네요. 제 소설에 요정이 등장한다면 그 역할로 캐스팅을 고려해보고 싶을 정도로요. 그래도 저 애는 르옌이라기엔 너무 올곧아 보여요.”
“그리고 인상마저 바꾸는 배우죠.”
-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데이먼의 간결한 대답이 채 떨어지기 전에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시작된 연기에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인상마저 바꾸는 배우’라고. 마리아는 그게 데이먼의 과장이나 허언이 아님을 금방 깨달았다. 그래, 한번 보기나 하자. 마리아는 자세를 바로 했다.
- 아서 우더,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의무도, 유감스럽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인상적이긴 해요. 하지만 데이먼, 당신이 그렇게 말할 만큼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인정할 건 인정했다.
다른 르옌처럼 특유의 오만함이 있긴 했지만, 독특하게도 비꼬는 와중에도 묘하게 정중했다. 마치 오랫동안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지도자처럼.
데이먼은 계속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도 할 말을 삼키며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못마땅하던 눈빛에 점차 진지함이 어렸다.
- 아서 우더.
- 도대체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두 대사 사이의 미묘한 간격.
대사가 이어졌다. 마리아는 뭔가 엇갈리던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 그것도 아니면, 혹시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고요하던 얼굴에 짧은 찰나 드러났던 것을 본 순간, 무언가 철컥, 하고 완벽하게 끼워 맞춰졌다.
그녀는 원작자였다. 가장 르옌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저 소년의 얼굴에 스쳐간 감정을 모를 리 없었다.
화풀이.
르옌의 저 대사는 아서를 향한 화풀이, 향할 곳 없는 분노와 혼란이 튄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걸 읽어낸 건 저 소년이 유일했다.
물론 이야긴 받아들이기 나름이라지만, 독자가 의도를 읽어낸 것이 기쁘지 않은 작가가 어디 있을까? 그녀의 얼굴이 점점 풀렸다.
- 이 이상 날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감정이 거세된 듯 무표정한 낯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연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면, 그저 우기는 아서가 귀찮아서, 혹은 짜증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마리아의 눈에는 두려움을 숨기려는 아이처럼 보였다.
마리아가 멈춘 영상을 잠깐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어째서 저를 불렀는지 이해했어요. 당신의 안목을 의심한 건 사과할게요.”
마리아는 무척 아깝다는 듯이, 눈가를 찡그리며 멈춘 화면 속의 소년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전 여전히 반대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