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선택과 집중 (28)
데이먼은 실망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알고 있을까. 그녀의 시선이 계속 화면에 붙들려 있다는 걸?
지금 이렇게 말하는 데이먼조차 도현을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그를 후보 선상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작가님 의견은 알겠습니다. 일단 남은 영상은 다 보고 얘기해봐요.”
“아, 다음 장면이 남았었죠. 좋아요.”
마리아가 팔짱을 꼈다. 절대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방어적인 태도였지만, 데이먼은 그저 다음 파일을 클릭했다.
소년이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방금 막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고르던 소년이 이내 짓씹듯 내뱉었다.
- 너구나.
툭, 던져진 말에 스스로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 너였어.
그러나 소년은 피하지 않았다. 다시금 사실을 되새기듯 그 말을 반복했다.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속을 붙잡고, 공포에 질렸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 너는 날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그건 질문이라기보단 끓어 넘치는 감정을 어떻게든 눌러내어 그 조각 하나를 토해내는 것에 가까웠다.
- 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울렸다. 마리아는 팔짱을 끼었던 손으로 팔뚝을 쥐었다. 충혈된 눈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그녀는 말문을 잃었다.
간간이 숨을 끊어가며 웃던 소년이 비틀거리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느릿하게 숨을 뱉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그가 고개를 들었다.
- 숨기느라 고생했겠어. 누구보다 내 죽음을 간절히 원할 텐데. 이거, 수고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짧은 시간이었다. 겨우 일 분 남짓 되는 시간, 그 시간 만에 분위기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뭐 받아들일 시간이라도 줘야 적응이라도 하는데, 화면 속의 소년은 화면 너머의 사람에게 그저 때려 박고 있었다.
빈정거리던 소년이 대답 없는 상대에 점차 표정을 잃어가다가 어느 순간 툭, 내뱉었다.
- 왜 나를 죽이지 않았어?
안정적인 발성이 귀에 묵직하게 꽂혔다.
앞선 다섯 명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나이가 어린 탓에 무게감은 부족했다. 음성에도 질량감이 있다면 소년의 목소린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에 투둑, 떨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 나를 죽이고 싶잖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소년이 그 간격을 버티지 못하고 어딘가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 …알겠다.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거지? 아, 그라면 네게 목줄을 걸어 두었겠군. 그래, 그래서 나를 죽이지 못했던 거야. 그렇지?
- 그랬다면 널 호수에서 꺼내지 않았겠지.
- 이유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딴 식으로 굴지 말고 말을 해!
참고 참다가 터져버린 것처럼, 소년이 분노를 쏟아냈다. 간신히 유지하던 가면이 완전히 깨져 나가자 그 속의 날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단단히 악문 이에 목에 핏대가 섰다. 타오르는 눈은 금방이라도 눈앞의 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기이할 정도로 두려움에 질려 있다.
극단적인 연기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에 절제되었던 연기를 본 탓인가. 가림막 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과 호흡이 마리아에게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다.
- 나도 모르겠어.
고통을 잘 표현하는 배우들은 많이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도는 것처럼 답답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지금도… 아니다. 그런데 르옌, 지금 한 가지는 안 거 같아.
화면 속 데이먼은 연기에 몰입했는지 목소리가 아주 사실감이 넘쳤다. 그가 마지막 대사를 꺼냈다.
- 너를 증오하고, 죽음을 바라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복수가 뭔지.
데이먼의 말이 떨어지자, 소년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날카롭고 단단하게 솟은 성이 순식간에 부서져 버리는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였다.
- 맙소사, 하마터면 널 죽이고 싶다고 말할 뻔했어. 보여? 지금 닭살까지 돋았다고.
- 하다 보니 생각보다 더 격렬하게 표현돼서 조금 과했나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 어, 굳이 보여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화면에 데이먼이 내민 팔 한쪽과 떨떠름한 도현의 얼굴이 재생되다가, 도현이 웃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재생이 종료되었다.
“…….”
사무실에 정적이 가득 찼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마리아가 침음을 삼키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다다다, 말을 뱉었다.
“아, 그래요, 그래. 데이먼, 감독님이 이겼어요!”
“우리가 언제 싸웠던가요?”
“하.”
마리아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강렬한 시선에 데이먼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쩍 말라 피곤함이 그득그득 묻은 낯짝에 어울리지도 않는 생기가 도는 것이 얄미웠다.
“이래서 여유로웠던 거군요?”
“일단 작가님이 도현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했습니다.”
“…부정할 수가 없네요.”
커피가 담긴 일회용 컵을 손으로 감싼 마리아가 손가락을 툭, 툭,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마리아가 입을 뗐다.
“저는 욕심이 많아요, 데이먼. 그래서 두 번째 장면을 넣어달라고 했던 거고요.”
두 번째 장면은 원작자의 의견으로 오디션에 사용된 장면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리아는 그런 강렬한 마이너스적인 감정마저 잘 소화해낼 배우를 원했으니까.
“르옌은 제 소설의 인물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복잡하고 꼬여 있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르옌을 맡을 배우라면, 어느 정도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알고 이해하는 친구이길 바랐죠.”
“네, 기억해요.”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당부하면서도 사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오디션을 보는 아이들은 모두 십 대 초반이잖아요. 노련한 배우들에게서 나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묵직한 감정 연기를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나요?”
마리아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이 일어났네요.”
첫 번째 장면을 봤을 때, 제법, 아니, 솔직히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의도를 잡아낸 연기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섬세했던 연기.
그러나 거기까지.
연기도 해석도 훌륭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리아의 머릿속에서 동양인인 르옌은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대로 놓치기는 아쉬우니 르옌 역할을 아니더라도 적당한 배역에 출연시켜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연기를 봤을 때.
어딘가 심심했던 부분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 비로소 완전히 채워져 버린 느낌이었다.
소년의 두 가지 연기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분명 다른 장면, 다른 시간대, 다른 상대와 대화하는 것이지만 분명히 하나의 연장선상 위에 서 있었다.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마리아는 비로소 첫 번째 연기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의 소름이란.
대체 어디까지 보고 연기한 걸까.
무슨 생각으로 연기한 걸까.
사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마리아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깊이가 평범한 호수라면, 저 소년은 알아서 마리아나 해구까지 들어간 느낌이랄까. …이렇게 생각하니 좀 웃기긴 한데.
얼굴을 찡그린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영상도 있어요?”
“이게 제 기준 베스트 영상이긴 한데… 다른 것도 보실래요?”
“네, 틀어주세요.”
“그거 반가운 말이네요. 사실 영상 고르느라 힘들었거든요. 이 애가 좀 미쳐서.”
잠시 후.
마리아는 데이먼의 ‘미쳤다’는 말을 완전히 납득했다.
총 네 개의 영상을 다시 봤는데, 영상마다 연기가 달라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본인의 해석은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지휘자처럼 온갖 감정의 정도를 섬세하게 조율했다.
모 영화처럼 머릿속에 감정들이 살고 있어서 ‘저기는 슬픔이가 10만큼 슬프고 여기는 분노가 2만큼 화내고. 행복이는 쉬고 있고….’ 이런 식으로 수치를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현이라고요. 한번 만나 봐야겠어요.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요. 아, 앞서 말했던 첫 번째랑 세 번째, 다섯 번째 지원자도요.”
“일단 지목하신 후보들은 모두 체크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이먼이 말을 덧붙였다.
“오늘 몇 명 미리 보여드리긴 했지만, 며칠 후에 회의가 있을 거예요.”
캐스팅 과정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거르고 거른 인선을 또다시 평가하고 심사해서 확인하고, 그것을 영화 제작의 중추들이 모여 다시금 갑론을박을 펼치며 결정했다.
“그때 힘쓰란 거죠?”
“역시 작가님. 척하면 착이시네요.”
그런데 왜 원작자를 미리 불러들였냐, 묻는다면 데이먼의 노력 내지 술수라고 볼 수 있었다. 미리 강력한 내 편을 만들어두는 유치한 짓이기도 했다.
유치하지만, 원래 살다 보면 적당히 유치해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데이먼은 적어도 도현의 연기조차 보지 않은 채 인종을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하거나, 그를 떨어트리고 싶어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내려는 시선으로 보는 분위기는 피하고 싶었다. 거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원작자였다.
인물을 창조해낸 어머니가 르옌이 맞는다는데,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할까.
마리아가 가방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지금 해야 할 일이 막 생각나서요. 다음엔 식사라도 같이 해요.”
마리아는 데이먼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향한 곳은, 이제는 집처럼 느껴지는 작업실이었다.
거침없이 걷던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 마리아의 얼굴엔 고민하는 기색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 * *
“도현아, 엄마 왔어!”
“오셨어요?”
거실에서 케일리와 독서 시간을 가지던 도현이 현관 앞으로 총총 걸어왔다. 케일리와 서혜나도 익숙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뭐 읽고 있었어?”
“요.”
“…또?”
서혜나는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디션을 보고 난 후 이 주일가량이 흘렀다. 도현은 오디션을 봤던 게 없던 일이라는 것처럼, 틈만 나면 소설을 잡고 있었다.
보고 있자면 이제 도현이 P를 보고 헛구역질을 해도 ‘그럴 줄 알았어’라고 태연히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을 정도였다.
“저는 이제 가볼게요. 저녁거리는 제가 미리 만들어 놨어요.”
“세상에,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도현이 너무 얌전해서 제가 하는 일도 별로 없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미안해서…. 그럼 저녁 같이 드시고 가는 건 어때요? 물론 제가 차리진 않았지만, 좋은 와인을 꺼내 올게요.”
“정말 멋진 제안이네요.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집에서 아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남편이 어딜 좀 가야 해서 집을 비울 예정이거든요.”
“오, 그렇다면 들어가 봐야죠. 아, 이거 가지고 가요. 오는 길에 사 온 건데 아들이랑 나눠 먹어요.”
서혜나가 손에 들린 상자를 케일리 손에 쥐여주었다. 유명한 베이커리 집에서 사 온 머핀 세트였다. 케일리는 몇 번 사양하다가 일부로 케일리 것까지 사 왔다는 서혜나의 말에 고맙다고 말한 후 떠났다.
“엄마 씻고 같이 저녁 먹을까?”
“네. 전 위에서 좀 더 책을 보고 있을게요.”
도현은 그 말 그대로 방에 올라가 아까까지 보던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흰 공백이 좀 있던 책은, 도현의 글씨로 채워져 완전히 까매져 있었다.
집중해 그것을 보던 도현의 시야에 달력이 들어왔다.
“이 주라고 했지….”
도현의 목소리에 조금 착잡함이 깃들었다.
왜냐면 오늘은, 이 주 하고도 이틀가량 지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전화기 앞에 앉아 있었다. 오전, 오후 내내 그러고 있다가 해가 졌을 때쯤엔, ‘밤에 오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열두 시까지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낙심한 도현에게 오스카가 ‘정확히 기간이 정해진 게 아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방에 틀어박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일요일도 지나버렸다.
도현은 솔직히, 버거웠다. 도현의 오디션 다음 날 오디션을 봤던 맥이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긴 것도 신경 쓰여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남의 일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스태프가 말했던 ‘이 주 안으로 연락이 안 오면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라는 발언을 모르는 서혜나는 도현이 그저 막연한 기다림에 초조해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도현은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이고 엄마한테 이 사실을 전해야 하나 싶었다.
“후우….”
깊은 한숨이 속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 도현아!
벌떡!
알 수 없는 직감에 도현은 들고 있던 펜도 내팽개치고 튀어 오르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히 문을 열고 나간 도현이 계단을 거의 구르듯이 내려왔다. 집에서 단 한 번도 뛰어다닌 적이 없었는데, 그 기록이 깨졌단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헉, 허억.”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온 도현과 서혜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혜나는 전화기를 쥐고 있었다.
“뭐, 뭐라고 해요?”
“네가….”
네가 떨어졌다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함께하자고?
아니면….
“네가, 합격했대.”
“세상에.”
감탄사를 내뱉은 도현이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말했다.
“덩어리 님, 맙소사.”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서혜나는 그 이상한 표현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거 같았다.
- Sir, 듣고 계신가요? 다음 오디션이….
“아, 네, 네!”
서혜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도현은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오려는 심장을 느끼며, 며칠 만에 편하게 웃음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