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77)화 (278/582)

제277화. 선택과 집중 (29)

17일 전.

[오디션은 잘 봤어요?]

[맥 버클러 : 긴장한 것치고는 괜찮았어.]

[다행이네요.]

[맥 버클러 : 일단 기다려 보려고.]

[맥 버클러 : 너는 어제 어땠어?]

통화 기록 2건.

14일 전.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 할까요?]

12일 전.

[많이 바쁜가요? 오늘 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와도 돼요. 전 평소처럼 연습실에 있으려고요.]

7일 전.

[편할 때 연락해요.]

도현은 처참한 문자 기록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럴 때마다 진이 부러워졌다. 진이라면 무작정 들이받고 봤을 테니까. 그러나 금방 미련을 버렸다. 애초에 불가능한 걸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속은 타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그랬잖아. 경쟁 관계에서 우정이 흠결 없이 유지될 수는 없다니까?”

옆에서 문자 내역을 훔쳐보던 단사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도현이 힘없이 반박했다.

“우린 다른 배역이었어.”

“넓게 보면 경쟁 관계가 맞지. 결국 둘 다 배우잖아.”

도현은 단사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연락이 끊긴 걸 보니, 대충 결과는 예상이 됐다.

맥은 냉정히 말해서,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강한 편이었다. 도현도 비슷했기에 알 수 있었다. 다만 도현은 실패를 겪고, 극복해 봤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맥한테는 시간이 필요해.’

알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저렇게 말하니 괜히 불안해졌다. 몇 번이나 문자를 다시 써보다가, 결국 뒤로 가기를 눌렀다. 도현은 맥을 믿기로 했다.

“너 의외로 친구한테 집착하는 편이구나.”

“집착….”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도현은 제 행동이 퍽 구질구질해 보였음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부정하는 대신 단사를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보았다.

내가 친구 때문에 미국에 붙어 있는 거 알면 기겁하는 거 아니야?

가능성 있었다. 어차피 말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앞으로도 안 하기로 했다. 그 시선을 무어라 느꼈는지, 단사가 헛소릴 했다.

“나는 붙잡아도 안 돼. 다음 달부터 다른 반 갈 거거든!”

“붙잡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뭐야, 왜 차가워? 너 지금 차별하는 거야?”

단사가 투덜거렸다. 전혀 서럽지 않은 얼굴로 실망이라고 하는 단사에 도현은 웃고 말았다. 단사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방정맞거나 과장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기분을 풀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그의 가상한 모습에 도현의 얼굴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다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를 배우며 가장 많이 교류한 사람은 단사였다. 물론 다른 아이들과도 시답잖은 수다를 떨 정도로 친분이 생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단사가 제일 친근했다.

도현이 잠깐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삼 개월, 아니면 사 개월.”

“뭐가?”

“그만큼만 기다려.”

도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안에 네가 있는 반으로 올라갈게.”

“…와우.”

갈색 피부가 매력적인 소년이 떫은 낯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다 도현이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마누엘! 마누엘!”

“단사! 잠깐만!”

“마누엘! 방금 도현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아, 잠깐 멈추라니까!”

“뭔데?”

두 아이의 소란에 마누엘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도현이 단사의 입을 막는 것보다 단사가 떠드는 게 더 빨랐다.

“삼 개월 안에 P/A 반에 들어가겠대요!”

“오, 그거 진짜니?”

“…잊어주세요.”

도현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될 걸 꼭 마누엘한테 말했어야 했을까. 괜히 허세 부리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라 도현은 상당히 민망해졌다.

그러나 마누엘의 반응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음, 영 가능성 없지는 않아.”

“네?”

도현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가 비웃거나 같이 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마누엘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너 같은 애는 처음 보거든. 그러니까, 머리가 좋아서 몸이 덜 고생하는 타입 말이야.”

“그거 몸치인데 머리로 커버한다는 소리죠?”

단사가 마누엘의 말을 직역해 주었다. 정말 쓸모없는 친절이라 도현이 옅게 웃으며 단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브!”

“마누엘, 정말 가능한 거예요?”

“그럼. 나는 발레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보다 네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니… 좋아. 지금까지 조금 편하게 해줬는데, 내 실수였던 거 같네.”

도현은 앞으로 펼쳐질 지옥을 엿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현이 힘없이 팔을 내렸음에도, 단사는 입을 여는 대신 딱한 것을 보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발레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발레는 절대, 절대, 절대 보이는 것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란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경외한 인간들이 만든 광적인 집착과 변태적 욕구의 끝이라면 모를까.

신체의 모든 부위를 통제한다는 건, 그것도 최대한의 아름다움을 끌어내며 통제한다는 건 말이 쉽지, 전혀 쉽지 않았다. 덕분에 도현이 원했던 신체 통제 훈련은 훌륭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마누엘은 하얗게 질린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최근, 마누엘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다름 아닌 이 작은 소년이었다. 이 소년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게 재능이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점이었다.

분명 몸치였다. 무언가 새로운 진도를 나갈 때면 제대로 따라올 때가 드물었다. 머리로 생각은 하는 거 같은데 몸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보다 보면 과장해서 한 다섯 살 정도의 신체 협응력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번.

딱 한 번 제대로 익히고 나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한번 완벽하게 익힌 자세는 절대로 틀리지 않는 재능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보통은 가르쳐준 다음에도 끊임없이 팔의 각도나 허리, 발목, 손끝 등등… 모든 부분에 끊임없이 수정이 들어가야 했다. 몇백, 몇천 번의 반복 끝에 머리로 의식하지 않아도 완벽한 자세가 나오도록.

근데 도현은 그걸 머리로 다 기억해서 해냈다. 그러니 흥미롭지 않을 리가.

도현은 저를 보고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빛내는 마누엘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체념하며 말했다.

“다음 달부터 그렇게 해주세요. 이번 달에는 체력이 너무 부족하면 안 돼서요.”

“왜?”

“얘 오디션 본대요.”

“오디션?”

도현을 돌아보는 얼굴에는 ‘왜 말 안 했냐’라는 말이 선명하게 떠올라,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발레 오디션은 아니에요.”

“그건 나도 알고 있단다.”

가볍게 대답한 마누엘이 말했다.

“그래도 오디션 팁은 줄 수 있지. 그런 건 본질적으로는 다 똑같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발레나 연기나… 동일하고 말이야.”

“오디션 많이 보셨나 봐요?”

“내 인생이나 다름없지?”

발레단에 들어가기까지 끊임없는 대회와 오디션의 연속이었고, 발레단에 들어간 후에도 역할을 따내기 위해 또다시 오디션, 승급하기 위해 오디션, 오디션, 오디션….

말하기도 입 아팠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흥미가 생긴 도현이 집중했다. 단사도 마찬가지였다. 제게 집중하는 두 제자를 보던 마누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면, 다 잊어. 기억해야 할 건 하나야.”

“…뭔데요?”

“진짜 제대로 미쳐야 해.”

“엥.”

뭔가 사실적인 팁을 기대했던 단사가 힘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마누엘이 이어 말했다.

“평범하게? 준비한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아니. 무대는 언제나 네가 할 수 있는 거 이상을 보여주는 곳이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거면, 좋아. 그래도 돼. 대신 취미로 즐겨.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새겨둬. 무대에 선다는 건 언제나 그 이상을 보여준다는 거야.”

도현은 그 말이 발레리노라는 그의 직업에 영향을 받았단 생각이 들었다. 발레는 항상 인간의 신체가 보여줄 수 있는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쥐어 짜내는 예술이니까.

“정말 제대로 미친다면, 무대 위에서 너를 주저하게 하고 망설이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긴장, 불안, 강력한 경쟁자, 너를 평가하는 사람들… 다 핑계야. 진짜 미치면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서 네가 얼마나 미쳤는지 보여줘. 어떻게든 너만 보게 만드는 거야.”

수석 발레리노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은… 솔직히 멋있었다. 도현은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의 진중한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아까보다 의욕이 더 샘솟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단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누엘을 보고 있었는데, 도현은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 같았다.

“마누엘은 제가 만난 성인 남성 중에서 세 번째로 멋진 사람이에요.”

“세 번째? 그거 영광인걸.”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헛소리에도 마누엘은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참고로 첫 번째는 고정불변이었고, 두 번째는 에드워드였고, 세 번째가 마누엘이었다. 비교 대상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와 할리우드에서 제일 몸값이 비싼 배우란 걸 알았더라면 진심으로 감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마누엘은 그 윗순위를 묻는 대신 본론으로 돌아갔다.

“도현, 알겠지? 뭐라고?”

“제대로 미치라고요.”

“그래! 그거야.”

탁, 탁!

자신의 가르침을 흡수한 제자를 흐뭇하게 보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도현의 까만 눈동자가 조용하게 타올랐다.

“워후.”

단사가 짧게 감탄하며 도현의 옆에서 한 발짝 떨어진 후, 마누엘을 올려다보았다. ‘대충 애가 좀 맛이 간 거 같은데 어떡해요?’라는 눈빛에 마누엘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게 ‘너도 곧 저렇게 될 거야.’라는 뜻이란 걸 깨닫게 된 건, 몇 개월 후의 이야기였다.

* * *

맥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도 늘 그렇듯, 시간은 흘렀다.

도현이 방 안에 있는 아이들의 수를 세보았다. 대략 여섯 명….

공기 중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몇천 대 일을 뚫고 올라온 최종 인선이라는 걸. 한 명 한 명, 어설퍼 보이는 아이가 없었으니까.

누군가 방 안의 광경을 보았다면 깜짝 놀랄 만큼, 잘생기고 매력적인 소년들이었다. 이 중 아무나 골라서 바로 앞의 거리에 나가 걷게 한다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 ‘얘야, 너는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단다!’라고 하며 탄생의 비밀을 알려줄 게 분명했다.

실제로 몇 명은 도현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한 명은 유명 모델, 두 명은 꽤 흥행한 영화에 나온 적 있는 배우. 반대로, 아이들도 도현을 알아본 거 같았다.

‘쟤가 여기 왜 있어?’ 하는 요상한 표정을 읽은 도현은 태연히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백인이란 사실을 확인했지만, 딱히 기죽거나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나만 보게 만들 거니까.’

스승의 가르침은 잊지 않는 훌륭한 제자인 도현이었다.

잠시 후.

“여덟 명 모두 다 같이 들어갈 거예요. 몇 번 해봤으니까 알죠? 여기, 첫 번째부터 차례대로 서세요. 혹시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지금이라도 손 들고요.”

손을 드는 아이는 없었다.

르옌의 외적인 특징 때문에 일곱 명의 아이들은 잘생겼다는 공통점 외에도 성숙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는데, 긴장한 탓에 입을 다물고 표정까지 사라지니 더욱 돋보였다. 그 면면을 둘러보던 남자가 말했다.

“그럼 첫 번째부터 들어갈게요.”

가장 앞에 선 아이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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