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79)화 (280/582)

제279화. 선택과 집중 (31)

“혹시 자유연기도 준비해 왔니?”

다들 무시무시한 경쟁자를 뚫고 올라온 아이들 뿐이라, 오디션 분위기는 엄격하고 사무적이라기보단 부드러웠다. 이들 중에 같이 일할 배우가 나오는 것이니 제작진 입장에서는 호의를 가지고 잘 대해주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각 지원자의 연기가 끝날 때마다 심사 위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속내가 어떻든, 겉보기에는 꽤 화기애애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별다른 코멘트도 달지 않은 상태에서 토드가 저렇게 물어왔다. 그의 표정은 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했기에, 그게 긍정의 신호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헷갈렸다.

도현이 드물게 긴장하며 숨을 삼키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

그런 도현을 토드가 주시해서 보았다.

‘자신이 없는 건가?’

지정 연기를 보일 때까지만 해도 미동 없던 얼굴에 동요가 생겨났다. 준비를 안 한 걸까, 했는데 미흡한 걸까.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부분이라 생각하는데 질문이 날아 들어왔다.

“한 가지만 확인받고 싶은데요, 자유연기는 제한 시간이 없는 거 맞죠?”

“물론. 시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대답한 사람은 데이먼이었다. 도현이 고맙다는 뜻으로 데이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저, 의자도 옮겨도 될까요?”

“의자를?”

한 가지만이라고 해놓고 한 가지를 더 얹은 도현이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뭐 하려고? 아니다. 문제 될 거야 없지. 마음대로 해.”

데이먼은 금방 말을 정정하고 허락해 주었다. 어차피 곧 볼 텐데, 미리 들어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번쩍.

꽤 씩씩하게 의자를 든 도현이 정 중앙에 제 의자를 내려놓았다. 옮기는 게 힘들까 봐 도와주려고 오던 직원이 머쓱해하며 되돌아갔다.

음, 위치는 적당하네.

주변과 거리를 가늠하며 의자가 잘 있는 것을 본 도현이 심사 위원석을 쳐다보았다.

“언제 시작하면 될까요?”

“네가 편할 때.”

토드가 툭 던진 대답에 대답 대신 웃은 도현이 심호흡했다.

준비는 열심히 했다. 하는 내내 이게 맞는 걸까 싶어 흔들리긴 했어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여기는 무대니까.

도현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소년은 미동 없이 있었고 주위는 적막했다. 토드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연기를 선택해 왔을까. 흔히 선택하는 눈물이나 분노 연기? 아니면 작중 장면? 이런저런 예측을 꺼내보았다.

마침내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첫 대사가 흘러나왔다.

토드의 생각이 강제로 멈춰졌다.

* * *

“당신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담담하게 뱉어진 말.

마침내 고개를 든 소년의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사실 그대로를 전한다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는 그 내용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당신이 누구고, 그가 무어라 말한 건지 자연스레 의문이 떠오르던 순간.

소년이 다시금 독백했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마리아였다. 그녀는 얼굴에 표정조차 지운 채 소년을 태워버릴 듯이 응시했다.

원작자의 이런 반응은 단순히 두 문장만으로 환한 오디션장을 제 색으로 덧칠한 탓이 아니었다. 지금 저 대사가 나타내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텅 비었던 얼굴에 표정과 감정이 차오른다. 수채화 물감이 퍼지듯이 물드는 그 장면은, 전시되어 있던 인형이 첫 숨을 토해내는 거 같았다. 한순간에 생동감이 생겼다.

“아, 나는 그 말을 누구보다 잘 지켰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느슨해진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은 소년이 느긋하게 일어나 발을 내디뎠다.

뚜벅, 뚜벅.

그의 발소리만이 회장 안을 울린다. 무대 중앙에서 홀로 여유롭게 걷는 소년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는 그 모든 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땅.”

자연스럽게 멈춰 선 소년의 시선이 심사 위원을 향하고.

“나의 일족.”

미끄러지듯 지나쳐 뒤편에 앉은 아이들에게 닿았다가.

“일족 너머의 존재들까지.”

이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정면을 보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다.

“당신의 말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했습니다.”

오싹.

토드 감독의 입매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르옌 누바라’였다.지금 저 소년이 연기하고 있는 건, ‘르옌 누바라’였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오로지 소년의 해석과 창작에 기반한 ‘르옌 누바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손길은 짓밟고, 탐욕에는 더한 탐욕을, 충성스러운 개들에겐 오로지 순종과 복종의 미덕을 새겨 넣고.”

적막했던 표정 속에서 피어오른 건, 탐욕이었다. 모순적이다. 그렇게 질척한 감정을 내비치면서 얼굴엔 어린 생기가 돌다니.

“누구도 넘보지 못할 명예와 영광을 이 손에….”

어느새 의자가 있던 자리까지 돌아온 소년이 제 한쪽 손을 바라보고 있다. 황금을 탐내 죽음에 도달할 때까지 바다를 헤매는 해적처럼, 갈증이 난 눈을 한 소년이 손을 오므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야욕에 찬 얼굴이 흐트러졌다. 미간과 눈매, 뺨, 입술까지, 섬세하게 움직이자 인상이 단숨에 바뀌었다. 갑작스레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는 소년에 분위기가 다시 한번 반전된다. 소년이 지친 듯 의자에 도로 앉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혼란스러워집니다.”

조금 전까지 선명한 눈빛을 하던 소년이 정말 혼란스러운 것처럼 심사 위원석을 응시했다. 이 공간에 있는 이들은 도무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분위기 변환이 자유자재야.’

심사 위원을 비롯해서 이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가히 경악할 만한 재능이었다.

“시험은 순조롭습니다. 제 혼란은 전혀 다른 것에서 기인합니다. 제가 피곤한 걸까요? 자꾸만 저는 알지 못하는 이들이 꿈에 나옵니다.”

소년의 눈이 몽롱해진다. 불안은 사라지고, 냉막한 얼굴에 떠오를 수 있을 거라 여기지 못했던, 아주 행복한 꿈을 꾸는 아이처럼 묘하게 천진한 모습이다.

“그들이 제게 말을 겁니다. 말도 안 되지만, 애정 어린 목소리로… 르옌, 하며.”

깜빡.

세 번.

눈을 세 번 깜빡이는 사이, 검은 눈동자에 가득 차올랐던 몽롱함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자못 불쾌함이 어린다. 그러나 애써 다문 입매는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누군가 제게 저주를 건 걸까요? 저는 당신에 대한 의심까지 피어오릅니다. 아, 아닙니다. 잊어주세요. 저는 제가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이 늘 말씀하셨으니까요.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라고.”

소년이 토드를 똑바로 직시했다. 어쩌면 마리아였는지도 몰랐다. 소년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 검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거 같은 착각을 안겨주었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라고.”

능숙하게 혼란을 숨기며 다시금 처음 보았던, 단단하고 흠결 없는 낯으로 되돌아온다. 매끄러운 얼굴은 도자기로 빚은 것처럼 인간미가 없이 느껴진다.

극 사이에 주어지는 휴식 시간처럼 잠깐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토드는 알았다.

진정한 폭풍은 지금부터라는 걸. 그는 어떠한 예감을 느끼며 집중을 풀지 않았다.

그의 생각처럼 유리 같았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서성인다. 몸에 밴 습관을 잊지 않은 발걸음은 빠르지 않지만, 초조함이 묻어 나온다.

“오늘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신성한 나무 내부로 외부인이 들어왔다고요. 어쩐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심사 위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치 하나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연기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적당한 무대도, 배경도 없는데 그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이곳을 부족함 없이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연기에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심사 위원뿐만 아니라 진행을 돕던 직원들과 지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소년이 보여주는 이야기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부정하려고 해도 확신만 더해갑니다. 나는 정령의 시험보다 더 어려운 시험에 빠진 기분입니다.”

언뜻 단단한 얼음 같아 보였던 소년의 얼굴에서 떨림이 일었다. 기댈 곳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짙은 불안이 드리운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한 줄기 희망.

“일족을 위해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소년이 탄식한다.

“당신은, 나는. 아, 나는 대체….”

절망하는 자의 연기.

소리를 지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놓지 못한 마지막 미련 때문. 물기 하나 없는 슬픔은 메말랐기에 더욱 처절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 소년이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털썩, 주저앉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그러모았다.

소년의 전신에서 풍기는 혼란.

불안과 희망.

불신과 미련.

애처롭게 떨던 소년이 어느 순간 정지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들여다보는 모습에 토드는 깨달았다.

‘호수를 보는 거야.’

스마고그의 호수.

작중에 정령이 길잡이들에게 내린 시험 중 하나로, 호수는 몸을 담근 이들에게 그들의 과거를 보여준다. 잊었던 것, 잊고 싶었던 것,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 모든 것을.

그곳에서 누군가는 추악함을, 누군가는 기쁨을, 누군가는 미련을, 누군가는 슬픔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진실을 깨닫는다.

산산조각이 난 희망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는 것처럼 소년이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전부 아니야.”

광기.

“그럴 리 없어, 아니라고!”

핏줄이 돋은 눈으로 소년이 악다구니를 지른다. 목에는 핏대가 세워져 있다. 그건 광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단순한 광기라고 치부하기엔.

슬프다. 애끓듯 원망스럽고 절절한 감정이 흘러넘친다. 분노와 절망 깊은 곳, 가장 어둡고 지저분한 밑바닥에는,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존재가 있었다.

푹.

소년의 고개가 꺾인다.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은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공허하다.

“…나는.”

처음 의자에 앉아 있었을 때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토드는, 전신을 타고 오르는 전율에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처음과 같이 담담한 음성.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대사.

완벽한 극의 종결이었다.

* * *

끝났다.

도현은 아주 긴 꿈에 빠졌다가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체감상 오랜 시간이 지난 거 같았는데, 실제론 별로 안 지났는지 여전히 심사 위원들은 침묵한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도현이 손을 말아 쥐었다.

처음 자유연기를 준비하고자 했을 때, 르옌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골라서 연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연습해도 부족하단 기분이 들었다.

이게 아니야.

무언갈 놓치고 있는 감각.

사막의 신기루처럼 닿을 듯 멀어지는 오아시스를 찾아 도현은 끊임없이 헤맸다. 부족해. 부족한데, 대체 무엇이?

카메라에 담긴 자신의 영상을 볼 때마다 속이 답답해졌다. 장면을 잘못 고른 걸까 싶어 그 전의 장면, 그 전의 장면… 선별한 장면들을 연기하고, 그걸 찍어 확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마음으로 찍은 것들을 순서대로 확인하다가, 도현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거 같은 감각을 받았다.

‘서사였어.’

하나의 프레임처럼 끊긴 순간은 그 순간의 감정은 보여줄 수 있을지언정, 한 명의 인물을 이해시키기엔 부족했다. 아무리 도현이 르옌을 섬세하게 분석했어도, 아무런 서사 없는 순간적인 감정의 포착은 그 어떤 공감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도현이 원하는 건 그가 얼마나 분노를 잘 표현하는지, 얼마나 서럽게 울 수 있는지 증명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르옌을 보여주고 싶은 거였다.

그래서 도현은 색다른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르옌을 주인공으로, 직접 각색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오롯이 르옌의 독백으로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맥은 미쳤다고 했고, 오스카는 불안해하긴 했지만, 도현을 말리지는 않았다. 결국 직접적인 결정을 내린 건 도현이었다. 거기엔 마누엘의 영향이 좀 있었다.

그의 말처럼 제대로 미쳐봐야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와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수고했어요.”

토드가 말문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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