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선택과 집중 (32)
“…….”
톡, 토독.
침묵으로 물든 공간에 누군가 초조하게 손톱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엇박자로 울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에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다들 비슷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리를 떨거나 엇박자로 의자를 두드려대는 대신 입가를 문질러댔다. 그 나름의 초조함의 표출이었다.
후회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사람이란 꽤 가벼운 존재라서, 몇 분 전까지는 만족감을 느끼다가도 뒤돌아서면 아쉬움이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들었다.
‘좀 더 미쳤어야 했어.’
뒤늦은 후회가 꼴불견인 걸 알아도 머릿속을 점령하는 상념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도현은 니콜라스의 말을 빌려, 눅눅한 도리토스나 틈만 나면 축 처지는 화초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 얻은 삶과 희생에 감사하며 어디 종교에 귀의했겠지.
자꾸 생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새로운 도전에 지레 겁을 먹어 주춤거리고 만 자신이란 거였다.
음.
시무룩한 낯짝을 숨기지 못한 도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기운 잃은 머리카락도 흐느적댔다.
‘그래도 어쩌겠어.’
후회는 후회고,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다. 다음부터는 좀 더 제대로 미쳐 살자는 반성을 하며 도현이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 문득 잼잼이들이 생각나 표정이 묘해졌다.
그분들은 아직도 날 좋아할까.
면식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그의 영화 속 배역도 아니고 그 자체를 좋아하고 열광한다는 건, 남의 일이면 대수롭지 않을 텐데 하필 내 일이라 자꾸만 신경 쓰였다. 내 어디를?
그의 단편 위에 환상을 덧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그렇게 열광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니까. 그리 생각하니 불편감도 들었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애정을 보낸들 제대로 알 수도, 돌려줄 수도 없는데. 도현이 물끄러미 제 손을 바라보았다.
만약 합격 소식이 나간다면 굉장히 좋아하겠지?
툭 튀어나온 생각에 입매가 어색하게 다물렸다. 도현은 다시금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수도자가 평생을 걸쳐 이룩하는 경지에 고작 십 년 산 그가 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 해?”
조용한 공간에서 소리가 들리니 무심코 그 방향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안녕.”
오디션을 볼 때도 유달리 낮다고 느꼈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처음 제대로 마주한 눈동자는 형광등 아래에서 암녹색 빛을 띠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미묘한 빛깔이었다.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오디션에서도 유독 눈에 띄던 지원자, 윈저 프란시스였다. 그가 왜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없어 뜸을 들이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안녕.”
그가 뭐라고 했더라.
“별생각 아니었어.”
간신히 질문을 기억해낸 도현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대답하고 나서야 윈저가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으니, 의식의 흐름에 따른 감정 변화를 일등석에서 관람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심각해 보이길래.”
“안 심각할 것도 없지. 오디션 중이잖아.”
“아하.”
휙 눈썹을 휜 윈저가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듣던 대로다, 너.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네.”
“뭐?”
초면인 상대에게서 나오기에는 퍽 거리감이 없고 무례한 발언에 도현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 반응에도 시큰둥한 윈저가 툭, 말했다.
“뭐 그런 걱정을 해. 어차피 너나 나 둘 중에 한 명이 될 텐데.”
도현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불쾌하단 시선으로 윈저를 보고 있었다. 긴 모델 경력이 쌓아준 건 두꺼운 낯짝인지, 윈저는 그 시선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윈저는 도현의 물음이 뭐가 우스운지 살짝 웃기까지 했다.
사석에서의 윈저는 오디션 때 보았던 묵직하고 냉담한 분위기와 비슷한 듯 달랐다. 냉소적으로 보이긴 하는데, 또래 아이들이 으레 가지는 가벼움도 느껴졌다.
윈저의 발언이 당혹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그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심사 위원들의 관심이 그와 자신에게 모조리 쏠렸으니까. 냉정히 보자면, 저 아이들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에 더 불쾌해하는 거였다.
경쟁이란 게 원래 그런 거지만, 어린애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진 도현은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자 주제를 돌렸다.
“아까 그 말은 뭐야? 듣던 대로라고 한 거.”
“아아아, 그거.”
도현은 윈저가 웃음을 참는다고 느꼈다.
“내 친구가 네 얘기를 좀 했거든. 무슨 얘기였는지는 관심 가지지 않는 걸 추천할게. 걔가 워낙 성격이 더러워서.”
어쩐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도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다섯 살 때부터 모델로 활동한 윈저와 친분이 있을 만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모델로 데뷔한 한 명뿐이라 그랬다. 절대 마지막 문장 탓이 아니었다.
“루카 하퍼?”
“오, 맞아. 역시 성격 안 좋지?”
“그거 때문에 안 건 아니야.”
“아무렴, 그렇겠지.”
도현은 무어라 사족을 붙이려다가 너무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애써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그보다 하퍼는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런 눈빛이 나오는 걸까. 도현은 알고 싶기도 하고 영영 모르고 싶기도 했다.
“오늘 널 보자마자 누군지 알았어. 사실 그때도 너한테 말을 걸고 싶었어. 네가 명상에 빠져 있길래 말았지만. 원래 동양에서 온 애들은 너처럼 명상을 자주 해?”
“나는 내내 미국에서 살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싫어할걸.”
“그래? 너도 싫었다면 유감이야. 그런 의도는 없었고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은 거니까 오해하진 마.”
윈저는 적당히 구색을 맞출 뿐, 제 발언을 딱히 반성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가 악의적인 인종 차별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정말로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거나, 알아도 귀찮아서 신경 쓰지 않는 거였다. 절대다수까진 아니어도 대부분의 미국인이 이랬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디션장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도현은 짚고 넘어가는 대신 물었다.
“나랑 왜?”
“왜, 너랑 사이좋게 지내면 루카가 싫어할 거 아니야. 나는 걔가 기분 나쁘면 기분이 좋거든.”
슬금.
도현이 의자에 바짝 기대어 앉았다. 그러니까 맞은편에 있는 윈저에게서 조금 더 떨어졌단 소리였다. 차가운 얼굴로 비죽, 웃고 있는 걸 보니 약간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어릴 때부터 연예계에서 일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걸까. 진지하게 가설을 세우던 도현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배우로 일했지만, 순수하던 아람이 생각나 두 사람이 남다른 거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 덜컥,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토드 감독이었다. 단숨에 이목이 쏠리고, 그의 시선이 도현과 윈저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들 고생했어. 지금부터 호명하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도 돼. 도현 리, 윈저 프란시스. 두 사람은 나를 따라와. 나머지는 정말 수고했고, 집에 조심히 들어가렴.”
아이들이 기대를 품을 틈도 안 주고 단호히 말을 뱉은 토드 감독이었다. 대기실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봤지?
윈저가 입 모양으로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했다는 듯이 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지, 얼굴에 숨기지 못한 기쁨이 들어찼다.
두 사람이 안내된 곳은 또 다른 대기실이었다. 아까 있던 대기실과 다른 점이라면, 좀 더 아늑하고, 소파가 예쁜 노란색이라는 것 정도일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심심하면 놀아도 되고, 저기 있는 과자는 마음대로 먹어.”
“저희는 무엇을 기다리는 거죠?”
아까 보았던 가벼움이 싹 사라진, 오디션에서의 윈저 프란시스였다. 그러니까 성숙하고, 무심하고, 약간은 우직해 보이는 모습 말이다. 도현은 이미지 관리를 하는 윈저를 조금 아연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일단 마지막 후보에 뽑힌 걸 축하해. 너희는 아서와 브닌나 역할의 배우와 함께 카메라 테스트를 해볼 거야. 그 후엔 돌아가도 돼.”
“아서와 브닌나는 이미 확정된 건가요?”
이번에 물은 건 도현이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는지, 토드 감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두 역할을 르옌보다 먼저 뽑았거든. 더 물어볼 거 있니?”
“돌아가도 된다는 건, 오늘 바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래. 너희가 워낙 뛰어나서 오늘 결정하긴 힘들거든.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
두 사람이 대기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심사 위원들은 머리를 싸매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아무리 토론을 벌여봐도 도돌이표였다. 결국, 그들은 분위기가 과열되었음을 인정하고 일단 주연을 모아 카메라 테스트를 진행한 후, 한숨 자고 일어나 다음 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괜히 인간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수면으로 낭비하는 게 아니었다. 원래 자고 일어난 후에 보면 복잡하던 것도 맑게 개이고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법이었다.
“더 궁금한 건 없지? 이거, 카메라 테스트에 사용할 장면이야. 다 외우진 않아도 되는데, 가능한 한 외워두도록 해. 삼십 분 정도 시간 있을 거야.”
그게 결국 외우란 소리 아닌가. 아마 놀아도 된다는 말은 빈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토드 감독은 두 사람을 놔두고 방에서 나갔다. 그렇다고 두 사람만 방에 있는 건 아니었다. 무슨 역할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직원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바로 외워?”
윈저가 미간을 좁혔다. 찌푸린 표정에도 아름다운 미형의 얼굴은 색다르게 잘생겨질 뿐이었다. 심각하게 대본을 읽던 그의 얼굴은 얼마 안 있어 화색을 띠었다.
토드 감독이 준 대본은 대본 리딩에서 한번 사용되었던 장면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브닌나의 대사가 좀 추가되긴 했어도 전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윈저가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난 또, 생으로 외우라는 줄 알고 놀랐네. 너도 그랬지?”
새로운 장면이라도 오 분 정도면 완벽하게 외울 자신이 있는 도현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삼십 분은 거의 윈저가 말을 걸고 도현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윈저는 놀랍게도 소꿉친구-그의 말에 따르면 루카와 윈저는 단순히 친분이 있는 정도를 넘어 그의 모델 데뷔 때부터 알아온, 오랜 친구 사이였다-에게 엿을 줄 수 있다면 삼십 분 동안 처음 보는 경쟁자에게 치댈 수 있는 아이였다.
그걸 의지가 대단하다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성격이 삐뚤어진 건지 도현은 헷갈렸다.
차가운 얼굴로 질척거리는 그의 적응 안 되는 태도는 토드가 그를 데리러 오면서 강제로 멈추게 되었다. 윈저는 다음에 보면 인사하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게 꼭 다음에 볼 일이 있을 거란 투라 실시간으로 그와 르옌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도현은 떨떠름해졌다.
그 이후론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언뜻 창문을 내다보니, 슬슬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곳에 거의 하루 내내 있었던 거 같은데 아동 근로법 위반은 아닌가, 오디션이니 근로는 아닌 건가, 하는 헛생각이 들었다.
“거기 쿠키라도 먹어. 혹시 쿠키 싫어하니?”
멍하니 창밖을 보는 도현이 어지간히 심심해 보였는지, 같이 있던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도현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자꾸만 간식거리를 주는 통에 입 안이 이미 너무 달았다.
다행히 그 시간은 그리 길어지지 않았다. 도현이 다시 눈을 감고 배역에 몰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드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토드를 따라간 곳에는 오디션장에서 보았던 심사 위원 중 몇몇이 있었다. 그중 데이먼과 눈이 마주쳐 깜빡이는 것으로 인사한 도현은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도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
도현보다 더 놀란 상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눈을 마주했다가, 방 안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다시금 그를 마주 보았을 땐, 평소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상태였다.
도현은 받아들였다.
“오랜만이네.”
맥이 탈락했던 오디션에서 배역을 거머쥔 사람은.
“헤레이즈.”
헤레이즈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