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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81)화 (282/582)

제281화. 선택과 집중 (33)

“너,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청회색 눈동자에 황당함이 들어찼다. 을 찍을 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에서 굽슬거렸다. 그 모습이 꼭 성경 속 천사나, 활과 화살을 메고 다니는 소년 형상의 신을 연상케 했다.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사실과 별개로 치렁치렁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그의 취향일 리는 없으니, 배역 때문에 손질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나도 여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어.”

헤레이즈의 얼굴이 떫어졌다. 대충 ‘몰랐던 거 맞아?’ 하는 느낌이었다. 도현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녀가 웃음소리를 내었다. 청량하리만치 맑은 목소리가 울리자 귀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너희 둘, 친한가 보구나?”

소녀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시냇물 같은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처음 시야에 들어왔을 때부터 말갛다고 느꼈던 얼굴은 목소리가 얹어지자 투명하게까지 느껴졌다.

“안녕. 난 신시아 엘더야. 브닌나 역할이고. 신시아, 엘더, 브닌나. 아무렇게나 불러.”

브닌나가 속한 노아족은 전통적인 판타지에 대입해 보자면 숲의 종족, 엘프와 비슷했다. 작중에서 노아족은 새처럼 지저귀는 목소리로 숲과 소통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도현이 신시아와 브닌나의 놀라운 싱크로율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사이, 몇 달 만에 얼굴을 마주한 과거의 동료 배우와 친구 취급을 받은 헤레이즈가 브닌나의 말을 부정했다.

“별로 친하진 않아.”

“으응.”

신시아가 별다른 말 없이 싱긋 웃었다. 헤레이즈는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신시아는 무의식중에 도현의 옆에 자연스레 붙어 선 헤레이즈를 보고 있었다.

그런 세 아이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으니.

데이먼은 흐뭇함을 숨기지 못하고 비죽비죽 웃었다. 퀭한 낯으로 웃음을 삼키는 괴상한 모습에 토드는 ‘저 사람이 또…’ 하며 가볍게 무시했다.

데이먼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붙여놓으니 생각보다 더 조합이 괜찮아서였다.

특히 헤레이즈와 도현.

헤레이즈가 부드럽고 화사한 빛의 색만을 사용해 그린 인상파 화가의 작품 같았다면, 도현은 선명하고 깨끗한 선으로 표현한 중세 귀족의 초상화 같다. 헤레이즈가 아스라이 번지는 봄날의 햇살 같다면, 도현은 흰 눈이 내려앉은 고요한 호숫가 같았다. 아서의 상징은 태양, 르옌은 달이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운명적인 우연까지. 헤레이즈와 도현이 이미 같은 작품에 참여해본 사이라니, 마치 온 우주의 힘이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나.

우정, 운명.

아주 아름다운 단어들이었다.

데이먼이 감동의 물결을 헤엄치는 사이.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그냥, 뭐. 학교 다녔지.”

두 아이는 퍽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헤레이즈와 도현은 같이 있을 때 불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킬킬거리며 수다를 떠는 사이도 아니었다.

“너 근데 전학 예정은 없어?”

“갑자기 전학은 왜?”

“아니다.”

뜬금없는 화제에 되묻자 신 레몬을 삼킨 것처럼 입매를 일그러트린 헤레이즈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 그의 오묘한 눈빛이 도현에게 향했다.

“그나저나 너 어떻게 한 거야?”

“뭐를?”

“아까 온 애랑 너랑 인종 자체가 다르잖아. 나랑 엘더 쟤도 백인이고.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야?”

“? 그냥 오디션 봤어.”

“…….”

두 눈에 불신이 떡하니 박혀 있다. 오랜만에 봐도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검은 눈동자를 보던 그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 * *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두 소년이 서로에게 신경 쓰느라 조용히 잊힌 한 사람이 있었다.

‘친한 거 맞네!’

신시아였다.

바로 옆에 서 있음에도 잊힌 신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보단 대화의 흐름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헤레이즈는 부끄러움이 많구나.’

신시아는 새로 알게 된 동료 배우의 정보를 머릿속 수첩에 적어두었다. 이번에 신시아의 눈은 새로운 후보에게로 향했다. 얼굴을 그리는 군더더기 없는 선과 흰 피부, 무엇보다 너무 어두워서 오묘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

신시아의 눈이 조금 몽롱해졌다.

‘진짜 르옌 같아.’

신시아 엘더는 을 처음 읽은 순간부터, 자신과 브닌나 사이의 강력한 연결 고리를 느꼈다.

저건 나야. 꿈꾸듯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브닌나의 행동, 생각, 사고. 모든 것이 신시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건 아주 멋진 감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헤레이즈는 신시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시아는 기대를 품었다. 르옌 역할의 아이는 나와 같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만난 윈저 프란시스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잘생긴, 근사한 소년이었지만, 신시아와 같은 것 같진 않았다. 그 암녹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신시아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현을 만났다.

헤레이즈와 대화를 나누는 도현을 빤히 보던 신시아는 활짝 웃었다. 무의식중에 옆을 돌아본 소년이 만개한 꽃처럼 싱그럽게 웃는 소녀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엘더?”

그저 보는 순간 알았다.

신시아가 브닌나이듯이, 소년은 르옌이라고.

* * *

도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오랜만에 만난 헤레이즈가 반가운 나머지, 신시아의 존재를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아침부터 내내 오디션을 본 거야? 힘들겠다.”

다행히 신시아는 풍기는 분위기처럼 성격도 맑은 건지, 내내 도현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다. 그녀의 호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어 조금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괜찮아. 대기 시간에 많이 쉬었거든.”

“쉬었다고? 네가?”

헤레이즈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저 연기에 미친 놈이 대기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낼 리 없다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일단 눈을 감고 있었던 건 사실이라 도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오디션을 보러 오면서 무언갈 준비했니?”

“준비하다니?”

“나는 엄마 아빠가 하는 꽃집에서 키우는 꽃 중에서 시들고 여린 것들만 머리카락에 꽂았어. 아이데는 에로스 같은 머리카락을 하고 왔고.”

“에로스 아니라니까.”

“그럼 큐피드.”

도현이 입술을 악물었다. 아무래도 헤레이즈를 보고 어린 신을 떠올린 건 그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준비는 해 오지 않았어.”

“그래? 아쉽다. 있으면 구경하고 싶었는데.”

“왜 안 한 거야? 너 저번에는 지저분하게 머리 길러서 왔잖아. 내가 그거 보고…. 음, 아니다. 됐어. 그런 건 안 할 수도 있는 거지.”

“나를 참고한 거였어?”

뒤늦게 말을 바꿔봤지만 이미 들은 후였다. 도현은 아까부터 참던 웃음을 결국 터트리고 말았다. 헤레이즈가 짜증스러운 투로 작작 웃으라고 말했다.

“역시 친하네~”

신시아의 나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뿐히 내려앉자, 헤레이즈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도현은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생각했다. 헤레이즈는 신시아랑 상성이 조금 나쁜 거 같다고.

* * *

지쳤다.

오디션을 보고 집에 들어오면 결과가 나오기까지 떨려서 잠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잠이 안 오긴 무슨,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하루 내내 긴장하고 있던 것의 여파인가. 엄마가 옆에서 무어라 말을 걸어왔는데 제대로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눈 감았다 뜨니 아침이었다.

그것도 태양이 한가운에 뜬 정오.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난 도현은 아연한 낯으로 창문으로 보이는 쨍쨍한 한낮의 하늘을 보았다. 뭘까. 저녁부터 아침까지의 기억이 누가 도려낸 듯 삭제된 수준이다.

생각보다 더 체력적으로 지쳤던 게 틀림없었다. 도현은 발레를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것마저도 안 했으면, 오디션 중에 체력 고갈로 꾸벅꾸벅 졸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학교 가는 날 아니었던가?

도현의 얼굴이 다시금 아연해졌다.

* * *

그 시각.

푹 자고 매끄러운 얼굴이 되어 모인 제작진들은 커다란 화면에 영상을 틀어놓고 있었다.

“후우.”

그때, 별안간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제작진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올려 묶은 마리아가 입술을 열었다.

“나는 이 무의미한 일을 점심 먹기 전에 끝낼 수 있을지가 제일 궁금해요.”

“작가님.”

“나는 그 애가 오디션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어떠한 마법적인 운명을 직감했고, 이내 그 아이는 제게 확신을 주었어요.”

기획팀장의 얼굴은 참담하다 못해 푸르죽죽해져 있었다. 투자자 측에 까이는 건 그이니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좀 더 고민을….”

“오, 밀러 씨.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아요. 왜냐면 난 이게 최선의 선택이 되리란 걸 알기 때문이죠.”

“그건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마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정에 두려움이 들지도, 의심이 들지도 않았다. 단순히 직감에 매달린 일이 아니었다.

“밀러 씨. 저는 이제 도현이 아닌 르옌은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요. 이미 내 안에서 그는 르옌이에요.”

단호한 말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투자사 측에서 반대하거나, 자칫하면 영화가 무산될 수도….”

“이런, 진심이에요?”

마리아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기획팀장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리아의 는 21세기에 들어 판타지 장르의 소설 중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하게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소설. 가는 길이 험난할 수는 있더라도 쉬이 무산될 일은 없었다.

“다들 의견이 한쪽으로 기운 거 같은데요.”

말을 한 건 토드 감독이었다. 그가 화면 속의 소년을 보았다. 어제 느꼈던 전율과 소름은 아직도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때론 연기력이나 해석보다 배우 그 자체가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서 어제 보았던 광경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리아의 말이 맞았다.

더는 이도현이 아닌 르옌은 그려지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소년이 그렇게 만들었다. 거의 낙인처럼 뇌 속에 강제로 도장이 찍힌 기분이라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사실, 윈저를 마지막까지 남긴 것은 거의 마지막 미련이자 발악에 가까웠다. 세 아이의 조합이 좋지 못하면 그것을 이유 삼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과를 낼 수 있으니.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헤레이즈, 신시아, 도현.

세 사람은 아닌 듯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셋의 개성이 하나도 겹치지 않아서 더욱 독보적이었다.

토드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저 또한 작가님과 의견이 같습니다.”

“맙소사.”

“이 결정은 분명히 주목받을 겁니다. 누군가는 비난하고 누군가는 우리의 실패를 점치겠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린 가장 먼저 첫발을 딛는 거예요. 성공만 한다면 우리의 도전은 새로운 바람의 시작 정도로 여겨지겠죠.”

그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법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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