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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86)화 (287/582)

제286화. 일상의 균형 (5)

“나르샤!”

“안녕.”

흰색의 자동차에서 내린 나르샤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손을 흔들었다. 최근 태닝을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피부 색이 어두워진 게 확실히 느껴졌다.

햇빛 아래 서 있는 나르샤는 ‘샌디에이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진이 도현의 어깨를 살짝 쳤다.

“잘 갔다 와. 내일 어땠는지 알려주고!”

“너는 안 가니?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나르샤가 못내 아쉬워하자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비드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마찬가지로 아쉬운 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오늘 학원 가는 날만 아니었으면 같이 갔을 거야.”

진과 다비드는 꾸준히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특히 다비드는 본래 기타보다는 다른 곳에 흥미가 있어서 시작했지만, 최근에 기타 자체에도 재미를 느끼는 중인 거 같았다.

“다음에 꼭 갈게.”

“그래. 오늘만 특별히 봐줄게.”

나르샤가 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진이 정수리에서 지그시 느껴지는 무게에 배시시 웃었다.

도현은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나르샤의 차에 올라탔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나르샤가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살랑대는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단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워낙 얼굴을 자주 맞댄 사이라 그런지 어색함은 없었다.

“나르샤는 매번 경기가 있으면 보러 가는 거예요?”

“음, 대부분? 학교 일정이랑 겹치면 아무래도 어렵긴 하지. 그래도 최대한 가려고 하고 있어. 안 그러면 우리 집 애가 삐지거든.”

“부모님은요?”

“두 분은 바빠서.”

안 갔단 소리였다.

도현도 니콜라스의 부모님이 얼마나 바쁜지 어렴풋이는 알았다. 니콜라스의 집에 가면서 마주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까.

그나마 엠버 씨는 축제 같은 날 봤다지만, 니콜라스의 아버지는 뵌 적조차 없었다. 어쩐지 나르샤가 이 주제를 달가워하지 않는 거 같아 도현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 시합하는 학교, 저번에도 했던 곳 맞죠?”

“아아, 맞아. 아무래도 수영부가 유명한 학교끼리 자주 교류하다 보니까… 이번이 아마 세 번째일걸. 한 번은 여기서 두 학교만 했었고, 한 번은 여러 학교가 모여서 센터에서 했었고… 응, 세 번째 맞네.”

“잘 기억하시네요.”

“여기만. 니키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잊을 수가 있어야지. 뭐, 라이벌이 있다나?”

나르샤가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여름 캠프에서 만났던 친구 맞죠?”

“응, 신기하게 캠프 갈 때마다 마주치더라? 인연은 인연인가 봐. 니키는 악연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정도 되는 라이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라이벌.

도현은 자신에게 라이벌로 느껴지는 존재가 있는지 생각해봤다. 에드워드는 경쟁 상대라기보다는 멘토 같은 느낌이고 맥은 동료에 가까웠다. 최근에 윈저와 배역을 두고 경쟁하긴 했지만, 숙적 같은 라이벌과는 조금 다른 거 같았다.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를 경계한다는 점에서는 루카가 비슷할까. 그러나 도현은 루카를 라이벌로 여겨본 적은 없었다.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득바득 이를 갈고, 나를 채찍질하게 만드는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면 분명 더 즐거워질 텐데….

아.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었을 때.’

강이든의 연기는 도현을 잡아먹으려고 들었고, 도현은 먹히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따라붙었다. 라이벌이란 게, 이것과 비슷한 느낌 아닐까? 도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나르샤는 너무 니콜라스의 얘기만 했다고 느꼈는지, 도현의 생활이나 영화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신선한 기분이었다. 최근에 사람들은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도현의 앞에서 패스파인더에 대한 언급을 삼갔던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물으니 마음이 편했다. 도현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대답했다.

“아직 캐스팅이 다 안 끝나서 계속 캐스팅 작업 중이래요. 저도 그 정도만 들어서… 촬영 들어가려면 적어도 반년은 더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요?”

“캐스팅이 정말 오래 걸리네.”

나르샤가 신기하단 듯이 말했다. 도현은 거기에 어느 정도 자신의 지분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딸칵.

“자, 이제 내리자.”

시동을 끈 나르샤가 도현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니콜라스에게 해주던 버릇인가. 나르샤의 과한 친절에 도현은 조금 어색하게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수영장이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왜 여기서 시합을 하나 했는데, 델마 아카데미보다 수영장이 좀 더 컸다.

델마도 수영부가 유명한 편이라 시설이 나쁘지 않았는데 이곳은 아예 수영부만을 위해 건물을 따로 지어놓은 거 같았다.

도현이 학교 수업을 들어야 할 뿐더러 나르샤도 일정이란 게 있어서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시합은 진행 중이었다. 촤아악, 물을 가르는 소리와 수영장 특유의 공기가 도현을 덮쳤다.

“어, 저거, 저거! 니키네!”

선두에서 물을 가로지르는 사람이 니콜라스였나 보다. 나르샤가 뛰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도 그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지금이 몇 미터인가요?”

“네? 아, 400m요. 가족 보러 왔나 봐요?”

“저 앞에 있는 애가 제 동생이에요.”

“어머, 정말요?”

관객석에 가서 앉은 나르샤는 친화력을 십분 발휘해서 몇 칸에 옆에 앉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여성이 아까부터 그 애가 정말 잘했다며 칭찬하자 나르샤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떠올랐다.

도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흘리며 시합에 집중했다. 수영모에 수경을 쓴 선수들은 얼굴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곧바로 니콜라스를 찾아낸 나르샤의 눈썰미에 감탄하기도 잠시.

도현은 니콜라스의 경기에 빠져들었다. 유독 시원시원하게 팔이 뻗어지고, 그럴 때마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정말 잘했다는 여성의 말은 빈말이 아니라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니콜라스의 뒤를 따라붙는 선수가 한 명 보이긴 했지만, 쉽게 따라잡힐 정도로 보이진 않았다. 니콜라스는 독보적이었다.

손에 땀을 쥐는 거 까진 아니더라도 아슬아슬한 경기를 예상했는데 이건 뭐, 결과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그리고.

처억-

흰 손이 위로 올라왔다. 쑥 들어 올려지는 몸에서 물이 촤르르, 타고 흘러내렸다. 도현은 소년의 입가에 번지는 환한 미소를 넋을 놓고 보았다. 몸에 흐르는 물방울이 형광등에 반사되어 호수의 윤슬처럼 빛났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뒤를 바짝 따라붙던 선수가 도착해 물 밖으로 나왔다. …니콜라스가 재수 없게 웃는 걸 보니 그 ‘라이벌’인 모양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도현이 눈매를 좁히며 니콜라스의 입모양을 읽었다. 에…ㅂ….

에벱베?

…….

“쟤는 내 동생이지만 참….”

나르샤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도현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방금까지 분명 멋있었잖아…. 도현의 아연한 시선이 까불거리는 니콜라스에게 향했다.

한참 한 소년을 놀리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확인하는 듯 관객석을 둘러보다가, 실망에 젖은 눈빛을 했다. 도현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팔을 뻗었다.

도현을 먼저 발견한 건 친구였다. 니콜라스가 놀리던 소년이 그의 팔을 툭툭 쳐, 여기를 가리켰다. 안경을 벗은 니콜라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어느새 일어서서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고 있는 나르샤와 도현을 발견한 니콜라스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활짝 피었다.

“미친, 귀여워.”

도현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속마음을 뱉은 줄 알았다. 다행히 거친 감탄사의 출처는 나르샤였다. 멍청이, 바보 하면서도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니콜라스를 제일 귀여워하는 나르샤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이 진짜 좋네.’

나이 차가 많아서 그런가. 보통 남매들이 이만큼 사이가 좋진 않은 거 같은데 두 사람은 유별나게 친밀했다. 다른 남매처럼 다투는 거 같지도 않았다.

둘이 냉전이 있을 때는 딱 한 가지 경우였다. 니콜라스가 잘못해서 나르샤가 혼낸 경우. 이렇게 보니 나르샤는 누나라기보단 보호자에 가까운 거 같았다.

본인 경기가 끝났더라도 선수가 시합 도중에 이탈하는 건 어려웠다.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니콜라스는 당장이라도 달려오고 싶은 얼굴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손짓이라도 하면 내팽개치고 달려올 기세였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없겠지?

도현은 굳이 불확실한 도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손짓하는 대신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응원의 의미가 통했는지 니콜라스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련사…?”

옆에서 나르샤가 헛소리했다. 도현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흘려 넘겼다. 묘한 눈빛이 닿은 것도 같았다.

대략 삼십 분 뒤.

삐익-

휘슬 소리와 함께 시합이 종료되었다.

수영 경기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흥미로워서 시간이 금방 갔다. 니콜라스의 경기를 제대로 못 본 건 아쉽긴 했다. 어쩌다 보니 시합이 다 끝나고 응원한 이상한 모양새가 됐다.

양쪽 학교가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훈훈한 광경이었다. 코치와 몇 마디를 나누던 니콜라스는 어디론가 들어가 대충 옷을 꿰어 입고 나오더니 폴짝폴짝 뛰어왔다. 그 뒤에서 한 소년이 무어라 소리쳤는데, 뭐라고 하는 건지 들리진 않았다.

“봤어? 봤어!?”

“응, 일등 축하해.”

두서없는 말에도 도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니콜라스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나 말고 또 누가 일등을 하겠어?”

“잘난 척은. 50m는 나한테 졌잖아.”

“으악!”

니콜라스가 경기를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니콜라스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어서 그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던 도현과 나르샤는 평온했다. 니콜라스가 억울한 얼굴로 버럭 성을 냈다.

“갑자기 왜 뒤에서 나타나고 난리야!”

“내가 친구 소개해 달라고 했잖아?”

“언제?”

“방금 네가 달려갈 때.”

“못 들었거든!”

아까 소리치던 게 그런 내용이었나 보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니콜라스가 팔짱을 끼고 막아섰다.

“그리고 싫어. 내가 왜 내 친구를 너한테 소개해줘야 하는데?”

“와….”

유치해!

소년의 얼굴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르샤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러운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니콜라스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세트 상품처럼 나르샤의 한숨 소리가 따라 붙었다.

“장난 그만하고 비켜봐. 나 할 말 있단 말이야. 너 있잖아, 걔 맞지? 도현 리….”

“왜 아는 척이야? 도리토스는 유명해서 너 말고도 아는 사람 한 트럭은 쌓였거든?”

니콜라스가 까탈을 부리며 ‘접근 방식이 너무 구식이다’고 빈정댔다. 몹쓸 것을 보듯이 혀까지 차는 모양새에 소년이 말문을 잃고 니콜라스를 쳐다보았다.

“얘 원래 이래?”

“…글쎄.”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던 도현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니콜라스가 원래 이상한 건 맞았지만, 최근에 좀 더 이상해진 것도 맞았다. 그러나 이걸 말할 정도로 도현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소년이 어휴, 하며 미운 네 살 조카 보듯 니콜라스를 흘기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얘가 유명한 건 나도 알아. 근데 내 친구도 유명하거든, 내 친구가…. 어어? 와! 저기 있다! 안 온다고 했으면서!”

소년이 즐거운 얼굴로 팔을 흔들었다. 도현은 소년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야! 할! 여기 네 친구도 있어!”

이쪽으로 오던 헤레이즈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시간이 멈춘 거 같은 정지 이후.

두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또 얘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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