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일상의 균형 (6)
누가 봐도 아는 사이인 분위기에 니콜라스가 눈동자를 데구륵, 굴렸다. 제이스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치켜올렸다.
“봐, 내 친구도 유명인이거든? 그리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내 친구랑 네 친구가 친구야!”
헤레이즈의 얼굴이 까칠해졌다. 해석해 보건대, ‘내가 왜 얘랑?’이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종종 도현을 그리워하던 모습을 본-정확히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들이 제대로 안 씻고 다닐 때 흘러나온 한탄이었다- 제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먼저 입을 연 건 도현이었다. 도현은 니콜라스와 나르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친구예요. 작년에도 같이 영화를 찍었고요.”
“아! 어디서 봤다 했더니!”
이미 긴가민가하고 있었던 나르샤는 헤레이즈의 정체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설렘이 일었다.
“안녕, 난 나르샤 가비야. 얘는 니콜라스 가비고.”
왠지 모르게 불만스러워 보이는 니콜라스 대신 나르샤가 호들갑을 떨며 손을 내밀었다. 나르샤의 손을 본 헤레이즈의 동공이 잠깐 흔들린 거 같았다.
떨어져 나가는 손이 유독 빠른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감기 걸렸니?”
“얘가 셀럽 병에 걸려서… 악!”
정강이를 걷어차인 제이스가 한쪽 발을 들고 콩콩 뛰었다. 너무하다며 항변하는 것에 헤레이즈가 다리를 슬쩍 들자, 마법처럼 조용해졌다.
“아아, 그럴 수 있지. 주인공 역이면 엄청 주목받지?”
나름 이해심 깊은 발언이었는데 헤레이즈는 그녀에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초면에도 가차 없는 눈빛에 나르샤가 어색하게 웃었다.
촬영 당시, 그냥 조용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헤레이즈는 그다지 사회성이 밝은 편이 아니었다. 특히 사회성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사적인 상황에서 그런 성향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에서도 도현을 제외하고는 거의 루카에게만 다가갔던 걸 보면 계산적인 성격인 데다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았다. 사실 타인의 체취를 좋아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지금도 나르샤의 오해를 알면서 정정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도현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헤레이즈는 그… 마스크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편이라서요.”
말하고 나니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째 어감이 좀 이상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도현을 본 헤레이즈가 미간을 좁혔다.
쟨 머저린가.
헤레이즈의 안에서 도현의 한심도가 1 상승하는 사이, 니콜라스가 기묘한 낯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야, 얘도 너처럼 자주 눅눅해져? 배우 하는 애들은 다 그런가.”
아무래도 니콜라스에게 안 좋은 편견이 생긴 거 같다.
“눅눅?”
“아, 우리끼리 부르는 호칭 때문에. 도현이 애칭이 도리토스거든.”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한 나르샤는 초면에 저를 한심하게 쳐다본 아이를 상대로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유난히 사근사근한 말투와 딱한 것을 보듯이 내려간 눈썹의 각도를 봤을 때, 도현의 말을 대인기피증이 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그녀가 헤레이즈의 직업이 배우란 걸 잊은 건 아닌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것도 잠시.
왠지 찝찝한 기분에 고개를 돌린 도현은 드러난 두 눈으로 힘껏 비웃고 있는 헤레이즈를 발견했다.
“…….”
어떻게 하관이 가려졌는데도 비웃는 게 보이는 거지?
아. 이래서 아서 역에 합격한 건가?
이상한 곳에서 이유를 깨달은 도현이 납득할 때였다. 애칭을 들은 순간부터 눈을 반짝거리며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만을 노리던 제이스가 거리를 훅 좁혀왔다.
“너 애칭 멋있다! 나도 그렇게 불러도 돼?”
그의 기이한 취향은 둘째 치고, 퍼스널 스페이스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코앞에서 반짝이는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전혀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는 평온한 낯으로 생각한 도현이 입을 열었다.
“그건 친한 친구들만 부를 수 있는 거야. 넌 안 돼.”
나 아닌데?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제이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파닥파닥 젓고 옆쪽으로 턱짓했다.
범인은 깨륵깨륵 웃고 있는 니콜라스였다. 도현이 거부한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제이스가 자신감을 되찾았다.
“할 친구면 내 친구지!”
“친구의 친구는 친구의 친구인 거지 네 친구가 아니거든?”
“그럼 지금부터 친해지면 되지.”
“얘는 너랑 친해질 생각 없대.”
주욱.
니콜라스가 심히 부담스러운 거리까지 다가온 제이스를 밀어냈다.
거리가 확보되자 편안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그때, 제이스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 니콜라스가 보람찬 얼굴로 도현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실 ‘니콜라스가 친구에게 집착하는 편이었던가?’ 의아하긴 해도 달라붙는 니콜라스를 떨어트리진 않았다.
“뭐야, 아까부터 치사하게. 나도 친구 있거든? 그렇지? 할-”
아까부터 일행이 아닌 척하고 있었던 헤레이즈의 얼굴이 혐오감에 물들었다.
“더러워. 저리 가.”
“에이, 좋으면서!”
“아니, 아니라고! 좀 떨어져, 이 세균 덩어리야!”
진심으로 경악하며 떨쳐 내는데도 달라붙는 모습을 보아하니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 같았다. 고통스러워하던 헤레이즈가 파들파들 떨었다.
“으으….”
어, 친밀한 관계 맞겠지?
집합 소리가 들렸다.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로 나온 니콜라스는 학교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야 했다. 곧장 집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학교에 돌아가 피드백과 뒤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니콜라스는 몇 번이나 제이스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서는, 물가에 애를 내놓은 초보 아빠처럼 걱정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다가, 코치에게 등을 밀려 버스에 올라탔다. 도현은 평온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버스가 떠나는 걸 본 도현이 뒤를 돌았다.
“우리도 이만 가볼게.”
“잠깐.”
헤레이즈가 도현을 불러 세웠다.
“너 뭐 들은 거 없어?”
“뭘?”
두서없는 질문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지금 니흐타 캐스팅 중이잖아.”
“아.”
“세상에!”
듣고 있던 나르샤가 탄성을 뱉었다. 반응을 보니 소설을 전부 읽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흥미로울 법했다. 니흐타는 패스파인더의 주연에 가까운 인물 중 한 명일뿐더러, 아서를 제외하고 르옌과 가장 진하게 얽히는 인물이었으니.
“아직 별다른 이야긴 없는데… 컬렌버그 감독님이 카메라 테스트할 때 부를 거라고 하시긴 했어.”
도현의 오디션에 헤레이즈와 신시아가 함께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아직도? 흠, 그래.”
궁금증이 풀린 헤레이즈는 도현을 쿨하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도현은 제이스와 번호를 교환했다.
니콜라스가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친구의 친구인데 어떻게 거절해.’
뭐. 헤레이즈라면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 같긴 한데. 어찌 되었든 헤레이즈라는 요소를 빼고 보더라도 제이스가 딱히 싫지 않았다.
도현이 제이스가 보낸 문자를 보고 있자, 그를 흘깃 쳐다본 나르샤가 말했다.
“그거 비밀로 하는 게 좋을걸.”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글쎄….”
도현은 그 얼굴이 조금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전방을 응시하는 옆얼굴은 생각에 잠긴 건지, 그저 아무 생각 없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후로 운전에 집중했다. 운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대신 도현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헤레이즈의 언급 때문에, 아까부터 니흐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니흐타를 맡게 되는 건 누굴까.
* * *
“여행 가자.”
“너….”
진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굉장히… 뜬금없다?”
그들은 오랜만에 도현의 집에 모여 다락방에 누워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방금까지 ‘그래서 맥의 멱살을 잡아야 할까, 아니면 멱살을 털어야 할까’에 대해서 토론하는 중이었다. 참고로 진은 쳐들어가서 납치해 와야 한다는 제 3의 주장을 밀고 있었다.
“지금 당장 가자는 건 아니고, 여름 방학 시작하면 가자. 이 주 정도?”
“너 수영부는?”
“여행하는 동안은 빠져야지.”
“수영부에서 허락해준대?”
“…아마?”
코치가 뒷목을 잡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물론 가겠다고 하면 막을 방도는 없겠지만.
니콜라스는 맥락 없이 말을 꺼낸 것치고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었다.
“우리 여름 방학 끝나면 이제 마지막 학년이잖아. 5학년 되면 도리토스는 또 학교도 잘 안 나올 텐데.”
촬영 때문인데 왠지 문제아가 된 기분이었다.
“5학년 때 같은 반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같은 반이 되어도 얘가 영화 찍으러 가면 그다지 의미도 없잖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니콜라스의 손가락이 도현을 가리켰다.
“얘 졸업하면 여기 떠나니까.”
“그거 아직 확실하지 않댔어!”
진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게….”
도현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마 갈 거 같아….”
한국에 간다는 걸 말해줬을 때는 확신이 거의 없는 상태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현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한국에 가야겠다는 쪽으로.
르옌 역할을 맡게 되면서 오스카가 염려했던 부분–할리우드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측면-도 해결된 상태였다. 도현이 도중에 하차당하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는 계속 촬영할 테니.
진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의외인 것은, 니콜라스가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보통 때라면 두 사람의 반응이 반대였을 텐데. 그러나 도현은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안 돼! 못 보내!”
“어, 큽, 아 혀….”
혀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고통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맺혔다. 아무래도 진은 멱살을 털어야 한다는 주의인 거 같았다….
한참 털리고 난 후.
진은 가까스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미리 말해둔 덕에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끝내서 그런 거 같았다. 역시, 먼저 알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와 별개로 여전히 싫긴 한지 간간이 도현을 애타는 눈망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현이 신경 쓰이는 것은 진의 슬픈 눈망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이상하게 쿨한 니콜라스의 태도가 자꾸만 거슬렸다.
한동안 질척거렸으면서, 이건 왜?
걱정이 반, 의아함이 반의 반, 그리고 서운함이 나머지 정도의 비율이었다. 아니 어쩌면 좀 더 많을 수도 있고….
아냐. 니키가 슬퍼하지 않으면 안심해야지. 거기서 섭섭해하고 있을 게 아니라. 도현은 애써 튀어나오려는 이기심을 걷어냈다.
진이 진정하자, 다시 이야기가 본래 궤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진도 여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우리 집은 가능할 거야. 아직 여름 방학 계획을 세우지 않았거든. 근데 니키, 너 가능해?”
진이 우려한 대상은 도현이 아니라 니콜라스였다. 도현의 경우, 촬영이 반년 후에나 이뤄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엄마 아빠랑 얘기한 거야.”
“뭐? 정말?!”
진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현도 놀라서 니콜라스를 쳐다보았다.
“너희 엄마 아빠 갈 수 있으시대?”
“응. 시간 내겠대.”
“세상에, 잘됐다!”
진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기쁜 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과 자주 시간을 보내는 진이나, 부모님이 관심을 주지 못해 안달인 도현과 달리 니콜라스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일이 드물었다.
물론 가정에 불화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녁에는 두 분 다 집에 돌아오셔서 니콜라스와 시간을 보낸다는 거 같았다. 장난기가 많은 니콜라스의 성격은 사랑받은 태가 났다.
그러나 같이 여행을 다닌다거나, 저번처럼 어떤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하는 건 어려운 편이었다. 지금까지 같이 놀러 갈 때 니콜라스의 보호자로는 나르샤가 98% 동행했고, 2%는 엠버 씨일 정도였으니.
“니키. 괜찮겠어? 오랜만인데 가족끼리 놀러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도현도 물론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싶었다. 니콜라스의 말마따나 한국으로 가기 전에 친구들과 즐거운 기억을 가득 쌓고 싶었다.
그래도 세간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좋은 기회잖아. 가족끼리 다니는 편이….”
“아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너네랑 같이 가는 게 더 좋은데?”
“니키….”
도현이 그를 아련하게 불렀다.
이건 정말… 감동이었다.
진도 마찬가지였는지, 옆에서 입을 틀어막고 우리 애가 벌써 다 컸다며 감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뜨뜻한 시선에 니콜라스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든가 말든가, 두 사람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니콜라스의 손을 꼭 잡았다.
“네 마음은 잘 알았어. 우리가 가족만큼 좋은 거지?”
“나도 네가 가족처럼 좋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한 진의 뒤를 도현이 이어받았다. 진심이 80% 정도 담긴 말이었다. 도현은 가족보다 니콜라스를 더 좋아했으니까.
아까 느꼈던 서운함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도현이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니콜라스의 손을 다시금 꼬옥 쥐었다. 하루 빨리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