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일상의 균형 (7)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자니 하루하루가 금방 흘렀다. 여행 버킷 리스트는 멈출 줄 모르고 불어났다. 리스트에 적힌 것을 다 하려면 이 주는 고사하고, 두 달은 필요할 거 같았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여행지는 스위스 인터라켄이었다. 알프스의 툰과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위치한 인터라켄은 스위스 특유의 감성과 아름다운 대자연을 볼 수 있는 관광지였다.
여기에는 진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처음에 여행지를 정할 때 프랑스 니스, 영국 브라이튼 등, 대표적인 관광 명소들이 많이 제기되었는데, 진이 여행지까지 해변으로 가고 싶진 않다며 딱 잘라 말한 것이다. 니콜라스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도현이야, 도심 속에서 오래 살았다지만 두 사람은 샌디에이고 토박이였으니 그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결국 해변을 낀 관광지는 모두 엑스 자가 그려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스위스의 인터라켄이었다.
Interlaken.
해석하자면 ‘호수의 사이’.
탁 트인 웅장한 산맥과 동화 같은 호수를 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음은 물론, 액티비티도 잘되어 있어서 즐길 거리도 많았다.
다시 생각해도 완벽한 선정이었다.
“…재밌겠네.”
머리를 맞대고 숙덕이는 아이들을 아닌 척 흘깃거리던 다비드였다. 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여행 인원은 세 가족뿐. 평소 넷이 자주 어울렸으니 다비드가 소외감을 느낄 법한 일이었다. 도현은 이 부분이 꽤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다비드는 친구 관계에 큰 애착이 없는 편이었다. 딱히 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어본 적도 없고 아쉬워해 본 적도 없다. 그는 원한다면 어느 무리든 어울려 놀 수 있었다.
그런 다비드가 세 사람과 자주 어울려 다니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였다. 진이 거기 있으니까. 가끔 보면 그는 피와 살이 낭만으로 차 있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친구 관계까지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는 걸지도, 도현은 가볍게 짐작했다.
그의 그런 태도는 애정하는 대상에겐 기꺼울지 몰라도 친구 관계에서는… 아무래도 일정 이상 가까워지기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 생각 없이 헬렐레거리는 것 같지만 의외로 예민하고 독특한 부분에서 눈치 빠른 니콜라스와는 더욱.
네 사람은 평소에 잘 어울리면서도 어떠한 경계선이 있었다. 평소라면 드러나지 않아도 이런 일이 생기면 눈에 보이는, 그런 경계선.
다비드도 그걸 아는지 딱히 가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하진 않았다. 다만 가끔가다 눈빛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도현은 그걸 눈치챘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다음번에 같이 가자.”
어차피 진이 진심인지 빈말인지 모를 말로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다비드는 내 관심보다 진의 한 마디를 서른 배 정도는 달가워할 테지. 시니컬하게 생각한 도현이 니콜라스와 눈을 마주치고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우린 계속 버킷 리스트나 짜자.”
“좋아.”
두 사람은 빠른 동의 끝에 대체 왜 안 사귀는지 모를 징그러운 한 쌍을 익숙하게 차단한 채 다시금 하던 일에 열중했다.
* * *
건물 안은 적당히 바빴다.
제각각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가거나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지만, 건물 내로 들어온 도현을 발견할 수준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몇이 인사를 건네자, 도현은 익숙하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나름 유명인이었다. 패스파인더 주연인데 아닐 리가 있겠냐마는.
이제는 직원의 안내도 필요 없었다. 도현은 데이먼의 사무실로 곧장 향했다. 너무 익숙해졌나. 여기 직원이라도 된 기분이네. 그리 생각하며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노크 소리가 울리고.
- 들어오세요.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락이 떨어지긴 했는데 왠지 들어가면 안 될 것같이 예민하고, 피로에 찌든 목소리였다.
딸칵.
그러나 문을 여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도현은 당당하게 사무실에 발을 디뎠다. 왜냐하면.
“오, 너였구나!”
예민한 낯에 온화한 눈빛이 올라왔다. 도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았다.
그의 예민함은, 음, 사람을 가렸다. 그리고 데이먼은 도현을 좋아했다. 그것도 매우. 운명처럼 만난 것부터 도현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이 그의 감수성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헤레이즈나 신시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배우들을 다 좋아하긴 하는 거 같은데, 유독 그를 볼 때마다 어딘가 우수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촉촉한 눈동자도 그 밑에 드리워진 다크서클의 존재감을 죽일 수는 없었다.
“잠은 자세요?”
“물론이지. 네가 걱정하지 않을 만큼은 잔단다.”
근데 왜 볼 때마다 초췌해져 있지.
마음 같아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릴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편하게 대한다고 해도 감독과 배우의 사이였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체했다.
데이먼은 도현에게 소파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오스카는 익숙하게 테이블에 놓인 간식 바구니를 잡아당겼다.
“도현, 여기 초콜릿 쿠키 있는데 먹을래?”
“하나만요.”
오스카와 테이블에 놓인 쿠키를 야금야금 먹으며 대본을 확인했다. 니흐타와 르옌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스마고그 호수에서 대화하는 장면. 둘 다 니흐타의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강조되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기대돼? 너 지금 일 초에 한 번씩 문 쳐다보고 있어.”
데이먼이 언제 돌아올까 생각한 건 맞았지만 일 초에 한 번까진 아니었다.
“당연히 기대되죠.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상대역이잖아요. 주인공 일행을 제외하고서요.”
“그래?”
멈칫.
어딘가 그의 말투가 기묘했다. 도현이 미간을 좁히며 그를 응시했다. 오스카의 입꼬리가 움찔대고 있었다.
“아아니- 그냥. 뭐 다른 기대도 들 수 있지 않나 싶어서?”
오스카가 흠, 흥, 이상한 음을 넣으며 한 말에 도현이 차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진심인가?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오스카. 물론 어떤 부족에선 예술과 현실이 연장선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전 예술과 현실이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헛소리 같았지만 그렇게까지 헛소린 아니었다. 뒷말이 본래 하려던 말이었으니까.
“작품 속에서의 관계가 현실로 이어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소리예요.”
기이한 표정을 짓던 오스카가 김이 샌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너는 애가 로망이 없어.”
“이건 일이잖아요.”
이성적이다 못해 각박하기까지 한 말에 오스카가 ‘그래, 네가 최고야’ 하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오스카는 재미없는 꼬맹이를 놀리는 데에서 관심을 뗀 모양이지만, 도현은 그 덕분에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그의 연기법은 본래 ‘배역 그 자체가 되어 새로운 인격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후 정신적인 불안정성 때문에 방식을 바꿔 ‘일상적 감정 속에서 필요한 것을 추출해 대입’하는 위주로 하고 있었지만.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전에는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인격이었다면, 지금은 도현과 새로운 인격이 합쳐진 정도의 느낌이었다. 각자 장단점은 있었다. 전자는 완전한 몰입과 독립적인 캐릭터성. 후자는 현실 기반의 감정과 자신만의 연기 스타일 확보 정도일까.
그러나 방식을 바꿨다고 이전 방식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두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되었다가 돌아오는 것도, 다른 인격과 나를 섞는 것도 후유증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감정이 아닌데 내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의 혼란.
지금까지는 그래도 단발성인 연기여서 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가 시리즈물이라는 것. 즉, 도현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르옌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부분에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오스카한테는 말 안 해줄 거지만. 말하면 좋다고 희희낙락해서 또 놀리려고 들 게 뻔한데 내가 왜?
와작, 입 안에서 초콜릿 쿠키가 부서져 내렸다.
모든 기다림엔 끝이 있다.
조금 비장한 말인가 싶긴 한데, 그만큼 애타게 기다렸다. 도현은 문이 열리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몇 명이에요?”
“너 때보단 많아.”
몇 명이길래?
궁금해 죽으려고 하자 데이먼이 입 모양으로 알려줬다. ‘여섯 명.’ 여섯? 진짜로 생각보다 더 많은 숫자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때는 워낙에 너랑 윈저가 특출 났으니까 그런거고. 보통은 이 정도 고민하지.”
기억난다. 신시아는 꽤 스트레이트로 수월하게 합격한 거 같은데 헤레이즈는 오디션을 몇 번이고 다시 봤었다고 했다. 열다섯 명이서 보고, 여섯 명이서 보고, 넷이서 보고, 다시 아홉 명이서 보고…. 듣다가 질렸던 기억이 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헤레이즈 진짜 대단하잖아?
그 대장정을 견뎌내고 주인공 자리를 손에 넣은 게 굉장히 멋져 보였다. 만나면 칭찬해 줘야지. 도현은 헤레이즈가 들었다면 싫어할 생각을 하며 데이먼을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도현이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던 그곳이었다. 이미 제작진들이 모여 있었다. 일단 마리아는 없었고, 데이먼과 토드, 그 외 두 명 정도.
한 감독이 도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듣기로, 마지막까지 도현을 반대하던 사람인 거 같았다. 사실 안 들었어도 알았을 것이다.
‘저렇게 표가 나는데 모르기도 어렵지.’
아마 배역 관련해서 논란이 불거졌을 때 앞장서서 이 기회에 바꾸자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어차피 도현은 여기 있었다. 도현이 살짝 입꼬리를 당겼다가 내렸다.
“뭐야? 왜 웃어?”
“재밌는 걸 봐서요.”
“…재밌다고?”
오스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각종 장비, 직원, 제작진들… 수염 난 아저씨들이 재밌는 건가? 오스카가 애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중얼거렸다.
도현은 감독들의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여기서 계속 심사 위원처럼 있는 건 아니고, 후보가 들어오면 저 투명한 유리창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달칵.
첫 번째 후보를 마주할 수 있었다.
* * *
“꼭 다시 보자!”
“응, 그래.”
도현은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말했다. 소녀는 호감을 얻어내기 위한 예쁜 미소를 잔뜩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한테 잘 보일 필요 없는데.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뺨을 긁적였다. 도현이 이미 확정된 배우라고는 하지만, 배역 결정권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강조하지만,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도현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니흐타 후보들은 은근히 도현의 눈치를 봤다. 간절한 입장이라는 걸 아니까 영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풀뿌리라도 잡고 싶은 그 심정은 나도 느껴봤으니.
다만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불과 두 달 반 정도 전만 해도 도현이 그 위치에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안 했는데 괜히 올챙이일 적 생각 못 하는 개구리가 된 거 같았다.
‘제발 다음 후보는 좀 더 당당하게 굴었으면 좋겠다.’
도현은 가볍게 소원했다.
그 바람이 잘못되었던 걸까?
“…….”
모양 좋은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예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미소가 시너지를 일으켜 굉장히 재수 없어 보였다.
침묵하는 도현을 상대로 여유롭게 (비)웃고 있던 소녀가 느긋하게 입술을 뗐다.
“내가 말했지?”
잠깐 현실을 외면하던 도현이 이내 소녀에게 눈을 맞췄다. …진짜 현실인가. 도현은 잠시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 고민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내가 뭐, 측은지심이라도 들어서 널 걱정한 줄 알았어? 으응?”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다만 같은 배우로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풉.”
“…….”
“뭐, 적당한 착각은 정신 건강에 좋대. 그래서 지금 머리가 좀 맑니?”
…진심인데, 이렇게까지 당당한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도현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