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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89)화 (290/582)

제289화. 일상의 균형 (8)

이제야 시상식에서 느꼈던 찜찜함의 정체를 알았다. 묘하게 차분한 게 공석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얘는 애초에 촬영장에서 샐러리를 던진 애였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푸른 눈이 아주 통쾌해 보였다. 뜸을 들이던 도현이 유리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 눈길을 줬다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괜찮겠어?”

“뭐가?”

“지금 카메라 테스트하러 온 거잖아.”

도현이 꺼낸 말에 하퍼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불쾌함의 표현이라기보단 당황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뭐?”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원숭이가 물구나무서서 랩 하는 걸 본 사람처럼 놀랍다 못해 경이로운 눈길이었다. 도현은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지금 너한테 잘 보이지 않으면 연기를 망치겠다는 거지? 세상에, 살다 보니까 이런 협박도 다 받는구나.”

얼마나 살았다고 놀라워하고 있는 하퍼를 본 도현이 미간을 꾹 눌렀다. 참자, 참아야 한다.

어차피 안 참으면 어쩔 건데. 도현은 화가 난다고 샐러리를 던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닐뿐더러, 여긴 던질 음식도 없었다.

어쩐지 하퍼와는 굉장히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도현이 말했다.

“나는 공사는 구분할 줄 알아. 적어도 화가 난다고 뭔갈 던지진 않거든.”

꾹꾹 눌러 담아 내뱉는 말에 하퍼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하는 얼굴이었다. 도현은 잠깐 촬영 때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라 움찔했으나, 표정만은 태연했다.

“널 협박할 이유도 없지. 어차피 잘하는 사람이 니흐타가 될 텐데, 뭐 하러.”

누가 잘한다고는 말 안 했다.

지금까지 도현이 만난 후보는 넷. 그중에서 특출 나게 대단한 인상을 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도현은 괜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누군가 유치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유치한 도발에 그대로 걸린 루카가 얼굴을 구기자, 반대로 여유를 되찾은 도현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 말뜻은,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겠냐는 뜻이었어. 네가 감정 연기를 펼쳐야 할 대상이 나란 걸 잊은 건 아닌가 싶어서.”

니흐타가 르옌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주 복잡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사이에 ‘애정’이 끼어 있다는 부분이었다. 도현이 말하는 바를 이해한 하퍼가 코웃음 치며 팔짱을 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네가 멍청한 표정 짓는 거 보니까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연기도 잘될 거 같은데? 왜, 넌 어렵겠어?”

하퍼와 윈저는 괜히 소꿉친구가 아니었다.

둘 중에 누가 서로를 물들인 걸까. 아니면 둘 다 태어났을 때부터 문제가 있었던 건가. 어느 쪽이든 상당히 유감스러웠다. 친하게 지낼 때는 몰랐는데, 하퍼는 생각보다 뒤끝이 길고 밉살맞았다.

이래서 사람은 멀리서야 제대로 보인다는 걸까. 너무 멀리서 보고 있는 도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더 짙게 미소 지었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았다.

“내가?”

한 마디면 충분하거든.

도현은 대체로 다른 사람을 잘 파악했다. 그건 타인에게 잘 맞춰줄 수 있다는 걸 의미했지만, 동시에 효과적으로 상대의 심기를 자극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하퍼는 도현에게 경쟁의식을 품고 있었다. 미약한 조급함을 품은. 그 어떤 말보다 성공적인 어그로에 하퍼의 얼굴이 분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진심으로 유쾌한 기분이 되어 웃….

…나도 물든 걸까? 도현은 자신의 인성에 충격을 받았다. 도현을 충격에서 건져 올린 건 데이먼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어? 둘이 너무 친한 거 아니야?”

“별 얘기 안 했어요.”

정신을 차린 도현이 방금 건 실수였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뒤를 돌아보니 하퍼도 방긋방긋 사회적 미소를 장착하고 있었다.

“보면 괴짜들 거기가 진짜 애들을 잘 뽑았다 싶다니까. 너랑 헤레이즈, 루카 다 괴짜 출신이잖아. 너도 놀랐지?”

“네.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고… 말 안 해주셨잖아요.”

“난 스포는 싫어하거든.”

그거 참 영화감독다운 말이었다.

조금쯤은 해줘도 좋을 텐데. 적당한 스포는 마음의 준비에 도움이 된다.

“친해도 연기는 제대로 해야 해. 알지?”

“물론이죠.”

전혀 친하지 않음을 어필하는 대신 신뢰가 가는 얼굴로 대답했다. 친하든 안 친하든, 연기를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곧 카메라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루카는 돌아가는 카메라를 한번, 눈을 찡그리게 될 정도로 밝은 형광등을 한번 쳐다보았다.

장면의 배경은 숲속, 절벽 끝.

깨끗한 대리석 바닥과 판가름하는 시선들은 몰입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해낼 거지만. 루카는 자신감을 풀로 장착한 채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하얀 얼굴이 보였다. 그러자 시상식 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솔직히 의외였다. 완전히 기가 죽어 비실거릴 줄 알았는데.

선심 쓰듯 글을 올렸던 루카는 시상식에서 멀쩡하다 못해 빛이 나는 얼굴을 보자, 어쩐지 부당한 일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왜 저렇게 멀쩡한데.

루카는 거기에 자신이 조금, 아주 조금, 개미 눈물에 낀 먼지만큼이라도 안심했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괜히 아니꼬워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재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끝이었다.

끝이야?

누구는 고민하다가 글을 올렸는데 그게 끝이야?

노려보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루카는 정말이지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빡침을 느꼈다.

물론 미친놈과 대화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건 저거대로 열받았다. 그리고 저거에 열받는 자신 때문에 더 열받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모를 생각을 하며 루카가 이를 갈았다.

이러니 굉장히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게 보이지만, 루카도 억울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기 전에는 잘 잊고 잘 살았다고. 애초에 그녀는 바쁜 사람이었다. 적어도, 루카와 동갑인 아이 중에서는 상위권에 들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무튼 저런 애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지금도 신경 쓸 이유 하등 없는데!

고작 얼굴 좀 마주한 거 가지고 짜증 나게 만들다니. 대단한 놈이었다. 본인이 문제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루카가 도현의 어그로에 감탄했다. 분명히 그날 통쾌하게 복수했는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그에게 누군가를 열받게 하는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윈저가 문자를 보내왔다. 루카는 몹시 귀찮은 얼굴로 문자를 확인했고.

‘걔랑 만났어?’, ‘널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 좀 전해줄래?’라는 내용을 확인하고선 침착하게 백여든 번째로 윈저와의 절연을 결심했다.

실패했지만.

루카는 오디션이 끝나면 다시 절교를 시도해야겠다며 백여든한 번째 다짐을 다지곤 앞을 응시했다.

저 태평한 얼굴은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다.

루카는 정말이지, 저 무표정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고 놀랐을 때나, 빈정대는 말에 썩어 들어갔을 때는 딱 보였는데. 그것도 잠깐이었지만.

이러니까 꼭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루카는 미친놈에게 조금도 관심 없었다. 조금도!

루카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잡념을 밀쳐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런 애가 아니었다. 집중해야 할 건 앞으로 해야 할 연기였다. 비록 상대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배우란 게 상대를 고르면서 연기하는 직업은 아니니까.

오, 나 좀 프로 같았어. 루카는 스스로의 프로다움에 감탄하며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훅, 올라오려는 짜증을 프로답게 내리누르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준비됐니?”

“네, 됐어요!”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루카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바뀐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질 수 없었다.

루카는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늘 생기 넘치던 푸른 눈동자가 공허한 빛과 미약한 의문을 담았다.

탁!

슬레이트가 내려갔다.

* * *

데이먼은 눈에 이채를 띠고 건너편 방을 쳐다보았다.

팽팽하다.

그가 느낀 감상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연기에는 줄을 잡아당기는 거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어딘가 아슬한 느낌을 주는.

가장 놀라운 건 루카의 연기였다.

루카가 잘하긴 했지만–애초에 잘하지 않으면 여기 있을 일도 없다-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친한 사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연기를 맞춰본 경험이 있으면 더 잘하는 타입인가. 그런 배우들이 종종 있긴 했다. 데이먼이 루카를 집중해서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확실히 대본 리딩 때 보았던 것보다 더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몰입도 더 잘하는 거 같고.

‘아니면 둘의 연기가 파장이 잘 맞는 걸 수도 있겠어.’

사람에게도, 연기에도 파장이란 게 있었다. 잘 맞으면 시너지를 일으키고 맞지 않으면 녹슨 악기처럼 불편한 소리를 내는. 이 경우에는 잘 맞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데이먼의 눈이 흥미로움을 담아 빛났다.

* * *

“너는 누가 될 거 같아?”

도현은 잠시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서던 하퍼를 떠올렸다. 그 얼굴이 꼭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라고 하는 거 같았다. 뭐, 맞겠지만.

“도현?”

“아, 네. 다 잘해서요.”

“에이, 그래도 누가 될 거 같다는 느낌은 있잖아. 없었어?”

“…있긴 했죠.”

“누군데?”

오스카의 호기심 가득한 물음에 도현은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 침묵하다가, 몇 초 후에야 느릿하게 말했다.

“루카 하퍼요.”

“오.”

오스카가 도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흘깃거리는 게, 누가 봐도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다.

도현이 한숨을 삼켰다.

하퍼를 보는 순간 그런 기분이 들기는 했다. 이전 후보 중에서 이렇다 할 만큼 인상적인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하퍼 다음에 한 사람이 남아 있으니 기대를 품었는데….

슬레이트가 내려가는 순간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 바로 앞에서, 호흡을 맞춰 연기한 게 도현이었으니 알 수 있었다.

때에도 괜찮았던 연기력이었다. 그러나 하퍼는 그사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거 같았다. 애초에 캐시 와일드는 하퍼와 성격이 아주 비슷했다. 연기긴 했지만, 어느 정도 본인의 본래 성격이 드러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걔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도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 음… 괜찮은 거지?”

“안 괜찮을 게 뭐 있겠어요?”

“너 걔 싫어하잖아.”

그 직설적인 말에 도현의 입이 딱 다물렸다. …싫은 건 아니거든요. 도현의 부정에 오스카가 전혀 안 믿는 얼굴로 알겠다고 말했다.

결국, 도현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걔가 될 텐데.”

“그렇게까지 확신해?”

“오스카도 봤잖아요. 데이먼 눈빛.”

“…확신할 만하네.”

데이먼의 눈은 꼭, 도현을 처음 봤을 때처럼 빛났다. 아주 하퍼가 탈 기세로 쳐다봤다.

“그리고 상관없어요. 말했잖아요. 작품 속 감정과 현실 속 감정은 이어지지 않는다고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거든요.”

“맞다. 이런 애였지.”

오스카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이제 이 화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너 근데 진짜 루카 싫어해? 저번에는 너 도와주기도 했던데.”

“…….”

이것도 너무 큰 바람이었나 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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