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일상의 균형 (9)
도현은 당장 조수석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오스카는 뭐에 씐 건지 도현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의심 어린 눈빛을 지우질 않았다.
물론, 호와 불호로 나눠보자면 불호에 가깝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세상은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었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겠는가.
그건 ‘싫다’라는 말로 단순히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이것저것 섞여서 흑색이 되었다고 해도 도현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건 그 ‘이것저것 섞였다’라는 부분이었다.
도현은 이 점을 열심히 피력했으나.
“그래, 싫을 수 있지. 원래 그 나이대는 다 싸우면서 크는 거야.”
오스카가 자애로운 얼굴로 웃었다. 그 가식적인 얼굴에서 차마 숨겨지지 못하고 비죽, 새어 나온 즐거움에 도현은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순진한 검은 눈동자에 배신감이 어렸다.
“…오스카, 즐거워 보이네요?”
“어으음? 그럴 리가!”
“…….”
여태까지 그냥 심심한 철없는 어른이 놀려먹은 거란 사실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허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 없었다.
왤까. 병원에 있었을 때도 형이 맨날 놀려먹었던 거 같은데. 원래 사람은 나이가 들면 다 저렇게 이상해지는 걸까?
10살짜리 아이한테서 한심하단 시선을 받은 오스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현이 오스카를 무시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옆에서 오스카가 말을 걸어오길래 ‘오스카랑 도착할 때까지 말 안 할 거예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심했나? 뒤늦게 오스카의 얼굴을 흘깃 곁눈질한 도현은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를 보고 정색했다. 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도현이 이번엔 완전히 그를 신경에서 지웠다.
기세 좋게 메시지를 연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수신인을 입력하고 나니 망설이게 됐다. 수신인에는 ‘헤레이즈 아이데’라는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연락할까, 말까.
배역 이슈 이후, 큰일을 같이 겪었다는 점 때문인지 헤레이즈와 도현의 사이는 많이 가까워졌다. 친한 듯, 안 친한 듯 미묘하던 관계는 그때를 기점으로 한쪽으로 기울었다.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도현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더 정확히는… 헤레이즈가 나한테 호기심을 품었다고 해야 하나.
헤레이즈와 도현의 관계는 언뜻 친밀해 보였으나 실상 파보면 상당히 건조했다.
애초에 헤레이즈는 도현에겐 별 관심 없었다. 그냥 옆에 있을 때 거슬리지 않는 냄새와 조용함이 좋아 붙어 있었던 거지.
어떤 의미로 보면 필요한 것만 취하고 있던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은 건, 도현이라고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을 피하려고 그를 이용했다. 심지어 시사회 때는 대놓고 방패막이로 쓰지 않았던가. 결국은 끼리끼리였다.
하여간에 열 살짜리 아이들이 맺은 관계라기엔 건조한 부분이 있었다. 열 살이지만 정신 연령은 애매한 소년이 그렇게 평가 내렸다.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그 적당한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딱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이 계속.
근데 이미 별다른 일이 생겼지.
도현이 생각에 잠겨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리 도현이라도 알기 어려웠다. 연민인지, 동정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그가 아는 건, 자발적 감금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마리아의 집에서 만난 그날, 헤레이즈의 안에서 어떠한 심적 변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뭔갈 했던가. 머리를 굴려보아도 딱히 짚이는 점이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대화했던 거 같은데. 역시 학교를 못 나간다는 게 충격이었나. 아무래도 테러는 어린애들한테 너무 자극적인 얘기였나 보다.
대충 그렇게 결론 내리다가 도현이 눈매를 찡그렸다.
그래서 연락할까, 말까.
별일 아닌 일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 같긴 했지만, 이건 나름대로 중대한 문제였다. 도현은 헤레이즈와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지금이라면 해도 될 거 같긴 한데. 심지어 제이스와도 연락하고 지내는 중이니,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제이스의 경우 그쪽의 일방적 치댐이었지만….
도현의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하염없이 방황했다.
타인이 다가오는 건 익숙해졌는데, 먼저 다가가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두 눈에 결심이 서리고 흰 손가락이 움직이며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냈다.
화면에 뜬 문장을 한참이나 보던 도현이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한참 머뭇거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핸드폰을 무릎에 올리고 창밖에 시선을 던지다가, 문득 느껴지는 진동에 시선을 내렸다. 메시지였다.
[헤레이즈 아이데 : 놀라운 소식이네.]
간결한 답장이었다. 문자 하나 보내겠다고 몇 분을 고민한 도현이 민망해질 정도로.
내가 좀 나간 건가. 아니야. 그래도 헤레이즈가 먼저 캐스팅에 대해서 궁금해했으니까. 도현이 애써 머쓱한 심정을 내리누를 때였다.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헤레이즈 아이데 : 이건 내 착각이면 좋겠는데.]
[헤레이즈 아이데 : 왜 고래 사이에 낀 불행한 새우가 내 미래 같을까.]
“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리 재밌냐고 묻는 오스카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도현이 가벼워진 손가락으로 문장을 쳤다.
[잘 부탁해.]
헤레이즈의 썩은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 * *
일주일 사이, 도현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 번째는 니흐타 캐스팅 결과를 들은 것. 이변은 없었다. 니흐타 역을 쟁취한 승자는 루카 하퍼였다.
그 탓에 도현은 컬렌버그 감독의 배려 아닌 배려로 루카와의 만남을 가져야 했다. 서로 더 돈독해지고 친해지라는 의도였다.
감독과 셋이서 식사를 할 때 하하호호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싸한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매니저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아이들의 눈치를 볼 따름이었다.
하퍼는 독했다. 얼마나 독하냐고 하면, 도현을 붙잡고 웃으며 사진을 찍자고 하고-싫다고 하면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궁금하긴 했지만 또다시 머리카락에 케첩이 뭉치는 건 사양이라 그만뒀다-, SNS 계정에 사이좋은 척 글을 올릴 정도로 독했다. 혹여라도 지난 시트콤 사건 때문에 잡음이 일어날까 미리 방지하는 차원이었다.
사감과는 별개로 그녀가 범상치 않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윈저가 도현에게 연락해 왔다는 것이었다. 연락처를 준 적이 없는데 연락한 것은 그렇다 치고… 윈저는 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도현을 초대했다. 루카는 안 올 거라는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 도현은 이유를 붙여가며 정중히 거절했다.
진짜 이유는.
‘믿으라고 보낸 건가?’
윈저를 믿지 않아서였다.
아니,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러려면 적어도 그 비범한 성격 정도는 숨기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현의 예상대로 그날 윈저의 SNS에 올라온 사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푸른 눈의 소녀가 있었다. 도현은 윈저에 대한 경계심을 좀 더 올렸다.
그날 갔으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굳이 겪지 않아도 그려지는 싸한 분위기에 도현은 어깨를 떨었다. 거절한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음 날.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윈저 프란시스 : 너무해. 내가 도와줬는데.]
양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도현은 답장 대신 프란시스 저택의 파티 사진을 그에게 전송했다. 돌아온 답장을 본 도현은 할 말을 잃었다.
[윈저 프란시스 : 이런, 실수했네.]
[윈저 프란시스 : 루나는 네가 SNS 안 한다고 했단 말이야. 완전 할아버지 같다고 그러면서.]
안 궁금했다. …근데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도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윈저 프란시스 : 아, 루나는 루카 애칭이야.]
[윈저 프란시스 : 나는 윈터고. 너라면 윈터라고 불러도 돼. 특별히 허락해줄게.]
다시 말하지만, 안 궁금했다. 그러나 지난번에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라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도현은 심호흡하며 무난하고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을 보냈다.
[괜찮아.]
조금 싸늘했던 거 같기도 했다.
…윈저가 개의치 않았으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 후로 윈저는 종종 문자를 보내왔다. 주로 하퍼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의 놀라운 TMI에 질색했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반응이었다. 윈저가 도현의 반응에 재미를 붙여버린 것이다.
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현은 막 도착한 문자를 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본 터라, 솔직히 좀… 흥미롭기도 했다. 뭐랄까. 개가 사람 말을 하거나 사람이 개의 말을 하는 걸 보는 관찰자의 시점일까.
“뭐 해?”
옆에서 날아온 물음에 도현이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뺨을 내리치는 것에 진이 기겁했다.
잠깐 미쳤구나. 세상엔 흥미를 둘 게 있고 안 둘 게 있었다. 이건 명백히 후자였다. 도현은 머릿속에서 윈저를 몰아냈다.
“아냐, 문자 좀 보고 있었어.”
“이제 핸드폰 꺼야 하는데. 누군데 그래?”
“괜찮아. 이제 끌게.”
도현은 일부러 진의 질문을 피했다. 또랑또랑 맑은 눈빛을 가진 진이 알기에 윈저는 너무… 독특한 애였다. 다행히 진은 더 캐묻지 않았고 도현은 친구를 지킬 수 있었다.
“가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엄마가 적어도 열두 시간은 걸린댔어.”
“열두 시간이나?”
비행기에 익숙하지 않은 니콜라스가 질려 하자, 진이 영화 보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금방이라고 말했다. 그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 번째는, 드디어 방학을 맞이해 4학년을 졸업했고, 스위스로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사실이었다.
“얘들아, 안전벨트는 맸니?”
옆줄에 탄 니콜라스의 아빠, 앤토니 씨가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에게 창가 자리를 양보하고 제일 복도 쪽에 앉아 있던 도현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했어요. 니키도요.”
“그러니?”
앤토니 씨는 도현의 대답에도 몸을 들어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현의 앞줄에 앉은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르샤, 찰스. 너희도?”
“응, 찰스가 해줬어!”
나르샤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찰스는 어딘가 반항적인 분위기의 잘생긴 백인 남성으로, 놀랍게도 나르샤의 남자 친구였다.
가족 여행에 나르샤가 빠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여행까지 와서 나르샤에게 보모 노릇을 시킬 수도 없으니 남자 친구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도현은 니콜라스 가족의 개방적인 분위기에 놀라움을 느꼈다.
도현은 앞줄에서 숙덕대는 두 사람을 보다가 다시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을 모두 확인한 앤토니 씨가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은 찰스뿐만이 아니었다. 니콜라스의 아빠인 앤토니 씨도 완전히 초면이었다. 그는 변호사가 된 게 아니라 변호사로 태어난 사람처럼 그 직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랬다.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묘하게 거리감이 있었다. 안 친한가. 그러고 보니 진이 엄마들과 다르게 니콜라스의 아빠와 자신의 아빠가 별로 친하지 않다고 했지.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예술적 성향이 강한 밀턴 씨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칸트일 거 같은 앤토니 씨는 척 보기에도 다른 부류로 보였다.
앤토니 씨가 옆에 앉은 앰버 씨와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쩐지 여행을 가는 가족보다는 비즈니스 출장을 가는 동료처럼 보이는 거 같네. 그들의 얼굴에서 설렘을 발견할 수 없는 탓인가 잠깐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자신을 부르는 친구들에 그들에게서 신경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