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일상의 균형 (10)
숙소로 잡은 곳은 인터라켄 서역에 있었다. 시내와 조금 거리가 있어서 한적하고 조용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시끄러운 걸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장점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거리가 있다고 해도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터라켄 자체가 아주 작은 마을이라,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도현은 피곤함조차 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몽실몽실한 구름과 맑은 하늘, 그리고 풀밭. 양 한 마리가 뛰놀 것같이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도현아, 하루 우유 모티프가 여기인 거 아니야?”
굳이 되새겨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괴로워진 도현이 태연한 척 대답했다. 말끝이 흐려지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다행인 것은, 아빠가 방금 한국어로 말했다는 사실이었다. 도현은 제 친구들이 그 광고를 영원토록 몰랐으면 싶었다.
아무튼, CG로 만들어냈던 그 멋진 풍경보다 지금 두 눈으로 보는 풍경이 더욱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도현은 금세 과거의 괴로움을 잊고 풍경에 흠뻑 빠졌다.
그들은 숙소에 짐을 거의 던지듯이 가져다 두고는 마을 탐방을 나섰다. 딱 오후 시간대에 도착한 터라, 햇살이 온기를 품고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
돌로 만든 교회를 지나 한적한 거리를 걷다 보니 얼마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중심부에 가까워져 있었다.
“어, 위에!”
진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자, 낮은 고도에서 빙빙 돌고 있는 풍선, 아니, 사람이 보였다.
“패러글라이딩 하나 봐!”
니콜라스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패러글라이딩은 여행 버킷리스트에 당당히 올라와 있는 항목이었다. 가장 기대한 사람은 뻔하게도 니콜라스였다.
그가 흥분해 날뛰는 걸 적당히 받아주며 조금 더 걷자 인터라켄 중심부에 있는 회에마테 공원에 도착했다.
패러글라이딩 선착장이기도 한 공원은 솔직히 크진 않았다. 다만 자유로운 패러글라이더와 푸른 잔디, 티 없는 하늘이 어우러져 정신까지 맑고 시원하게 개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잠깐 구경을 멈추고 공원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한창 잘 먹을 나이인 니콜라스가 배가 고프다며 울상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적게 먹어. 더 많이 먹어야 크지.”
지금도 작은 편은 아닌 거 같은데. 그리 생각하던 도현은 제게 말을 건 찰스를 돌아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넉넉한 셔츠에도 가려지지 않는 넓은 어깨가 시선을 강탈했다.
그래, 내가 병아리나 메추리쯤으로 보이겠구나. 도현은 순순히 인정하며 찰스가 밀어주는 빵 조각을 하나 가져와 입에 물었다. 그는 어미 새처럼 도현이 꼭꼭 씹는 것까지 보았다.
더티 블론드를 왁스로 올린 그의 인상은 좋게 말하면 반항적인 매력이 있고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양아치 같았는데,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20대 특유의 반항적 기질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아이들에게 상당히 친절했다. 그런 면에서는 나르샤랑 찰떡궁합이었다.
찰스는 성격도 나르샤처럼 밝고 유쾌해서 일행에 금방 스며들었다. 도현의 부모님도 그가 마음에 드는 기색이었다. 진은 그냥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 같았고.
그러나 딱 한 명.
그를 못마땅하게 보는 이가 있었으니.
“칫.”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 니콜라스가 전투적으로 밥을 먹다가 간간이 그를 흘겨보았다. 둘째한테 엄마를 빼앗긴 첫째의 심정인가. 도현이 니콜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이 마주쳤다.
“너.”
“어?”
혹시 생각한 게 들켰나 싶어 어색하게 웃을 때였다.
“너는 내 편이지?”
“…그렇지?”
그냥 평범하게 이상한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도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웃었다. 도현은 말을 얹는 대신 그에게 치즈 케이크를 양보했다. 니콜라스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식기가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단란한 웃음소리, 바람 소리와 어디선가 부글부글 스튜가 끓는 소리까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이런 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샌디에이고도 평화로운 동네였지만, 인터라켄의 한적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와는 좀 달랐다. 도현은 언젠가 혼자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면,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몇 달간 살아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회에마테 공원을 보고 있을 때였다.
찰칵!
갑작스러운 카메라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는 사람은 서혜나였다. 서혜나는 찍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감탄했다.
“이거 되게 잘 나왔다.”
“어디 봐봐.”
이장혁이 호기심을 가지며 고개를 빼 들었다. 곧 그는 배경 화면으로 써야 하니 사진을 보내달라는 것으로 감상을 대체했다.
“내가 찍었지만, 너무 잘 나왔는데.”
그러면서 은근히 이쪽을 쳐다본다. 무언가 목적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고 있자, 엄마가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이거 SNS에 올리는 거 어때?”
그거였나.
“여행 일지처럼 사진이랑 일과를 기록해놓는 거야. 그러면 나중에 추억하기도 좋지 않을까? 네 팬도 좋아할 거고.”
팬이라는 말에 찰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도현은 고민에 빠졌다. 엄마의 말처럼 여행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올리면 나중에 보기 편할 거 같긴 했다.
지금이면 괜찮으려나. 도현이 가만히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두 아이의 눈을 보고는, 저울질하던 걸 치웠다.
그래. 언제 또 이렇게 같이 여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좋은 건 남겨놔야지. 그런 생각 끝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혜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도 사진 같이 찍을래!”
“어머, 그럼 같이 찍은 사진 올려도 괜찮니?”
“응? 당연하죠! 그러려고 찍는 건데. 저도 같이 올려주세요!”
진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보통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는 일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게 진다웠다. 니콜라스는 진과 다르게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뭐, 그것도 어차피.
“너도 같이 찍어야지. 셋이 하나잖아.”
저런 말 한마디면 흔들릴 수준의 망설임이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마을 탐방의 목적은 구경에서 포토 존 찾기로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예쁜 곳이 있으면 일단 가서 서고 봤다. 처음에는 세 아이만 찍었지만, 나중에는 서로를 돌아가면서 찍어주었다. 특히 나르샤와 찰스 커플은 사진을 찍는 데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와 반대로 앰버 씨와 앤토니 씨는 사진에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였다. 가족사진은 나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거 같은데….
도현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무언가 관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시선 끝에는 융프라우를 배경으로 서 있는 가비 부부가 있었다.
두 사람은 분명 웃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다정한 부부 그 자체인데 왜 자꾸 눈에 밟힐까.
앤토니 씨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곤 때문인가? 일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다. 이번에 시간을 내려고 한동안 무리했다는 것도. 그렇게 쉴 틈 없이 일하고 12시간 넘게 비행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도현은 그와 비슷한 데이먼 컬렌버그가 자연스레 떠올랐고, 이내 앤토니가 안쓰러워졌다.
“도현아! 이 사진 올리려는데 어때?”
“어떤 거요?”
서혜나가 밝은 얼굴로 물어오는 것에 도현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사진을 본 도현이 입을 벌렸다.
“찍고 있는 줄 몰랐는데….”
사진은 도현과 진, 니콜라스가 셋이서 손을 잡은 장면이었는데, 진의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패러글라이더를 발견했을 때였다.
정겨운 느낌의 길목과 옆에 자리한 양 목장 덕일까. 아니면 햇빛에 유난히 금실처럼 빛나는 진의 머리카락 덕일까. 어쩌면 크게 뜨인 니콜라스의 에메랄드색 눈동자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무엇 덕분이든, 사진은 꼭 어떤 동화 같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자연스러운 표정들이 깨끗하리만치 맑고 순수했다. 의도하더라도 나오기 힘들 거 같은 분위기였다.
“…좋아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도현이 홀린 듯이 말했다. 서혜나가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 의기양양한 얼굴에 이장혁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도현의 SNS 계정에는 오랜만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오.”
찰스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너 진짜 인기 많구나.”
그에게는 피드를 올리자마자 달리는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이 인상 깊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여태 도현이 배우란 걸 알고도 그다지 반응 없더니 여기서 반응했다.
도현이 대답 대신 웃어 보이고선 다시 댓글을 읽었다. ‘보고 싶었어’, ‘너무 예쁘다’, ‘사진 더 올려줘….’
음.
도현이 손가락으로 뺨을 문지르다가 입을 열었다.
“여행하는 동안만이라도 자주 올리는 거 나쁘지 않겠네요.”
그 말에 다들 잘 생각했다며 한마디씩 던졌다. 정말 도현의 SNS 운영에 관심이 많아서는 아니었고, 그가 학교까지 쉬어가며 고생한 걸 알기에 그간의 일을 훌훌 털어내란 뜻의 격려였다.
“그럼 하루에 한 개씩 올릴까? 응? 그럴까? 아니, 하루에 두 개, 음, 세 개? 이건 과한가?”
아, 물론 엄마는 제외하고.
걱정을 안 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SNS에 진심이란 소리였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SNS에 자신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것에.
화제가 SNS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모인 만큼 말할 것도 많았다. 테이블에 마을 탐방을 하며 샀던 피자를 펼쳐놓고,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놀았다.
도현은 생각했다.
이보다 완벽할 순 없다고.
* * *
그 완벽함을 내가 망칠 줄은.
* * *
여행 8일 차.
하루는 패러글라이딩 하고, 하루는 브리엔츠 호수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하루는 튠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하루는….
느긋하게 보내기도, 바쁘게 어딘가를 돌아다니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인터라켄에 오는 사람들의 목적지가 다 비슷비슷해서 그런가, 일주일간 여행하다 보니 유독 자주 마주치는 일행도 있었다.
지금처럼.
“어! 또 만나네.”
하더쿨룸으로 가는 산악 열차 안에서 마주친 남자가 아는 척을 해왔다. 이미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안면을 튼 사이였다.
“하더쿨룸 가시나 봐요.”
“네, 스위스에 왔으면 한 번은 들러줘야죠.”
이장혁이 친근감을 가지고 묻자 남자가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한국인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주 마주칠 줄이야. 처음 봤을 땐 그 도현이가 눈앞에 있어서 정말 놀랐는데, 이젠 멋대로 친근하게 느껴진다니까요.”
쿡. 옆에 있던 니콜라스가 도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쳐다보니 입 모양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냥 별 얘기 아니야. 자주 마주쳐서 신기하다고.”
남자가 한국어로 말한 탓에 그 내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적당히 설명해 주었다. 니콜라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아마, 도현과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관심 가지는 거 같았다. 합석하시겠냐는 밀턴 씨의 질문에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전 이만 자리로 가볼게요. 다음에 보자, 도현아.”
“즐거운 여행 되세요.”
유명세 때문인지 남자는 도현을 제일 친근하게 여겼다. 인사를 건네는 남자에 도현이 적당한 인사를 돌려주었다. 남자는 사람 좋게 웃곤 자리로 돌아갔다.
“왜 그래?”
난데없는 질문에 도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진이 고개를 숙이자 시야에 금빛이 가득 찼다.
“너 저 사람 불편해하잖아.”
“…보였어?”
“집중해서 보면? 나만 알걸.”
“그냥 낯선 사람이라 그래.”
도현의 대답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낯을 가리는 거야, 익히 봐왔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진은 도현이 도현했다 생각하고 넘겼다.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에게까지 신경 쓰기에는 너무 재밌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도현은.
눈을 감으며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주변이 고요해지며 소음이 멀어진다. 통제된 시각 대신 조금 더 근원적인 감각에 접근한다.
도현은 흐름을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평소에는 굳이 흐름을 보려고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번 트인 감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뜻은, 기척에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민감하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이렇게 인구수가 적고 대자연이 펼쳐진 한적한 곳이라면 더.
삼 일 전.
처음 우연히 마주친 날부터 남자의 기척은 계속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