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일상의 균형 (11)
다닥다닥 열차 끝에 붙어선 아이들이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도착하는 데 십 분 정도 걸린다는 말에 시시하다고 했던 니콜라스가 가장 즐거워했다.
하긴, 해발 1,322m를 십 분 만에 올라가는 거니까. 게다가 일주일 동안 지내던 마을이 점점 장난감처럼 보이는 것도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열차는 금방 전망대까지 도착했다.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꾸물대며 열차에서 나왔다. 그리고 밖의 풍경을 보는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쪽에 호수가 있어!”
“바보야, 인터라켄이잖아.”
진은 니콜라스의 말에 딴지를 걸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호수의 사이라는 말 그대로 왼쪽에 브리엔츠 호수, 오른쪽에는 튠 호수를 낀 작은 마을은 뒤로 융프라우가 펼쳐져 있었다.
일주일 넘게 지냈던 곳인데 새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건 아이들뿐만이 아닌지 어른들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은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에게 보내 줘야겠다며 핸드폰을 들었다. 니콜라스도 질세라 합류했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사진 찍기 재능은 처참했다.
“초점이 흔들려서 그래.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봐, 이렇게 하면… 자, 어때.”
니콜라스 뒤편에 서 있던 찰스가 직접 팔을 받쳐주며 도와주었다. 니콜라스는 그를 쳐내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얼굴을 하더니,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순간 사진을 대충 확인하곤 도현의 옆으로 호다닥 뛰어왔다.
나르샤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에 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진이 한심함을 가득 담아 니콜라스를 보았다.
“뭐.”
“이 정도면 친해질 때도 된 거 아니야? 찰스도 저렇게 잘해주는데.”
“내가 해달라 한 거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지.”
아, 거기까지.
니콜라스의 표정이 가라앉으려고 하고 있었다. 더는 위험 수위였다.
“사진은 어떻게 나왔어? 보여줘.”
도현의 질문에 니콜라스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사진을 보여줬다. 진도 도현의 말을 알아들은 듯 입을 다물었다.
진은 관찰에 능숙한 만큼 잘 맞춰주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예외가 있는 법이고, 진의 예외는 니콜라스였다. 어릴 때부터 너무 가족처럼 자란 탓인지 니콜라스는 진이 관찰할 ‘타인’에 속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관찰을 끝마쳐서일 수도 있고.
그래서 유독 진과 니콜라스의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 두 사람 다 얌전한 편은 아니라서 더 그랬다.
최근 몇 년 사이 다툼이 극적으로 준 건, 전적으로 도현의 덕분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치기 전에 적절히 끊어내니까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잘 나왔네.”
“내가 찍은 거랑 비슷한데?”
“…….”
“너 왜 말을 안 해?”
“아냐, 나도 동의하는 중이었어.”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도현은 당당하게 시선을 받아쳤다. 순진한 니콜라스는 제 친구가 배우란 것을 잊은 건지 그 표정에 깜빡 넘어가 ‘진심이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들 논다는 얼굴로 보고 있던 진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사진 누구한테 보낼 거야?”
“음, 할리? 브라운? 헤더?”
도현이 적당한 이름을 꺼내자 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왜 저 입을 막아야 할 거 같지?
“맥 그 개같은 새ㄲ,”
“입!”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단어에 도현이 기겁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 다비드? 다비드인가?
니콜라스는 나르샤의 보살핌 덕에 말투가 은근히 부드러웠다. 진의 자매 같은 친구인 지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 다비드가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방학이 끝나면 다비드와 대면을 좀 해야겠어.
“읍, 으부.”
“진짜?”
“으부부.”
“알았어. 또 그러면 테이프를 붙여놓을 거야.”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니콜라스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 어떻게 알아들은 건데?
천천히 손을 떼자 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여튼, 넌 너무 물러. 걘 지금 몇 달째 잠수 타는 중인데 욕 좀 하면 어때서!”
“넌 열 살이잖아….”
“너도 열 살이면서.”
그게 맞는데 좀 애매해.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던 도현이 진을 외면했다. 진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맥한테 보내는 거 어때?”
“보내도 답장은 안 할 텐데.”
“무슨 소리야?”
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당연히 배 아프라고 보내는 거지!”
“배 아프라고?”
“걘 열 좀 받아봐야 해. 자기는 집구석에 콕 박혀 있는데 우리는 여행하고 잘 놀러 다니면 짜증 나지 않겠어? 아냐, 이왕 보내는 김에 점심 메뉴까지 찍어서….”
도현은 윈저와 진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은 자신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다.
“지가 씹으면 어쩔 거야. 내가 보낸다는데.”
팔짱을 낀 진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리고 진짜로 보냈다.
그건 좀 아닌 거 같다는 니콜라스의 반대와 도현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메시지를 보고 황당해할 얼굴이 생각나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나는 말렸단 걸 알아줬으면. 연락 없는 상대에게 매주 끈질기게 디저트를 보내고 있는 당사자가 생각했다.
일행은 전망대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왠지 구름이 심상치 않더라니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밖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도현이 고른 음식은 뢰스티였다.
스위스 음식들은 대체로 짠 편이라 담백한 입맛을 가진 도현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중 가장 먹을 만한 게 이 뢰스티였다. 쉽게 말하면 감자 팬케이크. 아니, 해쉬브라운과 더 비슷한가?
뭐든 어떤가 싶어서 조금 잘라 먹었다. 그러자 며칠 사이 친해진 찰스가 자기 접시에 소시지를 덜어주었다.
“저 괜찮은데….”
“아니야. 넌 안 괜찮아.”
그는 자기가 내 어미 새라고 착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세 아이 중에서 유독 하얗고 조용한 게 무녀리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자꾸 먹을 걸 챙겨주려고 들었다.
떨떠름하게 소시지를 잘라 입에 넣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평범한 레스토랑의 풍경이 보였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 창가와 맞닿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남성을 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쳐다보고 있었던 건가?’
여기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같은 열차를 타고 왔고. 전망대에는 매점을 제외하고 식당이 하나뿐이니까 동선이 겹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몰래 쳐다보는 건.
도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느껴지던 기척과 더불어 은근히 닿아오는 시선이 못내 거슬렸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걸 보니, 무언갈 할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도현이 테이블에 앉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대인원이었다. 아이들이 어딜 갈 때면 항상 어른이 한두 명씩은 동행했다. 문제가 생기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래,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르옌 이슈가 영향을 끼치긴 했나 보다. 한 달 넘게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보니, 사람을 쉽게 의심하게 됐다. 남자가 따라다니는 거 같다는 의심은 여전하지만, 무작정 의심하기엔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에 예민하기에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떠오르는 감정은 호감이었다.
그냥 내가 더 조심하자. 결론을 내린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비가 조금 그쳤을 때, 일행은 정거장으로 향했다. 우산을 챙기지 않아 다들 머리를 감싸 쥐고 뛰어야 했다.
비 내리는 풍경 속에서 산을 내려가는 건 색다른 느낌이었다. 잠깐 그쳤던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열차 창문에 곧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지잉-.
“내 건가?”
진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들더니 ‘아니네.’라고 중얼거렸다. 나인가. 의자에 내려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이젠 낯설지 않은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제이스 테일러 : 거기 어디야?]
어디냐니?
[제이스 테일러 : 피드 올라온 거 봤는데 엄청 예쁘더라 나도 가고 싶다]
그 소리였구나. 도현이 답장을 보내려던 때였다.
[제이스 테일러 : 근데 나]
[제이스 테일러 : 팔로우 언제 받아줄 거야?]
[제이스 테일러 : 할은 받아줬던데]
[제이스 테일러 : 실망이야]
팔로우 신청을 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도현의 계정은 대부분 서혜나가 관리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팔로우 신청이 워낙… 넘쳐나서.
그 끝없는 목록에서 제이스를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제이스 테일러 : 실망이야아]
[제이스 테일러 : 실망실망]
[제이스 테일러 : 서운해에]
[제이스 테일러 : 서어우운우우워어어~]
일단 문자를 보내야 조용해질 거 같은데 보낼 시간을 안 줬다. 질린 표정을 짓던 도현이 간신히 답장을 보내자 제이스가 조용해졌다.
[제이스 테일러 : !!!!]
[제이스 테일러 : jay._.oo]
[제이스 테일러 : 신난다]
[제이스 테일러 : 지금 받는 거지?]
[제이스 테일러 : 나 대기하는 중]
이따가 받으려고 했는데 너무 기대하니까 아니라고 하기도 그러네. 도현은 결국 계정에 들어갔다.
여기다 검색하면 되는 건가.
자주 사용해보지 않아 어색하게 아이디를 쳐보았다. 그러자 상단에 제이스의 계정이 나타났다. 이거구나, 싶어서 팔로우 신청을 받았다.
근데 팔로우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뭐 해?”
“페이스그램 보고 있어.”
“왜?”
“친구가 팔로우 받아달라고 해서…. 니키?”
문득 느껴지는 싸함에 고개를 들었다. 니콜라스가 얼굴을 굳히고 도현을 보고 있었다.
“네가 말한 친구가 얘야?”
내민 화면에는 제이스의 계정이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 제이스가 말했구나. 도현이 깨달은 눈으로 제이스가 막 올린 피드를 보았다.
- 우리도 다음에 놀러 가자!
그렇게 써진 피드에 태그된 건 도현과 헤레이즈였다. 그간 연락하면서 내적 친밀감을 많이 쌓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유명한 제 친구들을 자랑하고 싶었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현이 힘겹게 다시금 시선을 올렸다.
싸늘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
“너 얘랑 연락 안 한다며.”
“그땐 그랬어. 그 후에 연락한 거야.”
진실을 숨길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답했을 땐 연락 안 했던 게 맞았다. 그러나 이것도 충분히 기만적인 모양이었다.
초록색 눈에 가득 찬 배신감에 도현이 흠칫했다.
“나한테는 안 친한 척했잖아. 너 일부러 숨긴 거지?”
“그건 맞아. 그런데 나는….”
“왜 나한테 비밀 만들어? 왜 거짓말 해?”
“내려서 이야기하자. 니키, 내가 숨긴 건 미안해. 어떻게 된 건지 다 말해줄게.”
아무리 나르샤가 그렇게 말했더라도 친구에겐 솔직했어야 했다. 지나간 잘못을 후회하며 달래자, 니콜라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이 망한 거 같은 분위기에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봤다.
어른들과 다른 줄에 앉은 탓에 다들 이 대화 소리를 듣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열차가 멈추고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현이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니콜라스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언제 친해진 건데?”
솔직히 말해도 되나 싶어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숨겨서 이 사달이 난 걸 기억해내고 입을 열었다.
“네 시합 구경하러 간 날.”
“뭐? 너 그날 나랑 약속했잖아.”
실제로 손가락까지 걸고 제이스를 무시하겠다고 약속했던 도현이 합죽이가 되었다.
“너는 약속이 우스워?”
그렇다고 이 상황이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제이스는 헤레이즈와 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니콜라스와도 아닌 척하지만, 장난을 주고받는 모습을 봤을 때 서로 친밀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은 아니었다. 배신감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평소의 니콜라스라면 몇 번 투덜거리다 넘어갔을 일이었다. 그동안 태도가 좀 이상했던 거랑 관련 있는 건가?
깊게 고민하던 중에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열차에서 내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얼굴을 구겼다. 정말 따라다니는 건가? 불쾌함과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너도 내가 귀찮아?”
“…뭐?”
상처받은 표정에 놀라 뒤늦게 되묻고 말았다. 니콜라스는 그사이 무슨 의식의 흐름을 거쳤는지 완전히 확신한 얼굴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황당한 전개가 이해되지 않아 니콜라스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니콜라스가 도현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았으니까.
“니키?”
도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넋을 놓았다. 먼저 상황을 파악한 건 진이었다.
“니키 잡아요!”
니키를 잡아? 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하던 어른들은 저 멀리 등을 보이고 뛰어가는 니콜라스를 보고 경악했다.
“어, 어? 니키! 쟤 어디 가! 니콜라스!”
“젠장, 제가 따라갈게요.”
찰스가 빗속을 헤치며 달려갔다. 금세 찰스의 등마저 멀어졌다. 그 뒤를 몇몇 어른들이 따라갔다.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도현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망연히 서서 비가 내리는 마을을 쳐다보았다. 진이 사정없이 어깨를 흔들어대자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니키 찾으러 가야지!”
맞아. 나 때문에 화가 난 거 같으니 사과를 해야 하는데… 니키는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여기서 갈 데가 어딨다고. 아니, 타지에서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면… 여긴 관광객도 많은데. 비도 오고.
순식간에 치고 올라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며 니콜라스가 달려간 방향을 볼 때였다.
“…어?”
손끝이 싸하게 식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