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일상의 균형 (12)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현!”
짜악!
눈앞에서 크게 손뼉을 치는 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깜빡였다. 진이 화가 난 얼굴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정신 좀 차려! 이도현!”
진이 풀 네임으로 이렇게 부른 적이 있던가. 얼굴을 굳힌 진은 평소와 전혀 다르게 보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패닉에 빠지는 건 니키를 찾은 후여도 되잖아.”
그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놀랄 틈도 없었다. 도현은 깊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기차역 내를 훑어보았다.
“도현아, 뭘 찾는 거니?”
두리번거리는 모양새에 이상하다고 느낀 서혜나가 물어왔다. 도현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남자분이요. 자주 마주쳤던 한국인 남자분.”
“그분이 왜?”
“지난 삼 일간 저희랑 너무 자주 마주치지 않았어요? 꼭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뭐? 너 지금 무슨….”
사람들이 그 말뜻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도현이 초조하게 말했다.
“아까도 계속, 기차역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거든요. 니키가 뛰어가기 전까지만 해도요. 그런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너무 넘겨짚는 거 아니야?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걸 수도 있잖아.”
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런 가정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도현의 말을 부정했다. 도현도 그러길 바랐다. 불안함에 넘겨짚은 것이길.
“일단, 니키를 찾는 게 먼저야. 찰스가 따라갔으니까, 니키만 찾으면….”
“여보세요?”
- 나나! 거기로 니키 안 갔어요?
다급한 음성은 나르샤의 것이었다.
“여기엔 안 왔어. 어떻게 된 거야?”
- 찰스가, 니키를 놓쳤어요. 최대한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는데 너무 빨라서….
“나르샤, 괜찮아. 진정해. 숨 쉬고…. 우리도 갈게. 같이 찾아보자.”
서혜나가 차분히 대답했다. 그녀의 침착함에 옮은 건지 떨리던 나르샤의 목소리도 점차 진정되어 갔다.
서혜나의 눈동자가 도현에게 맞닿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갈등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방금 도현이 한 말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서혜나는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거까지 말하면 일이 너무 커질 수 있어. 그리고 도현아, 솔직히 엄마도 진의 생각이랑 같아.”
“하지만….”
“걱정되고 불안한 건 알겠어. 하지만 여긴 인터라켄이야. 작은 마을이고, 어디든 마주칠 수 있는 곳이야. 행선지도 마찬가지고. 며칠간 자주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을 의심할 순 없어. 기차역에서 쳐다봤던 것도… 그저 아는 일행이 보이니까 쳐다본 걸 수도 있잖아.”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도현의 머리도 차갑게 식었다. 그 말이 맞았다. 그저 자주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는 걸 아는 도현만이, 그를 의심했다. 그렇다고 하나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아빠는 진즉에 니키를 찾는 걸 도와주러 떠났고, 도현의 옆에 남은 진과 서혜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
도현은 깨달았다. 지금 그가 따라다녔다고 주장해봤자 그들의 신뢰를 얻어낼 수는 없다는 걸.
이미 패닉에 빠져 넋을 놓았던 모습과 불충분한 증거로 한 사람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진은 니콜라스가 사라진 게 도현 탓이란 걸 아는 상태였다.
이 순간만큼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불안해서 횡설수설하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 * *
내 편은 아무도 없어.
숨 막히는 사실에 목이 턱 걸렸다. 속이 답답했다. 아까부터 계속 달려서 그런 걸까.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멀어지고, 이내 들리지 않게 되자 빠르게 달리던 발이 서서히 느려졌다.
지난 일주일간 인터라켄을 가장 열심히 탐방한 건 니콜라스였다. 온갖 샛길도, 장애물도, 건물의 위치도 알고 있었다. 멈춰 선 니콜라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적었다.
여기는 안 보이겠지.
돌벽으로 된 교회에 등을 대고 앉아 몸을 웅크렸다. 비 때문에 젖은 옷에서 한기가 느껴져 더 옹송그렸다.
“-키! 니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목소리. 니콜라스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벽에 더 바짝 기대었다. 뒤편에 자리한 나무와 마을에서 제일 높은 돌벽은 작은 몸을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추웠다.
“다들 내가 멍청인 줄 알지.”
니콜라스가 작게 중얼거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멍청이는 니콜라스가 아니었다. 그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전부 다.
엄마 아빠가 이혼할 거란 것도.
이게 마지막 가족 여행이란 것도.
전부 다.
정말 다들 내가 바보 멍청이 머저리인 줄 아는 게 틀림없었다. 밤마다 와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갑자기 여름 방학에 여행을 간다고 해서 모를 줄 알았던 걸까.
헹, 바보들. 니콜라스가 코웃음을 쳤다.
“다 아는데 말이야.”
비죽, 솟아올랐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처음엔 열심히 부정했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려서. 구급차의 빨간 불처럼 웨엥웨엥. 참 시끄럽게도.
그게 싫어서 팔을 붙잡고 징징댔다. 다음 주에도 다 같이 여기 놀러 오자고. 다음 달에도. 내년에도. 그 후에도.
그럴 때면 엄마 아빠는 웃으면서 약속해 주었다. 손가락까지 걸어주면서.
지킬 생각도 없었으면서.
추운 이유는 차가운 빗물에 체온이 빼앗긴 탓일 테다. 니콜라스는 이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말고, 찰랑이는 물속에서 헤엄치고 싶었다. 여긴 순 거짓말쟁이들뿐이었다.
- 이리 와, 귀여운 내 사고뭉치야. 어휴. 언제 다 클래. 내가 제일 예뻐하는 건 알아가지고 매번 사고나 치지.
봐, 그것도 거짓말이었잖아.
“그 양아치가 뭐가 좋다고.”
니콜라스가 투덜거렸다. 나르샤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성실한 학생이란 건 이미 안중 밖이었다. 거짓말쟁이. 그가 속으로 나르샤를 잔뜩 비난했다.
걔도 마찬가지야. 니콜라스가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원래는 다 받아 줬으면서, 왜.
왜 이번엔. 불쾌감을 담아 일그러지던 검은 눈동자가 떠오르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미적지근하게 심장을 툭툭 치는 감정은, 후회였다.
“그냥 넘어갈 걸 그랬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니콜라스도 최근 도현을 귀찮게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애정 가득한 눈을 하니까….
아, 정말. 어린애같이 왜 그랬지.
니콜라스가 시무룩한 낯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 표정을 계속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다. 내가 결국 너까지 귀찮게 한 건가 싶어 마음에 작은 멍울이 졌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답답해서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마을이 작은 수족관이 된 거 같았다. 물속에 잠겨서 자유롭게 떠다니고 싶었다.
그냥 바다로 가고 싶어.
“…얘야.”
번쩍.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여기서 뭐 하니?”
* * *
“저 니키 좀 찾으러 갈게요.”
“당연히 찾아야… 아니, 도현아! 같이 다녀야지! 도, 도현아!”
서혜나가 망연하게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진의 손을 잡고 도현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속으로 깊이 한탄했다.
니콜라스도 그렇고, 도현도 그렇고. 이렇게 제멋대로 굴라고 수영이나 발레를 시켜준 게 아닌데. 어쩜 그리들 잘 배웠는지 체력이 끝내줬다. 미칠 일이었다.
“도현! 이도현! 너 안 멈춰 서?”
진이 분노했다. 빗속에서 작은 등이 멈추지 않고 멀어져 갔다. 서혜나는 운동을 해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달렸다. 문제는, 진은 체력이 약한 편은 아닌 것과 별개로 달리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부분이었다.
“진, 괜찮니?”
“허억, 네, 계속 따라가야….”
정말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속도를 늦췄을 뿐인데, 코너를 도니 도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서혜나는 두 갈래로 갈라진 길에 욕설이 튀어나올 거 같아 혀를 아득 깨물었다. 왼쪽, 오른쪽. 이내 더 늦기 전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혼을 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 * *
‘비 때문에 흐름을 읽는 게 쉽지 않아.’
유유히 흐르던 것들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니까 감각이 교란되었다. 이토록 이 능력이 간절한 적이 없었는데, 막상 필요할 때가 되니 비가 내린다. 최악이었다.
좀 더 익숙해지도록 연습할걸. 그동안 충분하다고 여겼건만 이제 와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아니야, 진정하자. 또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집중하는 거야.
세상이 빗소리로 가득 찼다. 구름이 흐르는 방향, 비가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선명히 다가왔다. 그 사이에서, 바람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게 이런 능력이었던가. 왜 생명체들이 흐름을 읽지 못하는지, 기를 볼 수 없는지 처음으로 깊이 이해했다.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넘보면 안 되는 것을 넘본 것처럼.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감각.
생명의 고유한 소리.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표현할 수는 있을까? 니콜라스를 찾아야 하지 않았다면 몇 날 며칠이고 그렇게 멍하니 서 있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덩어리 님이 보는 세계를, 처음으로 엿본 거 같았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도현이 정신을 다잡았다.
모든 영혼은, 기는 그릇에 담긴다. 인간의 경우는 육체. 그러나 애초에 기는 흐르는 것. 그릇에 담겼다 하더라도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게 물들고, 물들이고, 공명한다.
그러니까 알 수 있다. 네 영혼의 생김새는, 색과 소리는 전부 알고 있으니.
도현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뺨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무시한 채 움직이던 눈동자가 한 곳을 응시했다.
저기구나.
걸음이 점차 빨라지다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흐름이 불안정하긴 했지만, 이상은 없는 거 같아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칠 때였다.
그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온갖 상황이 떠올랐다. …아닐 거야. 초조함과 두려움은 검은색 잉크 같아서, 다른 감정들조차 제 색으로 물들였다.
누군가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만큼 도현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모든 것이 휘발되고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더는 나 때문에 잃을 수 없어.
* * *
“…뭐예요? 혼자 두세요.”
“너처럼 어린 애를 어떻게 혼자 둬.”
“냅둬요. 놔두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허, 참…. 서양 애들은 다 이렇게 맹랑한가.”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를 경계하던 니콜라스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그가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 시도는 남자가 붙잡음으로써 불발되었다.
“어딜 가려고! 여기서 보호자 기다려야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거든요? 놔요.”
“어린 게 자꾸 대들기는…. 형이 하는 말 들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니콜라스가 팔을 힘껏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힘이 빠진 남자가 손을 풀자, 니콜라스가 홱 몸을 뺐다.
“이게 진짜! 너 어른 말 안 들을래? 기껏 찾으러 와줬더니….”
남자가 다시금 팔을 뻗었다. 어깨를 잡아챌 심산이었다. 화악, 어깨가 강하게 붙들린 니콜라스가 강제로 멈춰 서게 됐다. 그가 통증에 입술을 깨물자 남자가 빈정거렸다.
“너 벌써부터 그렇게 버릇없이 굴면….”
“떨어지세요.”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하던 남자가 일순 멈췄다. 그가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고 반가움을 담아 입을 열었다.
“도현이구나! 내가….”
그 목소리가 멎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채 끝내지 못한 말이 뚝 끊겼다.
하필 쟤가. 니콜라스가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은 걸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하기 전에 쏘아붙여야지. 그리 생각하며 무거운 고개를 들던 니콜라스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타닥, 타닥 비가 내리는 골목. 그곳에서 걸어 나온 소년이 이쪽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창백한 뺨에 달라붙어 유독 짙어 보였다. 입술의 핏기마저 가신 소년이 그보다 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날카롭게 선 목소리가 빗물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손 떼고, 떨어지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