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일상의 균형 (13)
짧지만 길었던 정적은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깨졌다. 그가 니콜라스의 어깨를 붙든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웃는 얼굴은 몇 번 마주쳤을 때 보았던 것처럼 유했다.
“아, 하하. 지금 약간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도현아, 너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는 지금 보호자 찾아주려고 하던 거야. 얘, 내 말이 맞지?”
니콜라스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쯤 되면 표정을 풀 법한데 검은색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니키. 이리로 와.”
“내가 왜… 아, 알겠어.”
배짱을 부리려던 니콜라스는 본전도 못 찾고 꼬리를 내렸다. 내가 네 개인 줄 아냐. 마음속으로 쏘아붙이면서도 얌전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나도 이렇게 찌질하게 굴고 싶진 않은데.
힐끔. 도현의 얼굴을 훔쳐본 니콜라스가 다시 공손하게 시선을 내렸다.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나르샤가 화났을 때가 제일 무서운 줄 알았는데, 더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평소에 도무지 화를 내는 법이 없어서 그냥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없는 줄 알았는데.
없긴 무슨.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런가. 방금까지 우울함의 웅덩이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는데 강제로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적개심이 누그러지지 않자 남자는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도현아. 놀란 건 이해해. 근데 이건 아니잖아. 도와준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면 안 되지. 내가 살다 살다….”
심기가 상한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미동 없는 도현 대신 니콜라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불쾌감을 표출하는 성인 어른은 어린아이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아까 멋대로 붙잡은 게 짜증 나서 편들기 싫은데. 그래도 시시각각 남자의 표정이 더러워지는 걸 보니 저절로 입이 열렸다.
“…야, 데려다주려던 거 맞아.”
이제 알아들었겠지. 그간 니콜라스가 봐온 도현이라면, 오해한 것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고 넘어갈 것이다. 니콜라스는 도현의 반응을 예상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근데 내가 사라진 게 그렇게까지 충격이었나? 이렇게 화를 낼 정도로…. 그리 생각하니 친구의 낯선 모습이 퍽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가 괜히 목덜미를 매만질 때였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어?”
“데려다주려던 거였는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어떻게 확신하냐고 말했어, 니키.”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젠 표정 관리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너, 너 자꾸 왜 이래?”
당혹스러움이 섞여 나갔다.
“걱정한 건 알겠는데… 나 아까까지 여기 혼자 있었고 저 아저씨 우연히….”
길게 무어라 말을 하던 니콜라스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잠깐,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해? 울컥 억울함이 치솟았다. 그는 이번엔 참지 않았다.
“왜 걱정하는 척이야? 귀찮고 짜증 난단 얼굴 한 건 너잖아!”
“…그게 무슨.”
급격하게 드리프트를 하는 니콜라스에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하얀 얼굴 한가득 당혹이 차오르자 니콜라스는 더 기세등등해졌다.
“솔직히 너 내가 귀찮잖아! 그래서 사라져 줬는데. 네가 바라던 거 아니야?”
한번 터진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본심과 거짓이 섞여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나랑 한 약속을 어긴 것도 그래. 애초에 지킬 마음도 없었지? 그냥 귀찮으니까 대충 알겠다 하고 넘긴 거잖아. 왜, 찔려?”
“니키, 내가 언제 널 귀찮게…. 일단 잠깐. 진정해. 그건 조금 나중에 얘기하자.”
“왜? 나중에 얘기한다고 달라질 게 있어?”
“지금은….”
“도현아!”
이런 걸 보고 첩첩산중이라고 하던가. 거친 숨을 내쉬며 도현의 팔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다급한 음성과 다르게 약한 악력이었다.
“도현, 너 진짜…!”
안도와 분노를 비롯해 복잡한 심정을 토해내던 서혜나는 도현의 옆에 있는 니콜라스와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곤 말을 멈췄다.
“진. 엠버 씨한테 연락 좀 해줄래? 니키 찾았다고. 여기 위치가… 숙소 근처에 있는 교회 뒤편이라고 말이야.”
차분한 음성에 진이 니콜라스와 도현, 그리고 남자를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야무지게 상황을 전달하는 걸 보던 서혜나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하! 상황이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노기에 서혜나가 살풋 미간을 좁혔다.
“저 애들한테 들으시죠. 전 지금 너무 어이없어서 말도 안 나오니까.”
“저 사람이 니키의 어깨를 억지로 잡아당기고 있었어요.”
말하랬으니 말한다. 딱 그런 얼굴로 도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기대했던 그림이 아닌지 남자가 황당하단 얼굴이 되었다.
“그게 진짜인가요?”
누가 모자지간 아니랄까 봐. 순식간에 안색을 굳힌 서혜나가 남자를 응시했다. 두 까만 시선에 움찔했던 남자가 목청을 높였다.
“와, 나. 미치겠네. 사람들은 알아요? 이도현이 이렇게 막무가내인지? 진짜 연예인들 믿을 거 못 된다더니. 유명하면 뭐, 이렇게 사람 하나 이상하게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본 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사실을 말했는데 이상하게 들렸단 건, 그 행동이 이상했단 소리 아닌가요?”
오. 니콜라스가 속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묘하게 논리적이었다. 남자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까의 당당하던 태도를 던지고 서혜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이 길어지는데도 서혜나의 굳은 얼굴은 여전했다. 그게 어떤 압박으로 다가온 건지 남자는 더욱 열성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어요.”
“역시…!”
펴지던 남자의 안색은 이어진 말에 쩌적, 금이 갔다.
“그런데 한 가지 확인이 필요할 거 같네요.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거 맞아요?”
“예?”
놀란 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이 의외란 눈으로 제 오른팔을 잡은 서혜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말 안 믿는 줄 알았는데.
“…지금 뭐, 제가 일부러 따라왔다는 소리라도 하는 거예요?”
니콜라스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냥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달린 거뿐인데 일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네.”
서혜나가 에둘러 말하려는 걸 앳된 목소리가 단호히 끊어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동글동글한 검은 머리통으로 향했다.
“따라다녔잖아요. 기차역뿐만 아니라,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기어코 폭탄을 터트린 도현에 서혜나조차 경악하여 잠깐 말을 잃었다. 도현은 그런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까. 니콜라스랑 저 쳐다보고 있었죠? 니콜라스가 사라졌을 때 당신도 사라졌더라고요.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 우연 참, 신기하죠.”
전혀 신기해 보이지 않는 말투에 니콜라스가 질린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소름이 끼쳐 한 발짝 물러났다. 우연이라기에 좀 이상한데?
“그건…!”
“참고로 기차역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아닌지, 니콜라스가 움직이는 걸 보고 따라갔는지 정도는 알기 쉽겠죠.”
“…그, 그러니까. 그냥 반가워서 보고 있었는데 애가 갑자기 뛰어가길래 나도 놀라서 따라간 거야.”
이젠 니콜라스와 진도 의심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말의 앞뒤가 맞질 않았다. 아까는 우연히 발견했다면서 이제 와 걱정되어 따라왔다니.
“아하. 놀라서요.”
도현이 단조롭게 따라 말했다. 그걸 이해로 받아들인 남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라서! 참, 이런 오해를 다 받고… 별꼴을 다 보네. 이제 오해 풀렸지? 그럼 보호자도 왔으니 난 이만 가봐야….”
“그래요. 놀라서 따라왔다고 쳐요.”
금방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어 안달 난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도현은 그를 그리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이틀 전 쉴트호른에서 뮈렌으로 따라온 것도 놀라서인가요?”
“뮈렌?”
갑작스러운 지명에 니콜라스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옆에서 진이, ‘우리 이틀 전에 놀러 갔잖아!’라고 속삭여 왔다.
“잠깐, 뮈렌이라니.”
서혜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날 인터라켄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도, 나도 기억나!”
진이 거들자 남자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날 일정이 바뀌어서….”
“아. 일정이요.”
이번엔 또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니콜라스는 진심으로 도현의 입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어제 우리 슈피츠에서 마주쳤죠?”
“그, 그렇지?”
사납던 기세는 어디 가고 절절매는 모양새였다. 누가 봐도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이었다.
“근데 왜 아는 척 안 하셨어요?”
“무슨 소리야. 시내에서 마주쳤을 때 분명 인사했는데. 혹시 까먹은 거면….”
“아니요. 식당에서요.”
“더 자세히 말해봐.”
서혜나의 재촉에 도현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남자는 파르라니 질려가고 이쪽의 기세는 사나워졌다.
“우리가 슈피츠에 도착해서 식당에 들어가고 삼십 분 정도 지나니 저 사람이 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리고 이쪽을 보는데 아는 척은 안 하길래 오늘은 혼자 다니고 싶나 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식당에 나가고 몇 분 후에 시내에서 마주쳤더라고요. 신기하게도, 우연히.”
더 정확히는 우연히 마주치고 나서 계속 가는 곳마다 주변에 기척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는 건 증명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니콜라스의 손을 꽉 잡은 진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남자를 노려봤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도현의 입에서 나오는 ‘우연히’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저도 확신은 없었어요. 당신이 니콜라스를 따라 쫓아오지만 않았더라도 우연이라 여기고 넘어갔을 거예요.”
그런데 선을 넘었잖아요. 화를 꾹꾹 눌러 담은 게 분명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니콜라스는 방금까지 자신이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었단 것도 까먹고, 멍하니 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사람을 의심하기엔 부족-”
“하죠. 알아요. 더 말해볼까요? 삼 일 전에… 아니다. 번거롭게 이럴 것도 없죠. 핸드폰 갤러리 좀 보여줄래요?”
설마, 설마. 서혜나가 그건 아니겠지 하는 얼굴을 했지만.
“사진도 찍었잖아요. 좋네요. 핸드폰에 남은 사진을 보면 언제, 어디서, 얼마나 따라다녔는지 알기 편하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러나 남자의 눈에 도현은 조금도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단연코 이 순간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니키! 니키! 니콜라스!”
타이밍도 좋지. 때마침 니콜라스의 가족이 도착했다. 도현은 뒤를 한번 흘긋 돌아보고는, 남자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눈이 안 웃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이 로펌에서 일한다는 건 말했던가요?”
쿠궁.
그건 막타였다.
* * *
하아. 깊은 자괴감에 도현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남자의 일은 상황의 전후를 전부 들은 엠버 씨와 앤토니 씨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처벌은 쉽지 않을 거다.
양쪽 다 타지에서 온 관광객인 데다가, 명확한 납치의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처벌받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니콜라스가 보호자를 찾아주려 했다고 증언까지 했으니. 그리고 사진을 찍은 것도….
- 그냥 신기해서 찍은 거예요! 티브이에서 보던 애가 있으니까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 진짜 나쁜 의도로 한 거 아니고….
도현이 공인이라는 점에서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따라다니게 된 경위도 기가 막혔다. SNS에 올라온 걸 보고 근처라 호기심이 생겨 따라다녔다고.
망할 SNS.
첫날에는 하루에 한 개 정도 올리다가, 사람들의 반응에 재미를 붙인 니콜라스와 진이 시도 때도 없이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유람선에 타서 올리고, 내려서 올리고, 식당에 가서 올리고.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심해야 했는데.
SNS가 스토킹의 수단으로 쓰였단 걸 알게 된 후 서혜나는 하얗게 질려 몇 번이고 니콜라스 가족에게 사과했다. 그들은 괜찮다며 이해해 주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똑똑.
끼익-
슬쩍, 내민 머리칼은 갈색이었다. 이어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빼꼼히 드러났다.
빨리 들어가! 아, 갈 거야. 간다고! 투닥이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다시 고개를 쏙 내민 작은 머리통이 흠흠, 헛기침했다.
“…왜.”
“아, 아니. 아직도 우울해하고 있나 싶어서.”
“…내가 신경 쓰이게 했어? 미안, 내가….”
“그게 아니라!”
완전히 방 안에 들어온 니콜라스가 결심한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쿡쿡 찔렀다.
“큼, 나 이제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네, 네가 찾으러 와줬잖아.”
까만 눈이 다시금 죽었다.
“늦게 도착했으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몰라. 다 내 탓이야.”
“아악, 나 괜찮다니까!”
“내가 미안해….”
“지금 나 누구랑 대화하는 거지? 이불인가?”
“대화할 가치도 없지. 맞아. 네가 이제 나랑 친구 하기 싫다고 해도 난….”
“보자 보자 하니까… 싫긴 뭐가 싫어!”
“싫다며.”
“그, 그건….”
아까 아무 말이나 내뱉을 때 그런 말을 한 거 같기도 했다.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가지고! 니콜라스는 기억 안 나는 척 넘겼다.
“내가 언제 그랬냐? 하나도 안 싫어. 그러니까 땅 좀 그만 파고 들어가. 그리고 넌 피드 올린 적도 없잖아. 왜 네가 미안해하는 거야?”
생각해보니 웃기는 새끼였다. 니콜라스가 어이없어하자 도현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 계정이고 내 유명세 때문에….”
“그래서. 유명해서 미안하다고?”
“어, 미안….”
답이 없었다. 니콜라스는 느린 깨달음을 얻고 망설임 없이 이불을 걷어냈다. 십 년 만에 햇빛을 본 사람처럼 도현이 쪼그라들었다.
구마되는 악령처럼 빛을 피해 움츠러들던 도현은 이어진 말에 뚝, 멈췄다.
“잘 들어. 네가 여기서 더 유명해져도 난 너랑 친구 할 거야.”
뒤에서 몰래 보고 있던 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잘한다, 니콜라스!
“이젠 네가 날 귀찮아해도 안 사라져줄 거라고.”
“…….”
“그러니까 이만 일어나. 너 빼고 다 거실에 모였어. 찰스가 피자 사 왔거든.”
항상 달램받는 역할이었는데, 달래려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니콜라스는 꾹 참고 말했다.
“진심이야?”
“응.”
부스스 몸을 일으킨 채 잠깐 멍하니 있던 도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우는 건가 싶어서 움찔, 놀랐던 니콜라스는 물기가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다시 보니 우는 게 아니라….
“나도 너랑 계속 친구 하고 싶어.”
좋았어! 진이 소리 없이 환호했다. 드디어 도현의 끝없는 삽질이 끝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큼, 특별히 허락해주지.”
“그럼 네가 친구 하기 싫다고 해도 친구 해도 돼?”
니콜라스가 잠시 아연하게 그를 응시했다. 얘 제정신인 거 맞나? 도현이 낯부끄러운 소리는 곧잘 하는 편이라지만, 이렇게… 유치하진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도현은 제정신이 아닌 게 맞았다. 갑작스럽게 제7의 감각을 과하게 개방한 탓에, 긴장이 풀린 직후부터 일종의 부작용을 겪는 중이었다. 그는 반쯤 무의식에 걸쳐진 상태였다.
쉽게 말해, 생각이 단순해지고 감정에 충실해졌다.
그걸 알 리 없는 니콜라스는 애가 충격을 단단히 받았구나, 싶어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래, 네 맘대로 해.”
허락이 떨어지자 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우울하던 기색이 걷히고 그 자리에 행복이 차올랐다.
간신히 도현을 달래는 데 성공한 니콜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든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얼굴은 왜 찌푸린 거야?”
“그때?”
“기차역에서 대화할 때.”
“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말했다.
“그 남자가 보고 있길래 신경 쓰여서….”
“…그런 거였어?”
완전히 오해를 푼 니콜라스가 멋쩍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저를 보고 웃는 도현에, 몽실몽실 차오르는 따뜻한 감각을 느꼈다.
춥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혼나야지?”
단단히 벼른 얼굴로 쳐다보는 여덟 명의 어른들에 니콜라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또 도망치면 안 되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